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천명

천명, 세자 이호의 온실과 조선 왕실을 움직인 의원들

Shain 2013. 5. 16. 13:50
728x90
반응형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의원들 대부분은 어의입니다. 허준, 장금, 백광현 모두 왕실 의원들로 각각 광해준, 중종, 숙종을 전담하던 어의들이었죠. 조선 시대 의학 자체가 왕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방에 잘 알려진 의원들이 있다고 해도 기록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왕들이 특별히 신뢰한 의원들은 큰상을 받고 신분이 상승되어 기록이 많이 남았습니다. 중종은 그 많은 의원들 중에서 하필 여의원인 장금을 가까이 두었고 숙종은 그 시대에는 다소 위험했던 외과술의 천재 백광현을 아꼈습니다.

드라마 '허준(1999)'에서 묘사하는대로 천한 출신이 의원이 된다는 것은 신분상승의 의미가 있습니다. 허준은 서출이었으나 어의가 되어 당상관이 되었고 백광현은 무관 집안인 중인 신분에서 숭록대부까지 올랐습니다. 드라마 주인공으로 활약하진 않았으나 침의로 널리 소문난 허임도 천출이었습니다. 의학적인 공로도 공로지만 신분제 사회엔 조선에서 한 개인으로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어찌 보면 건강을 보존하고 싶었던 왕들의 욕구가 그들의 성공과 직결되어 있던 셈입니다.

세자 이호가 시간을 자주 보내는 그 온실은 전순의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온실이다.

'천명'에는 실제 역사 속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흥미로운 장치들이 제법 많이 등장합니다. 표독스런 문정왕후(박지영)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종(최일화), 순진하기만 한 경원대군(서동현)과 멍청한 윤원형(김정균)까지. 어쩌면 그렇게 기록 속의 이미지를 정확히 살렸는지 볼 때 마다 재미있습니다. 특히 재미있게 본 것은 세자 이호(임슬옹)가 시간을 보내곤 하는 온실인데 그 비슷한 온실이 아마 '뿌리깊은 나무(2011)'에도 등장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온실이 바로 세계 최초의 채소 재배 온실입니다.

조선 세종 시기 왕실에는 전순의라는 의원이 있었습니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때에 이르기까지 명의로 소문난 이 의원은 천한 출신으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의원인 동시에 의학과 식이요법을 접목한 학자였습니다. '음식은 곧 약이다'라는 주장을 펼친 전순의는 궁중 내에 온실을 지어 채소를 길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요리책인 '산가요록'에는 각종 농사법과 요리법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대장금(2003)'에서 묘사된 약이 되는 음식의 기본 철학은 어찌보면 전순의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죠.

여의녀 장금을 신뢰하는 중종과 각종 의혹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장금의 처세.

세계 최초의 온실을 만들고 약선음식 이론까지 연구한 전순의를 세조가 몹시 총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순의는 세조와 가까이 지낸 덕분에 후세 사람들 중에는 혹시 전순의가 병약한 문종을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기도 합니다. 실록에는 전순의가 문종에게 냉수를 마시게 하고 기름진 꿩고기를 5월에(꿩은 겨울에만 먹는게 일반적)먹인 것으로 적혀 있는데 음식과 약의 상관관계를 잘 아는 전순의가 어째서 종기에는 최악인 꿩고기를 먹게 했는지 이상하다는 것이죠.

왕이 절대권력을 쥐고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는 자리같지만 왕권을 위협하는 것은 생각 보다 많습니다. 작게는 백성들에 민란에서부터 크게는 옆나라의 침략까지 왕은 늘 권력의 위협에 시달립니다. 특히 자신을 주군이라 부르며 체면을 세워주면서도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신하들은 가까이 있는 최악의 적이자 동료입니다. 같이 권력을 누릴 때는 누구 보다 왕을 위해주지만 한번 엇나가면 어떻게 왕을 괴롭힐지 모르는 일입니다. 특히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들은 그 불안감이 훨씬 컸을테지요.

자칫 권력 싸움에 휘말리면 목숨이 위험한 의원. 최원은 그런 상황을 잘 알기에 돌팔이 행세를 했다.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전순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온실을 짓고 요리법을 연구한 것으로 보아 흔히 보는 천재형 인물인 것은 확실한 것같은데 그 천재성에 명예와 부귀영화가 뒤따랐다니 세상사는 요령도 탁월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순의가 정말 독살에 연루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난 세조가 일등공신으로 발탁한 것으로 보아 세력자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겠죠. 의원이란 이렇게 권력자에게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되기도 하는 존재였습니다.

'천명'에서 묘사되는 장금(김미경)은 열혈이라거나 정의로운 성격이라기 보다 궁궐 안의 분위기를 섣불리 아는체하지 않는 신중함을 지닌 성격입니다. 최원(이동욱)의 할아버지 최창손(장용복)의 제자이자 다인(송지효)의 스승인 그녀는 최원이 올바른 의원이라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편들거나 나서지 않습니다. 자신의 임무가 중종을 돌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원이 시비를 가리기 시작하면 제 한몸을 돌보기는 커녕 다른 사람까지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민도생(최필립)만 해도 김치용(전국환)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권력싸움에 휘말린 의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한 캐릭터 최원.

문정왕후 측에서 병약한 세자를 감싸는 최창손의 손목을 잘랐고 그 억울함이 최원에게 돌팔이 행세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병에 걸린 딸 랑이(김유빈)를 살리기 위해 내의원에 일하기는 하되 어릴적부터 친구처럼 지낸 세자 이호의 일에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습니다. 계모에게 독살 위협을 당할 만큼 세자가 어렵고 딱한 처지라는 걸 알면서도 세자와의 우정을 신경썼다간 큰일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도망자 신세까지 된 최원은 조선왕실의 의원이 어떤 처지였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캐릭터인듯합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장금처럼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어의와 도제조, 부제조를 임명하는 것이 안정된 권력 기반을 쌓기 위한 필수 조치입니다. 그래서 많은 조선의 왕들이 어의들에게 파격적인 상과 직책을 내리며 그들을 격려했던 것입니다. 한발 나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형익이란 의원을 끌어들여 신뢰하고 소현세자 독살에 이용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습니다. 일개 의원으로서는 그 '정치'란 것에 휘둘리면 괜시리 목숨만 위험해지는 도박과 다름없었겠죠. 이런 특징을 잘 살린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매력같네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