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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급공무원, 간만에 보는 좋은 각본과 매력적인 캐릭터

Shain 2013. 1. 3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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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정원 때문에 정치권이 시끄러워 그런지 '국정원'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에 눈길이 가긴 하더군요. 국정원이면 극중 김서원(최강희) 아버지 김판석(이한위)의 말대로 옛날 '안기부' 아닙니까. 간첩 잡는 곳이니 도무지 장난을 칠래도 칠 수가 없는 대상인데다 20-30년전만 해도 말 한번 잘못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남산 칠성판 위에 눕게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뭐 물론 요새는 국정원 콜센터에서 전화받는 김원석(안내상)의 에피소드처럼 장난전화 거는 사람도 많이 늘었나 본데 '안기부'의 악명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은 간떨려서 그런 장난 못칠 겁니다.

그런 국정원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찍는다니 이거 진지함과 가벼움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희한한 드라마가 나올 거 같단 생각이 들더군요. 스파이 아니면 첩보, 대테러 대응이 떠오르는 국정원을 대상으로 제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 해도 괜찮은 드라마 뽑아내기가 쉬운 일은 아닐거다란 선입견으로 시청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첫 시작이 심상치 않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수없이 휴학했던 김서원은 취업시험을 준비하며 아르바이트에 바쁘고 취업재수생 한길로는 등장부터 자동자 경주에 매진중입니다. 이거 도저히 '공무원' 따위하곤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더군요.

월급 한푼이 아쉬운 김서원(김경자)와 007이 되고 싶었던 한길로(한필운)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개념 똑바로 잡힌 취업준비생 김서원은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치 않습니다. 아버지 김판석은 남의 경운기 몰고 나가 술마시고 사고를 치고 구멍난 내복에 다 풀린 퍼머, 궁상도 그런 궁상이 없는 어머니 오막내(김미경)는 자식한테 없는 살림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돈벌어서 집안에 돈을 부쳐야하는 '김경자'는 13만 오천원짜리 가짜 맞선 알바에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동자 경주에서 져서 돈이 필요했던 한길로와 김서원은 그렇게 '돈 때문에' 첫만남을 시작했고 인상적인 애프터 신청까지 하게 되었지요.

그런가 하면 '조국'이 뭐냐고 묻는 국정원 면접시험장의 질문은 진지하기 짝이 없습니다. 목소리에 박력이 넘치는 장영순(장영남)은 긴장한 취업준비생들을 단숨에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선보입니다. '조국'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없이 국정원이 철밥통에 좋은 직장이라기에 방송국 취업에 유리해서 취업하려고 했던 젊은이들은 기가 죽어 돌아섭니다. 작전 수행 중에 훈육관을 잃어야했던 김원석도 성적이 안 좋은 한길로를 면박줘서 돌려보내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 심각한 장면과 웃기는 장면이 왔다갔다 하는데 이거 정말 장난아닙니다.

사사건건 신경전을 벌이는 공도하와 한길로.

국정원 훈련도 훈련이지만 한길로와 김서원의 사랑싸움도 정말 볼만합니다. 두 사람은 국정원 훈육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싸울 때는 커피와 짜장면을 던질 정도로 살벌하다가도 질투할 때는 귀엽고 놀릴 때는 깜찍하다가 티격태격하며 벌점 받을 때는 아찔하고 이거 보는 사람이 더 간이 떨립니다. 장면장면 강약을 잘 살리고 있고 캐릭터가 잘 설정되서 내뱉는 대사 마다 촌철살인이네요. 스파이는 '폼생폼사', 시험공부는 안하고 총이나 쏘며 잘난척하던 한길로가 '조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공도하(황찬성)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참 재미있었죠.

재벌의 부정한 돈벌이 방식을 꼬집는 한길로(주원) 아버지 한주만(독고영재)의 대사나 취업이 힘들어 절절 매는 김서원의 에피소드는 날카로운 현실 묘사가 돋보였습니다. 13만 오천원짜리 맞선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취업용 검은 정장에 촌스러운 브로치를 달고 맞선 장소에 나간 김서원과 마음만 먹으면 재벌 기업을 운영할 수 있고 자동차 하나 쯤은 얼마든지 내기로 날려버릴 수 있는 한길로. 하는 농사 마다 망한다며 소주병을 물병인듯 끼고 사는 김판석과 특허권을 사서 이익을 노리는 한주만의 대조가 어쩐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캐릭터 정말 꼼꼼하게 잘 만들어졌다.

결정적으로 이 드라마는 최우혁(엄태웅)이란 산업스파이를 서원, 길로 커플의 최종 보스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김원석과 성준(정인기), 국장 오광재(최종환) 등은 이 최우혁을 검거하려 작전을 짜고 있습니다. 신입 국정원 직원으로 훈련받은 서원과 아버지 한주만 때문에 국정원에서 쫓겨나는 한길로가 최우혁과 마주치는 건 뻔한 시나리오일텐데 어쩐지 이 최우혁이란 캐릭터 만만치 않습니다. 일종의 아나키스트인데다 김원석, 성준과 끊을 수 없는 악연도 있는 인물인데 자신은 모종의 신념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드라마의 최후를 장식할 최고의 클라이맥스이면서 자칫 늘어지기 쉬운 드라마의 분위기를 탄탄하게 조여줄 배우가 엄태웅이라니 자못 기대가 큽니다. 이외에도 이 드라마에는 시선을 뗄 수 없는 조연급 연기자들이 다수 출연하고 있거든요. 신선미(김민서)나 미래(김수현)같은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최우혁을 검거하는 프로젝트 총책임자, 정인기가 맡은 성준과 오광재 국장역의 최종환 캐릭터도 뭔가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 정도 캐릭터라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충분히 시청자들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대해도 될 드라마다.

리메이크 드라마고 원작 영화 '7급 공무원(2009)'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작가가 누군가 했더니 '추노(2010)'의 천성일 작가더군요. 조선 시대 노비들의 삶을 여과없이 묘사하면서도 그들 나름의 해학과 시대 풍자를 잘 살렸던 그 필력이 어디가지 않았나 봅니다.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달달한 재미를 살리면서 007를 꿈꾸는 철딱서니 부잣집 아들 한길로와 악착같은 첩보원 김서원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나머지 배우들도 캐릭터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대로만 계속 간다면 빈틈없이 인기몰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딱히 기대하던 수목드라마가 없언 차에 의외로 괜찮은 드라마를 건진 것 같네요. 사교춤을 배우는 장면도 그렇고 위장술을 가르치는 것도 그렇고 처음에는 '트루 라이즈(1994)'같은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스파이 드라마를 연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사랑싸움이 꽤 재미있겠습니다. 가벼운 듯 하면서도 진지하게 무거운 듯 하면서도 경쾌하게 풀어가는게 이 드라마의 최대 장점인 것 같습니다. 작가와 연기자, 캐릭터가 이렇게 잘 만나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 눈여겨볼 드라마로 점찍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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