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서 사극이나 막장 드라마를 자주 제작하는 이유는 고정적인 시청률 확보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극은 사극 자체를 좋아하는 고정 팬이 있어 오죽하면 '사극 불패 신화'라는 말이 있을 정도고 막장 드라마는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딱 좋은 포맷 입니다. '어쩌면 저렇게 막 나가냐'며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생각없이 보기엔 딱 좋으니까 궁금하니까 보게 된다는 거죠. 덕분에 큰 인기를 끌었던 통속극은 10년 뒤에도 유사한 드라마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막무가내 복수극의 대표작인 '아내의 유혹(2006)' 타입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이런 '우려먹기' 현상이 물론 우리 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미국 드라마는 인기있는 드라마를 5시즌, 10시즌까지 제작하다 보니 한 배우가 한 드라마에 10년 이상 출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간에 주인공이나 주요 출연진이 바뀌는 건 다반사고 심할 땐 주연배우가 죽어도 제작이 됩니다. 그것도 질렸다 싶으면 리메이크를 하고 스핀오프를 만드는 등 수십년 동안 우려먹기를 시도 합니다. 미국이나 우리 나라나 시청률 1%에 엄청난 돈이 걸려 있으니 얼핏 이 현상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MBC의 우려먹기는 미국과는 또 다른 양상입니다. 미드는 예를 들어 '90210' 타입을 한번 방송하면 유사한 드라마는 오더를 주지 않고 리메이크도 텀을 두고 제작합니다. MBC는 한번 히트하면 곧장 히트작과 비슷한 드라마를 양산해내니 한때 참신한 시도를 선보이고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를 제작했기 때문에(故 김종학, 이병훈 PD같은 분들의 공이 컸죠) '드라마 왕국'으로 명성을 날렸던 MBC가 이제는 자기 복제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허준' 리메이크로 모자라 이젠 국물 다빠진 사골인 '대장금'을 다시 만들고 싶어한다고 하지요.
요즘 MBC에서 방송중인 드라마 중 한번이라도 논란이 없었던 작품은 찾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막장 드라마의 대명사인 아침 드라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녁 드라마인 '오로라공주'는 매일매일 놀림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유머란에서는 '이번엔 등장인물을 어떻게 죽였냐부터 제일 멀쩡한 사람이 누구냐 이번엔 누구 귀신이 등장했나 다음엔 누가 미국에 가느냐' 같은 주제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작가가 시청자를 대상으로 욕을 할 땐 정신병원에 집어넣자는 말까지 올라오곤 하지요.
'오로라공주'가 여러모로 다시는 제작되지 않았으면 싶은 문제작이지만 그동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스타작가의 드라마라 출연진 퇴출부터 연장방송 요청까지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봅니다. 비중이 낮던 조카가 메인급으로 등장하는데도 시청자들만 손가락질하지 제작진이 저지했단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시청자가 방송국에게 그런 드라마를 제작할 권리를 준 것같지 않은데 방송사에서 대놓고 절절 매는 분위기죠. 뜨악하게도 30회 이상 연장방송까지 결정되었다고 하니 한동안 '욕먹는 MBC'는 벗어날 것같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왜곡 논란에 시달린 '기황후'와 '수백향'은 고질적인 '퓨전사극'의 결정판으로 이병훈 PD의 '대장금(2003)'도 아니고 '허준(1999)'도 아닌 구닥다리 영웅사극에 불과합니다. '대장금'같은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면서 MBC에서 수많은 유사한 드라마를 뽑아냈지만 '기황후'나 '수백향' 또 얼마전에 종영된 '불의 여신 정이'는 영웅사극의 단맛을 지나치게 의식한 기형적인 드라마죠. 차라리 판타지 픽션으로 제작되었으면 논란이 덜했을텐데 하필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탓에 논란을 늘 달고 다닙니다.
