한국 드라마 이야기/아랑사또전

아랑사또전, 너무나 인간적인 무연의 하소연 와닿는 이유

Shain 2012. 10. 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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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야 예쁜 사람을 표현하는 여러 말이 많지만 옛날에는 고운 '여신'같은 여성을 '선녀'라 표현하곤 했습니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같다'고 하는 건 최고의 칭찬이었죠. 거기에 선녀'란 표현엔 아름답고 예쁘다는 뜻 외에 다른 한가지 뜻도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부러울 것없는 고귀하고 기품있는 천상의 존재란 뜻으로 평범한 인간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천상과 현세의 간극을 생각해 보면 옥황상제와 함께 있던 선녀를 아내로 만들기 위해 날개옷을 훔친 나무꾼은 정말 간 큰 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랑사또전'의 요물 홍련(강문영)의 연기는 보면볼수록 호러입니다. 악귀가 되어 은오엄마 서씨 몸에 들어간 무연(임주은)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윤달 보름 마다 맑은 영혼을 먹고 하늘의 눈을 가리기 위해 결계를 치는가 하면 다른 악귀들을 부려 저승사자를 해치기도 합니다. 인간의 기억을 지운다거나 무병을 낫게 해주고 한 사람을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게 해주는 건 홍련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 보다 놀라운 건 그런 악귀 홍련의 본래 정체가 '타락한 선녀'였다는 점입니다.

복수에 미친 아낙에서 쫓겨난 선녀까지 드라마를 휘어잡은 강문영.

홍련역의 강문영은 최대감(김용건)에 대한 원한으로 정신줄놓은 아낙처럼 보였지만 홍련의 혼이 씌워지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지금은 선녀의 정체성을 잃어 요물이자 악귀가 되었음에도 마치 나같이 귀한 존재는 이런 더러운 것을 봐서는 안된다는 듯 나긋나긋 새침하게 쏘아부칠 땐 정말 한때 선녀였다는 말에 믿음이 갑니다. 무영(한정수)이나 은오(이준기)같은 위험한 존재가 다가올 때는 눈을 희번득거리며 무섭게 움직이지만 주왈(연우진)을 대할 땐 한껏 우아하게 사뿐히 움직이는 그녀는 정말 천년묵은 구미호같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선녀가 뭐가 아쉬워 악귀가 되었을까. 우리 나라 여러 전설엔 '쫓겨난 선녀'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금지된 연애를 하다가 맡은 일 안하고 게으름 피우다 또는 옥황상제의 연적을 깨 쫓겨난 선녀도 있고 우리가 잘 아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처럼 날개옷을 빼앗겨 쫓겨난 선녀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천상에서 쫓겨난 마고선녀가 성을 쌓았다는 전설도 있고 쫓겨났던 선녀가 인간과 결혼해 정이 들자 옥황상제가 불러도 가지 않았고 결국 벼락이 떨어지는 천벌을 받아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자하게 웃음짓지만 염라대왕 보다 무서운 옥황상제. 잘못을 저지른 선녀들은 쫓겨난다.

천상을 그리워하다 죽은 옥녀봉 선녀는 정말 애절합니다. 목욕하러 지상에 내려왔던 선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되돌아갈 시간이 된 것도 잊었습니다. 선녀는 어서 돌아오라는 천상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야 부랴부랴 옥황상제에게 뛰어가다 앞섶이 풀어헤쳐진 것도 몰랐습니다. 노한 옥황상제는 선녀를 쫓아냈고 그 선녀는 천상이 보이는 거울을 들고 천상의 세계만 지켜보다 결국엔 울다 지쳐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전국에서 전해지는 '옥황상제와 쫓겨난 선녀' 이야기에는 몇가지 부분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옥황상제가 선녀들에게 '인간적인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몇몇 선녀와 관계된 전설 중엔 하늘에 사는 선남이 선녀를 희롱하다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요즘이야 감히 천상의 존재나 여성을 희롱했다면 처벌받는게 당연하겠지만 과거에는 남성이 여성에게 '수작'부리는 일에 다소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전설 속 옥황상제는 이런 '수작'은 물론 옷고름이 풀어진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하지 않고 많은 선녀들을 지상으로 쫓아낼만큼 엄격했습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서도 유사한 옥황상제의 분노가 묘사됩니다.

