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천명

천명, 세자 이호는 문정왕후에게 당하기만 했을까

Shain 2013. 5. 17. 08:35
728x90
반응형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기록되었느냐에 따라 혹은 누굴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집니다. 문정왕후와 정난정이 주인공인 드라마 '여인천하(2001)'는 가난한 양반 문정왕후(전인화)와 천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정난정(강수연)의 흥망성쇠를 다룬 드라마로 중종을 왕위에 올리고 왕을 농단했던 공신들과 왕자들의 인척이란 이유로 기세등등했던 권신들 사이에서 두 여인이 어떻게 권력을 움켜쥐었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가의 여인이 다퉈야할 대상이 후궁 뿐만이 아니라 조정신료들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던 드라마입니다.

'천명'에서 묘사되는 문정왕후(박지영)는 교묘하게 중종(최일화)과 세자 이호(임슬옹)를 이간질시키고 김치용(전국환)과 윤원형(김정균)를 시켜 세자를 죽이려하는 독한 계모입니다. 상대적으로 착한 세자는 문정왕후가 자신을 독살하려는 걸 알면서도 어릴 때부터 보고자란 어머니란 사실에 망설이고 아우 경원대군(서동현)의 눈물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약한 인물입니다. 세자가 경원대군을 따라 중전에게 가는 덕에 최원(이동욱)과 덕팔(조달환)은 위기에 처하고 맙니다.

자신을 기른 어머니란 이유로 세자가 당하고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땠을까.

'천명'의 세자는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입니다. 자신을 보필하는 내관은 김치용의 사주를 받아 덕팔을 죽이려하고 자신을 담당 의관 민도생(최필립)은 협박에 못 이겨 이호에게 짐독을 먹였습니다. 물론 민도생이 치명적인 짐독을 해독하기 위한 코뿔소뿔을 함께 먹여 세자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세자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광조를 따르던 심곡지사와 천봉(이재용) 무리들 뿐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자신의 지지세력을 구축하지 못하면 곧 죽어도 이상할게 없는 처지인거지요.

그러면 실제로도 세자 이호가 이렇게 혼자서 고군분투했을까요. 극중에서는 윤원형과 김치용이 있어 문정왕후 쪽이 훨씬 유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세자 이호의 사돈인 김안로가 죽기 전까지는 문정왕후가 다소 밀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세자의 뜻과 상관없이 자순대비를 비롯한 왕실이 세자의 편이었습니다. 또 이호 보다 다섯살 많은 누나였던 효혜공주는 김안로의 며느리였기 때문에 김안로는 당연히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파였고 김안로는 세자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각종 사화를 일으키는 등 시끄럽기 그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1534년 경원대군이 태어나자 이호의 뜻과 상관없이 파평윤씨들은 분열되기 시작한다.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는 장경왕후를 친정인 파평윤씨 중에서 골랐습니다. 그 장경왕후가 너무 빨리 죽자 어린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윤임을 두둔했습니다. 자순대비는 다음 왕후도 파평윤씨 중에서 골라 세자를 보호하고 후계를 안정화시킬 생각이었죠. 덕분에 같은 파평윤씨이면서 세력이 약한 문정왕후가 중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정왕후에게 경원대군이 태어나고(1534년) 문정왕후를 중심으로 궁 안팍의 세력들이 모여들면서 '소윤'파가 형성되었습니다.

문정왕후의 아버지 윤지임과 윤임은 8촌 사이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야 8촌 정도면 거의 남이나 다름없지만 종친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그 시대에 윤씨들은 두 왕자를 놓고 대윤과 소윤으로 나누어 권력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정왕후에게는 윤원로, 윤원형을 비롯한 무려 다섯명의 형제가 있었기 때문에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비시키려다 실패하고 사사된 이후에는 대윤파와 거의 대등하게 경쟁하게 됩니다. 세자 이호가 모후를 보호하려 해도 적자를 낳은 중전을 경계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극중에서는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파만 등장하지만 인종 즉위전에는 윤임도 있었다.

그럼 극중 상황은 언제쯤일까요. 인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1544년입니다. 김안로가 죽은 것은 1537년입니다. 자순대비가 사망한 것은 1530년이니 김안로 때문에 위축되긴 해도 윤임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고 소윤 윤원형의 세력이 거세어졌을 때입니다. 후궁들과 궁인들을 자기편으로 만든 문정왕후가 궁안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으며 중종은 병환으로 힘을 잃어갈 때입니다. 결정적으로 극중에 동궁화재사건이 묘사되었으니 1543년 즉 세자 이호와 문정왕후의 세력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란 뜻입니다.

어제 방송장면에서 이호는 문정왕후에게 강한 의지를 보입니다. 덕팔의 증언이 있으면 문정왕후가 세자를 죽이려했음이 밝혀질테고 소윤파를 실각시키고 개혁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오랜 친구인 최원의 누명을 벗겨주고 자신의 옆에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둘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은 단순히 계모와 의붓아들의 갈등이 아닌 넓게는 향후 권력의 향방을 두고 싸우는 권력 쟁탈싸움고 좁게는 파평 윤씨 집안의 피비린내나는 이권 다툼입니다. 세자 이호가 암살 미수를 계기로 싸움의 당위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경원대군이 세자를 끌고 나가는 바람에 목숨이 위험해진 최원과 덕팔. 세자는 약하다.

윤임은 명종 즉위 이후 을사사화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안로의 사돈이자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로는 소윤파의 권력을 놓고 윤원형과 다투다 죽었습니다. 이런식으로 피가 피를 부르는 권력다툼이 끝나고 문정왕후는 명종을 수렴청정하며 절대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자 이호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 기반이 있음에도 문정왕후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동생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지는 성격이라면 이 독한 싸움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대로 역사엔 가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윤임이나 김안로가 문정왕후와 경원대군을 위협하지 않았더라면 문정왕후와 인종은 자순대비와 연산군의 관계처럼 다소 불안하더라도 모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비록 14세 정도 밖에 나이차이가 나지 않으나 1515년에 인종이 태어나고 1517년에 문정왕후가 책봉되었으니 인종에게는 누가 뭐래도 단 하나 밖에 없는 어머니가 문정왕후였습니다. 허나 문정왕후 역시자 최원처럼 지켜야할 자식이 있는 부모였기에 아들을 살리기전엔 죽을 수 없는 엄마였기에 인종이 죽어야했나 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