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풍선/말풍선수다

올해도 반복되는, 명절과 사람들, 이야기

Shain 2008. 2. 1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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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기자 자격은 없는 모양이다. 낯선 사람들의 풍경을 향해 카메라들 들이댈 수 없다. 한밤중까지 붐볐던 영화관이나 마트, 그 만큼이나 가득찬 쇼핑카트를 카메라에 담을 만도 하건만 그냥 고개를 돌리곤 한다. 여기다 다른 인간적인 이유까지 보태어지면 아무리 '이슈거리'라고 한들 입에 담거나 사진에 담는 일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기껏해야 영화티켓 한장 정도 만 남겠다.

때늦은 쇼핑이라기 보단 극장에 가기전 시간이 남아돌아서 들렸던 마트. 꼭 필요한 물건은 없어도 할인 판매하는 도서나 평소에 보기 힘든 문구류 앞에서 기웃거리는 일이 잦다. 내 문구 욕심은 워낙 대단해서 펜, 노트, 형광펜, 색연필, 크레파스 등 자그마한 것을 하나둘 사들이기 일수이고, 어머니는 자꾸 상표 만 다른 검정 중성펜이나 비슷비슷한 노트를 사들여서 방에 쌓아둔다면 오래된 책부터 다 버려버린다고 협박을 하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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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전날 습득한 아이템들. 마트에서 산 노트와 펜, 그리고 영화티켓들. 한국영화들을 포기하고 보고싶었던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보고 왔다.


오늘도 주로 아동용이라 기껏 20색 내지는 40색 정도로 편성된 색연필, 싸인펜, 크레파스, 파스텔, 수채화 물감들 앞에서 넋을 잃고 있다. 미술용품 전문점도 아니니 그리 고품질의 탐날 만한 아이템이 있을 것도 아니고 그림그리는 일에 손을 놓은 지금 필요가 닿는 물건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갖고 싶을까. 굳은 손을 탓하며 사모은 제도용 펜촉 만 해도 몇 셋트.

그 앞에서 포장과 색감, 또는 종류가 다른 색연필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잔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차라리 가격도 얼마 안되니 그 다이어리(또!), 노트, 색연필, 종이들 전부 사버리지 그러냐고. 물론 꼭 필요치 않은 물건을 사들이는 것은 스스로도 맘에 들지 않으니 내려놓고 얌전히 돌아선다. 다음 언젠가 그 나무 색연필을 들고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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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사서 어제 먹은 작은 에이스에는 양동근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씌여 있었다. 예전에 '라춘쇠'라는 생산자 명이 인기검색어였던게 기억나는데. 양동근씨가 만든 에이스 먹었어요!


어딜 가든 명절 전날은 손님들이 참 많았다. 명절 연휴 내내 12시까지는 시내의 가게와 마트가 꽤 붐볐을 것 같다. 이곳은 지방이라 굳이 시골로 내려갈 필요가 없는 분들, 대가족 단위의 지역민들도 많고, 가까운 시골로 새벽에 출발하실 분들도 많다. 마트가 터미널 부근인지라 더욱 사람이 몰리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명절날 마트에 놀러온 사람들이 마냥 행복해 보이는 건 아니다.

쇼핑하는 사람들 사이, 가장 억울한 사람들은 명절 전후로 끊임없이 일해야할 직원들이겠지만 그들이야 그나마 나름대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늦게 여유를 가진 외국인 노동자들은 생필품을 사며 마트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들의 부지런함 덕에 쇼핑이 가능한 것을 아는 까닭에 나름대로 고맙기도 하다. 한편으론 곱게 한복이나마 차려입고 웃고 있지만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클텐데 싶어서 미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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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가는 마음은 가득가득 선물을 채우고 싶다고 하던데 확실히 선물 보다는 명절을 맞아 마트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경제적 이유가 한몫 할지도.