최근 제작되고 있는 소위 퓨전사극들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지만 MBC는 그 부분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합니다. 이런 '영웅형 퓨전사극'들은 드라마의 기본 구조, 즉 뼈대는 낡아빠지고 구닥다리인데 샅샅이 살펴보면 건물도 짜임새있게 잘 지은 편이 아닌데 연기 잘하는 출연자와 시대에도 안맞는 옷으로 화려하게 꾸민 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민중사극이라는 소박한 명분도 없고 고증이라는 섬세함도 없는데 '사극'이라 우기고 있으니 한심할 수 밖에요. 더 기가 막힌 건 그런 드라마가 계속해서 복제되고 무한증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황금무지개'는 '백년의 유산'과 '메이퀸', '금나와라 뚝딱' 같은 주말극으로 재미를 본 MBC가 다시 한번 비슷한 포맷으로 만든 드라마입니다. 박원숙씨가 못된 시어머니 역할로 나왔던 '백년의 유산'은 KBS 주말극의 아성을 무너트릴 만큼 강력한 인기드라마였죠. '메이퀸'과 비슷한 배경의 바다에 박원숙이 출생의 비밀이 얽힌 지독한 할머니로 출연하고 '메이퀸'에서 활약한 아역 김유정과 서영주, 안내상이 나오는데다 아동학대가 연상될 만큼 힘겨운 김백원(김유정)의 삶은 예전에 방송된 드라마를 다시 보는 듯한 데자뷰를 느끼게 합니다. 기본틀은 옛날 그대로인데 연기자만 도지원, 김상중으로 바뀐 느낌입니다.
요즘은 아역이 등장하는게 하나의 유행이 되버려 아역 시절이 있는 드라마에서 아연들의 눈물연기를 심심찮 볼 수 있습니다. 김유정은 데뷰 때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아역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연기를 워낙 잘하는 까닭인지 동생들을 먹여살리고 의붓어머니에게 뺨을 맞는 역할로 많은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메이퀸'을 찍을 때 나이가 워낙 어렸기 때문에 학교는 제대로 다니는지 저런 우울한 연기를 하고 심리치료는 받은건지 걱정이 될 정도였죠. '황금 무지개'가 '김유정'을 빼놓지 않은 건 톡톡히 시청률로 재미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작가까지 '메이퀸'가 똑같기 때문에 일부는 작가의 자기복제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말도 합니다만 히트작을 자기 복제하는게 요즘 MBC의 두드러진 경향이고 보면 이게 과연 작가의 뜻만 있었겠느냐 싶더군요. 최근 탤런트 박원숙씨의 경상도 사투리 논란도 '백년의 유산'에서 히트했던 연기자를 그대로 데려오다보니 무리수를 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예전 박원숙씨가 '토지(1987)'에서 보여준 임이네 역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경남 사투리를 잘 쓰던 모습을 기억하실 거에요.
요즘 MBC의 여러 프로그램이 종편이나 케이블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가를 자주 받습니다. 특히 드라마 부분에서는 히트작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매일 매일이 비난의 연속입니다. '메디컬탑팀'은 무난하긴 한데 진부한 느낌이 듭니다.
'황금무지개' 인기를 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연기자들의 고생과 희생 덕분일테지 '메이퀸'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듯한 식상한 전개방식 덕분은 아니겠죠. 어떻게 보면 연기자들이 기피할만한 방송국이 되버렸습니다. 올 한해 MBC 드라마에서 참신하다는 느낌을 준 작품은 '투윅스'나 '7급공무원' 정도였던 것같은데 두 드라마 모두 MBC의 주력작품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사골국도 너무 오래 우리면 뼈에 구멍이 송송난 찌꺼기가 되기 마련입니다. 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비싸기만 한 스타 작가와 기존에 성공한 포맷으로 우려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다 늘 비슷한 배역로 출연하는 연기자한테도 질려버릴 날이 올 것같네요. MBC 드라마를 꽤나 좋아하던 제가 MBC 드라마를 다운로드 받을 일이 거의 없어진 것도 이변이라면 이변입니다. 이것도 김재철 사장의 휴우증일까요? 요즘 하는 일을 보면 시청자들을 다른 방송국으로 보내고 싶어서 이런 행보를 이어가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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