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구가의 서

구가의 서, 판타지와 현실을 이어주는 실존인물 이순신

Shain 2013. 4. 2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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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아는 구미호는 인간의 간을 빼먹는 요물입니다. 구미호는 한밤중에 소나 말을 죽여 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도 하고 사람들을 홀려 인간세상을 희롱하기도 하는 간사한 존재로 묘사되곤 합니다. 간혹 어떤 구미호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사랑했던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무섭게 원수를 갚거나 피토하는 원망을 담은채 슬피 울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이런 구미호의 이미지는 주로 조선 시대에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구가의 서'에 등장한 구미호는 인간 여성에게 배신당하는 남자 구미호라는 점에서는 기존 구미호와 같으나 색다르게 달빛정원에 살며 산을 지키는 신수로 묘사됩니다. 중국에 전하는 기이한 이야기 중에는 신이 된 구미호 호조사도 전하고 고조선의 이야기를 담은 '규원사화'란 책에는 부류왕 때 나타난 구미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구미호의 기원을 삼족오에서 찾는 사람도 있고 '9'라는 숫자를 신성하게 여긴 조상들의 신수가 구미호란 말도 있으니 우리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른 내용이죠.

박무솔이 죽자 분노하여 변해버린 최강치. 조관웅은 20년전에 본 구월령을 떠올린듯하다.

 

여우라는 동물은 보통 재물을 상징합니다. 함께 살면 길하기도 하지만 해코지를 할 경우에는 해롭기 그지없는 짐승이라 합니다. 한국에선 멸종되었다는 여우, 여우들은 보통 잡은 고기를 땅에 묻었다가 묵혀 먹는 습성이 있는데 묻어둔 고기에서 나오는 인 성분이 도깨불로 보여 여우의 장난질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무서워했다고 하죠. '구가의서'에 등장하는 박무솔(엄효섭)의 아내 윤씨(김희정)가 강치(이승기)를 두려워하며 내치려고 하는 건 그런 원초적인 공포 탓입니다.

또 극중 등장하는 이순신(유동근)과 친밀했다는 서애 류성룡에게도 여우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서애는 관직에 올라 이름을 떨쳤으나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입니다. 류성룡 형제의 아버지가 젊고 예쁜 후처를 맞아들이고 동생을 낳았는데 동생이 나이가 들어 장가를 들이려 하자 류운룡은 서애가 추천해준 좋은 혼처를 모두 안된다고 하며 한 초라한 노인의 딸을 동생의 아내로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애는 화가 나서 돌아갔으나 막내의 혼인에 오라고 부르는 류운룡의 부름에 마지 못해 참가했다가 놀라운 일을 보고 맙니다.

여우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전설.

 

유운룡이 동생과 결혼시키려던 처녀가 구미호를 잡았는데 그 구미호가 류성룡 아버지 후처였습니다. 류운용은 아버지의 후처가 구미호라 밝힐 수도 없고 피를 나눈 동생을 직접 죽일 수도 없어 마땅한 사람을 구해 처리했다고 대답합니다. 류성룡의 형이라는 류운용은 이외에도 임진왜란 전에 첩자로 들어와 류성룡을 암살하려 한 중을 죽이기도 하는 등 기이한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순신 보다 '구가의 서'에는 훨씬 적절한 인물이기도 하구요.

'구가의 서'는 이런 구미호 전설처럼 끝도 없이 보는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인간을 사랑해 인간이 되고자 했으나 불운하게 죽어버린 신수 구월령(최진혁)과 아버지의 피를 받아 반인반수의 몸으로 태어난 강치. 그리고 강치가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청조(이유비)와 여울(수지). 옛날 이야기를 흥미롭게 시청하던 사람들은 배신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강치가 인간이 되고 싶으면 어떤 고통을 겪어야하는지 계속 궁금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이어주는 이순신. 다른 등장인물들과 복장부터 많이 다르다.

 

반면 이런 '판타지'를 탁 하고 깨트리는 동시에 아 이 드라마가 조선 시대 드라마였지 하고 깨닫게 하는 인물이 바로 이순신입니다. 현재까지 유일한 실존인물이며 어제 방송분에서는 화려한 색상의 한복을 입은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흰 도포를 입고 등장합니다. 첫등장할 때는 짙은 남색의 도포를 걸쳤으나 그 역시 반짝이는 질감이 아닌 무명옷같은 느낌이었죠. 마치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라도 난 현실에 살았던 사람이라 구분하듯 말입니다(물론 검소해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이순신이 언제 어떻게 거북선을 고안하고 설계하기 시작했는지는 자세히 적힌 문헌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전부터 훈련을 하는 등 준비작업을 했다고는 했지만 그 내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요. 그런 그가 가상의 인물인 백년객관 객주 박무솔에게 군자금을 요청하고 담평준(조성하)이 그 옆에서 은밀히 거들고 있습니다. 동시 조비 조관웅(이성재)가 일본의 흑치를 비롯한 자객집단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죽이고 사익을 추구하는 걸 막는 것도 그들의 역할입니다.

실존인물 이순신의 등장은 현실과 판타지를 잇는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전설을 응용한 판타지는 아무리 전설의 기본 줄거리에 충실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멜로 만 가지고는 맥이 흐트러지기 쉽습니다. 어떤 위험에도 포기하지 않는 구미호의 사랑을 강조하다간 자칫 신파극이 될 수 있고 액션에 몰두하다가는 다른 이야기가 되버릴 수도 있죠. 실존인물 이순신은 마치 구미호에게 홀렸던 류성룡의 아버지나 구미호를 물리쳤다는 류운룡의 이야기처럼 '구가의 서'라는 전설의 일부가 되버립니다. 이순신으로 인해 현실과 판타지를 잇는 다리가 생긴 셈

이죠.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왜곡' 논란을 겪는 드라마들도 많지만 실존인물을 이런식으로 결합한 판타지는 꽤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드라마 초반부에 마치 내가 한때 겪었던 일을 회상한다는 듯 나레이션하는 이순신 덕분에 전설같은 이야기의 분위기도 확실하게 살아났구요. 덧붙여 류성룡의 형 류운룡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임진왜란 전후로 일어났다는 각종 비현실적인 전설들이 이 드라마와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전설이란 원래 그런 맛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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