늦게사 방문할 집의 모자란 선물들을 챙기러 마트에 들린 사람들도 있고 가족 단위로 3대가 모두 모여 매장을 방문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 저것 작은 선물들을 현장에서 고르기도 하고 손주들의 비위를 맞춰 주고 싶은 조부모들은 아이들의 떼쓰는 모습을 달래느냐 애먹기도 한다. 아이에게 하나라도 뭔가 더 사주려 분주한 어르신도 있고 간만에 모인 사촌들끼리 달리 갈 곳이 없어서 지하 식품 매장에서 떡볶이를 먹기도 한단다.

그나마 그 행복한 풍경들 사이로 긴 여운을 주는 풍경도 있다. 몹시 외모가 닮은, 깨끗한 차림새의 두 남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한 남자는 품질이 좋아보이는 베이지색 무스탕 코트를 입고 있고, 또다른 한남자는 점잖아 보이는 모직 코트를 입고 있다. 대충 디자인과 품질을 보니 둘다 한 가격하는 물건들. 상당히 신경쓴 외모다. 그리고, 평균키를 넘는 신장에 뒷모습 만 보아도 닮아 보이는 곱슬머리. 두 사람은 아무래도 형제인 모양이다.

그 옆을 수평으로 걷고 있는 한참 키가 작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또 다른 남자. 아무래도 두 사람의 아버지이다. 두 아들을 따라 걷고 있지만 뭔가 뻘쭘해 보이고 일하다 나온 듯 입고 있는 윗옷은 때가 많이 탔다. 인상적인 건 영 익숙하지 않은 이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을 찾지 못해 아들을 뒤쫓고 있는 모습이다. 상대적으로 소심해지고 왜소해지는 부모들. 그리고 이제 전성기를 맞은 아들들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가족이란 이런 풍경을 연출할 때도 있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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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가까이 사는 대가족. 그나마 전원일기 시절에 비하면 인원이 한참 줄었다. 딸도 옆집에 사는 걸 보면 시대가 변하긴 변했지. 출처 : KBS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예전 설날 풍경과 뭐가 달라졌을까 한참을 생각해 보니 효도 선물과 가족선물 보다는 한복 패션과 의류 신상품이 강조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였고 가족 보다는 지인들을 위한 선물도 많아지는 것 같다(쓰잘데기 없는 보신 선물 보단 현금으로 용돈을 드리겠다는 문화도 한 몫 하려나). 그리고 길어진 연휴를 타겟으로 형성된 여행상품도 넘치고 있었다. 명절을 맞아 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어르신이 더 많겠지만, 이미 바뀐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떤 의미로 살가운 풍경의 대가족이 붕괴된 요즘,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 꼭 행복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가시돋힌 가족 간의 언행은 드라마 속 과장된 풍경 만은 아니다(못 믿겠으면 명절 증후군에 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시도록. 며느리들은 의외로 조용하다. 성적과 진학한 대학을 물어보는 친척 떄문에 미치겠다는 젊은이들이 제법 많다). 사회적으로 당연히 지켜야할 예의가 가족 간엔 통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유난히 더 천방지축이 된 아이들이 생활 공간을 뒤집어놓거나 집안을 어지르는데서 끝나지 않고(그 정도는 애교), 비싼 물건들을 집어가거나 부수고 가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집도 보인다. 봐줄 수 있다 쳐도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다는 말. 가끔 여성들이 변했기 때문에 대가족이 붕괴했고 명절이 즐겁지 않다고 주장하는 엉뚱한 인종도 보지만 적응할 새도 없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풍조를 급작스럽게 가져온 것은 시간의 변화, 그 이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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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제사상에 외국에서 자란 과일을 올리지 않는다. 직접 재배한 과수를 올리던 풍습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러나 고인에게 좋은 음식을 맛보게 한다는 의미에선 바나나도 틀린 게 아니다. (제사상 쇼핑몰에서 가져온 이미지)


들리는 소문에 알고 지내던, B어르신네 집안은 이번 명절 때 결단(?)을 낸다고 했다. 며느리 볶기를 밥먹듯 하던 어느 집안의 A라는 분. 정확한 나이를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80세가 훌쩍 넘어 90이 내년인 이 어르신은 육십이 넘어 70이 다되 가는 며느리를 미치게 만들 정도로 평생 달달 볶았다고 한다. 50년 동안 시달리다 이젠 종교를 가지시고 제사고 시어머니고 난 모른다며 자유를 선언하신 이 며느리. 이젠 손주도 스무살이 다된 어엿한 할머니시니 누가 이 며느리의 결정을 말릴까.