소를 돌보는 견우와 옥황상제의 딸 직녀는 사랑하는 사이고 결혼도 허락받았으나 사랑에 빠져 게으름을 피우게 됩니다. 소를 타고 놀다 천상의 밭을 못쓰게 만들고 베를 짜지 않고 놀기만 합니다. 그래서 견우가 귀양을 가고 두 사람은 일년에 한번 칠월칠석에만 만나는게 허락되었다는 이야기죠. 옥황상제는 자신의 딸에게도 원칙을 지켜 벌을 내렸으나 최소한 직녀의 신분 때문에 쫓아내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확실한 건 하늘의 존재들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라 옥황상제는 작은 실수나 탐욕 하나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점이죠.

엄격하고 늘 똑같은 천상의 삶이 남매에게 행복했을까. 무연은 아니라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 속 선녀들이 저지른 잘못은 어찌 보면 하찮은 것들입니다. 갑자기 쫓겨나 돌봐주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풍경에 넋이 빠져 돌아갈 시간을 잊는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할 수 있는 실수인데 옥황상제는 엄청난 벌을 내립니다. 천상의 선녀는 '아랑사또전'에 등장하는 무뚝뚝한 선녀(노희지)처럼 늘 같은 일을 하며 재미없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옥황상제(유승호)는 그런 선녀를 두고 농담을 하지만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천상에서 수천년동안 같은 일을 하자면 웃음이 날 리 없습니다. 평범한 인간은 감당하기 힘든 꽉 짜인 삶이죠.


갖고 싶은 욕망이 허락되지 않는 지긋지긋한 천상의 삶. 선녀 무연은 오늘이 내일같고 내일이 오늘같은 이곳이 정말 좋냐고 무영에게 묻습니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그녀는 천상의 선녀가 되기엔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것입니다. 영원하고 화려한 천상의 삶을 버리고 요물이 되었지만 그녀는 마음껏 욕심부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녀가 바라던 '인간적인 것'은 권력, 재물 그런 것이 전부였을까요. 주왈에게 집착하고 애정을 퍼붓고 '어머니'라 부르라 하는 것으로 보아 무연은 정말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남의 몸을 차지해서라도 말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인간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놓치기 싫었던 인연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갖지 말라는 것이 싫었다는 무연이 말하는 욕망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재물욕, 명예욕과 같은 것도 있지만 불가에서 말하는 속세의 연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사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끝끝내 무영을 오라버니라 불렀던 무연은 그런 것들 하나하나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선녀인 자신이 싫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은오와 아랑의 사랑도 주왈의 사랑도 모두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욕망인 셈입니다.

무연의 삶은 아랑과 은오의 결말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힘을 가진 동안에야 사람들을 겁주고 조화를 부려 각종 호사를 누릴 수 있지만 힘을 잃은 홍련은 점점 더 비참해질 것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돌봐준 최대감은 이제 늙은 여우가 되어 홍련이 예전에 선녀였다는 말도 믿지 않습니다. 영혼을 먹지 못해 점점 힘들어하자 이제는 하찮은 요물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주왈은 부귀를 누리게 해준 홍련 보다 아랑을 더 사랑해 마지막엔 아랑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무연이 선택한 인간적인 삶은 불완전했던 것이죠. 이미 죽은 자가 산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건 그래서 비극입니다.

아마도 이런 '인간적인' 무연의 몸부림은 이 드라마의 결말과 꽤 관련이 있을거라 봅니다. 은오와 아랑(신민아)은 이미 죽은 목숨으로 홍련을 무사히 처치하는데 공을 세우면 천상에서 사는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견우와 직녀처럼 천상에서 저승사자와 선녀가 되어 영원히 산다면 그들의 삶은 정말 '헐리우드 해피엔딩'같겠죠. 그러나 무연의 이런 인간적인 몸부림을 보고 나니 죽어서 환생하는 평범한 인간의 삶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하늘의 신분이 좋다고 하나 은오와 사랑이 서로 사랑할 수 없다면 두 사람에겐 아무 소용이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환생할 때 주왈도 같이 가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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