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우리들이 막장 드라마를 보는 안타까운 이유

Shain 2013. 11. 2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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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본적으로 '막장 드라마'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고 선정적인 성인용 오락거리도 존재하는 만큼 막장 드라마도 필요한 장르라는 걸 인정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TV 드라마 편성표가 '막장'으로 채워지는 건 반대하는 겁니다. '막장 드라마'는 음식으로 치면 인공조미료를 많이 쓴 자극적인 인스턴트 푸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첫맛은 특이하고 맛있다고 느껴지지만 먹을수록 몸에 좋지 않고 나중에는 물리는 음식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무엇에 처음에는 짜릿함을 느끼지만 나중에는 더욱 자극적인 걸 찾게 되고 웬만한 자극에는 쉽게 무뎌지곤 합니다.

데뷰 38년차 김영란의 눈물 연기. 막장 비난 속에서도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은 연기자.

전쟁을 잘 모르던 과거 사람들은 칼싸움을 흉내낸 사당패의 놀이만 봐도 재미있다며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웬만한 액션으로는 관객들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전투 장면이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장면 쯤 되야 소름이 돋았다고 평가하죠. 오죽하면 실제 전쟁터에서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가 아닌 '멋지다'라는 말을 내뱉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드라마에 익숙해지면 어지간한 삼각관계나 불륜으로는 눈 하나 깜짝 안하게 되는거죠.

시청자들은 왜 막장드라마를 보는걸까. 방송국은 시청률에 막대한 자본이 걸려 있으니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서라도 수익을 올리겠다고 변명합니다. 작가와 제작진들은 시청자들이 좋아하니까 만든다고 말합니다. 시청자들 중 다수는 방송국에서 막장 드라마만 방송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하기도 합니다만 소위 '막장 드라마'의 시청률을 올려주는 당사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시청자들이 막장 드라마를 보는 이유를 비난할 수 만은 없는 부분도 있죠. 어제 '오로라 공주' 관련 기사를 읽다가 그런 짠한 생각이 들더군요.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는 자극적이고 작위적인 설정의 결정판입니다. 작가 본인은 음식으로 중병도 고칠 수 있다며 각종 잡지식을 설파하기 바쁘지만 '오로라 공주'야 말로 인공조미료로 범벅이 된 드라마죠. 동성애자인 남성이 자신의 성정체성이 남성임을 깨닫고 이성애자가 되는 일이 실제로 종종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극중 나타샤(송원근)처럼 박사공(김정도)이 결혼하자마자 변신하는 사람이 흔할까요? 오로라(전소민)에게 실연당한 설설희(서하준)가 갑자기 말기암에 걸리는 일은 쉽게 일어나는 일일까요?

진지한 고민 보다는 드라마틱한 재미를 위해 등장한 동성애자의 변신.

 

한마디로 이 모든 설정들이 개연성과는 상관없는, 극중 등장인물들의 눈물 콧물 다 뽑아내기 위해 볼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쇼라는 걸 시청자도 알고 작가도 알고 연기자들도 압니다. 드라마는 시청자의 희노애락을 자극하기 위한 부자연스러운 설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막상 그 '이상한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는 시청자들 중에는 일부러라도 드라마를 보고 화내고 눈물 흘리지 않으면 스트레스 해소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극중 인물들의 감정에 빗대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거죠.

제가 느낀 바로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카타르시스입니다. 어떤 면에서 현대인들은 둥글게 살기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싫은 걸 싫다고 말하고 좋은 걸 좋다고 말했다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별난 사람이라며 눈총을 받기도 합니다. 희노애락이 분명할 정도로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는 건 세상살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서비스업 종사자는 진상 고객에게도 비위를 맞춰줘야하고 하청업체 직원은 갑 노릇을 하는 업체에게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최근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인터넷 악플도 심층적으로 파고 들면 현실에서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편견이나 분노를 인터넷에서라도 가감없이 털어놓고 싶은 심리가 섞여 있습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드러내고 울 수가 없을 때 화나는 일이 있어도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없을 때 드라마를 보면서 대신 눈물을 흘리고 욕을 하며 쌓인 감정을 해소한다는 것이죠. 과거 못된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 이야기가 유난히 많았던 것도 가족 관계에 스트레스를 받은 주부들의 바람이란 분석이 있습니다.


어제 '오로라 공주'에는 아들 설설희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설국(임혁)과 안나(김영란)가 슬프게 우는 장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분 다 노련한 연기자답게 갑작스럽게 알게 된 슬픔을 절절한 눈물로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직접 보지는 않아도 사진만 봐도 김영란 씨라면 어떻게 연기했을지 알 것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움직이는 슬픈 연기였다고 극찬했고 막장 드라마에 아까운 배우들이라고 지적했죠. 임혁씨도 김영란씨도 사극에서 활약한 적이 있는 명배우들이니까요.

이 말도 안되는 내용 덕분에 감정을 발산하고 희망을 얻는 시청자들. 누구 탓을 해야하나.

 

그런데 댓글을 읽다 보니 연기 만큼이나 울컥하는 내용이 달려 있더군요. 가족이 죽어도 울지 못했지만 드라마 속에서 슬프게 우는 연기자를 보면서 같이 운다는 내용의 댓글도 있었고 자신도 암에 걸렸는데 드라마 속 주인공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댓글 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작위적인 설정이라도 좋으니 드라마를 통해 감정을 발산하고 희망을 꿈꾼다는 내용이 슬프게 다가왔고 어쩌면 막장 드라마가 필요한 이유는 이런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드라마 덕분에 희노애락을 드러낼 수 있다는게 안타깝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런 자극적인 내용말고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드라마였으면 더 좋았을테고 우리 사회가 개인의 행복에 조금 더 관대했으면 좋겠지만 막장 드라마와 시청률을 최고로 여기는 방송국 만큼이나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다 좋은 것을 즐길 권리가 있는 시청자를 위해서도 막장 드라마는 점차 줄어야 합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통해 감정을 해소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당분간은 막장 드라마의 인기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부유해진 만큼이나 씁쓸한 현대사회의 단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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