그 A라는 분의 동서, 그러니까 A라는 분의 시동생의 아내가 내가 아는 B라는 분인데, A 할머니의 직계들은 아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제사를 물려줄 사람도 없고, A어르신은 B어르신의 맏며느리와 둘째 며느리를 볶기로 작정하신게다. 오로지 집안 제사를 물려주기 위해 시작된 이 다툼의 초반에 B어르신은 그냥 듣는 척만 하거라 훈수를 두셨다고 한다. 본인도 A어르신의 성화가 싫어 며느리에게 그런 건 물려주지 않는다 작정한 분인데 당신 며느리를 볶는다니 화가 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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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두번 제를 올리러 아버지가 방문하시는 서원. 종친회 기제사 이외에 이런 류의 제례는 종종 볼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쓰러지지 않는 건물처럼 천천히 변해간다는 것, 재밌는 일이다.


어떻게 결판이 날 지 잘 모르겠지만 웃을 일 만은 아니라 느껴지는 건 우리집 역시 제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좋은 것과 제사 지내는 일에 동의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난 먹지도 않을 이상한 음식을 마련하는 자체에 동의 못하는 성격이라 음식을 바꾸거나 줄여야 한다 주장하고, 아버지는 자식은 굶겨도 제사 음식은 박하게 못한다 주장하시는 성격이다.

명절 마다 제사 이야기가 나오면 이어받을 아들은 없고, 딸자식 뿐이라 면목없다 하시지만 아들인 사촌 오빠가 제사를 물려 받는다 한들 무리한 일이고 부담스러운 행사란 사실이 달라질 리 없다. 사촌, 팔촌, 윗대 어르신이 새벽에 모두 모이는 행사를 지역을 건너 이어갈 방법이 없으니, 생업도 포기하고 제사 만 지내지 않는 이상 자손의 성의가 없어서라고 우길 시대는 아니지 않을까. 실제 그 문제로 여러번 하소연하지만, 사촌 오빠는 별달리 도움을 받지 못 했다.

오늘, 어머니께서 다니던 절에서 방생을 하자고 사람을 불러모았다고 한다. 미꾸라지같은 작은 물고기를 풀어주고(이 동네는 한번도 자연을 해치는 베스같은 거나 스스로 살 수 없는 치어를 풀어준 적 없단다) 모인 분들에게 절밥을 대접했단다. 시골의 자그마한, 이 절을 다니는 분들 중엔 사연많은 분들이 있어서 자손없는 친정어머니의 위패를 모신 할머니도 있고, 먼저 간 자식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할머니들도 계신다. 어머니도 손녀를 데리고 참석하셨는데, 명절에 찾아줄 사람없는 노인 어른들의 절 방문이 조금은 기운이 없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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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이 이루어진 저수지. 어릴 적 이 부근에서 자주 뛰놀던 기억이 난다. 사진 찍으러 한번 가봐야 할텐데 안개가 심해 오전엔 춥다. 여긴 정말 적막한 산골이다. 겨울에 빙어가 잡힌다 들었다.


세상에 '목숨 걸고 지켜야할 것'은 인간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나가는 방법은 선택의 문제고 가끔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기본적으론 단체로 강요할 문제 따위가 아니다. 단체로 이어지는 행동, 그 시선에 누군가는 원치 않는 피해를 입어야할 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명절이 모든 사람에게 행복한 쪽으로 흘러갔으면 하고 소망해본다.

제법 많이 흩날리던 눈, 그리고 교통대란, 오늘로 긴 연휴와 명절이 정리되는군요.
명절 연휴에 시달리고 난리를 쳐서 그런지 감기 기운이 있네요. 명절 휴유증 조심하세요.


이미지 출처 :
지리세계
http://www.jesashop.co.kr/shop.html?CategoryID=23
http://100.naver.com/100.nhn?docid=716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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