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역사인식 한계를 드러낸 '기황후' 배우들, 글로벌 참 좋아하네

Shain 2013. 10. 25.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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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글로벌한 역사관을 강조하며 백범 김구 선생이 객관적인 관점에서 '테러범'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얼마전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 교과서에 실린 내용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활동을 시작했다'는 김구 선생에 대한 묘사가 많은 네티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펼친 김구 선생의 행적을 '테러'로 일축한 그들의 '글로벌한' 역사관이 정말 세계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을 담은 역사관일까 요? 물론 아닙니다. 세상 어느 나라도 나치 독일의 입장을 고려해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테러라 부르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제작발표회 배우 인터뷰로 또다시 역사왜곡 논란에 휘말린 드라마 '기황후'.

일본의 군사시설과 정부요인 제거를 주도했던 김구 선생이야말로 정작 암살로 살해당한 당사자였습니다. 암살을 지시한 사람을 절대로 발설할 수 없다는, 안두희의 총격으로 유명을 달리한 김구 선생이야말로 암살 테러에 희생당한 피해자임에도 김구 선생을 테러범으로 몰아가는 교과서의 행태. 일부 일본인들에겐 우리 나라의 영웅인 김구 선생이 잘못됐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침략자 일본의 입장까지 고려하는 '글로벌'한 자세는 말 그대로 불필요한 오지랍에 불과합니다.

 

요즘 드라마 '기황후'에 대한 기사를 유심히 읽고 있습니다. 정치권이나 네티즌들이 비판하는 교학서 교과서 만큼이나 뜨거운 감자인 것이 바로 '기황후' 역사왜곡 논란이죠. 제작발표회 자리에서 여러 언론이 역사왜곡 논란에 초점을 맞춰 출연배우와 작가의 인터뷰를 시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출연배우들과 작가는 이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는 눈치가 아닙니다. 하지원은 공녀에서 황후가 된 여주인공이 한국사 '최초의 글로벌 여성'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충혜왕이라는 개망나니에서 왕유라는 가공인물로 역활이 변경된 주진모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최근 실존인물 '충혜왕'에서 가상인물 '왕유'로 역할이 변경된 주진모. 그의 발언은?

대부분의 언론은 '기황후' 제작진 입장에 따라 기황후가 픽션과 역사를 가미한 '팩션'으로 자기매김할 것이란 기사를 쏟아내기 바쁩니다만 어제 오후 네티즌들을 뜨겁게 달군 기사가 한편 올라왔지요. 바로 주진모의 '역사적 사실로만 만들거면 다큐를 만들지 왜 드라마를 만들겠냐'는 제목의 기사 입니다. 어제 기황후 출연진들과 언론의 제작발표회 자리에서는 주진모가 MBC 신인상을 노린다는 우스개소리도 나왔고 예전에 출연했던 '쌍화점'과 '기황후'의 차이점을 묻는 기자의 말에 '여자를 사랑한다는 점이 다르다'는 내용의 기사도 올라왔습니다.

이외에도 원나라의 타환 역을 맡은 지창욱이 변발에 대한 생각을(이 드라마는 변발을 무시하고 제작됩니다) 털어놓기도 하고 타나실리 역을 맡은 백진희가 악역에 대한 각오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논란의 중심이 된 주진모의 발언은 어떻게 보면 지나가듯 한 발언같기도 하지만 위의 기사 한편 만으로도 네티즌들을 들끓게 하기는 충분했습니다. 주진모가 우리 나라 역사를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한다는 반응도 있었고 주진모가 잘 생긴 얼굴과는 달리 생각이 없다는 비난, 배우들도 역사공부를 해야한다는 날선 비판도 올라왔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면 주진모가 '역사적 사실로만 만들거면 다큐를 만들지..'라는 내용의 발언을 한 맥락이 이해는 갑니다. 배우들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역사 왜곡 논란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일테고 그 과정에서 주진모가 왜곡 논란에 대한 반발을 피력한 것인데 분명한 문제는 주진모가 역사속 실존인물들과 드라마 속 캐릭터를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이고 그만큼 사극의 영향력이나 본질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부분

입니다.

'역사적 사실로만 만들거면 다큐를 만들지 왜 드라마를 만들겠냐?' 문제있는 주진모의 발언.

'대장금(2003)'을 비롯한 많은 사극들이 기록이 없는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창작으로 메꾸곤 했습니다. 그런 드라마들이 왜곡 논란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민초들의 이야기는 그만큼 사료가 적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왕족도 아닌 천민 출신이나 여성이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는 내용은 역사를 살리면서도 풀뿌리같은 민중의 생명력을 묘사한다는 본뜻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사에 기록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과 다르게 바꾸고 창작하는 것은 아무런 명분도 의의도 없습니다.

기황후는 고려인으로 태어나 몽골의 황후가 되고 배원정책을 펴던 공민왕과 대립각을 세운 여성 입니다. '고려양'이라는 한류의 창시자였다는 과장된 평가도 웃기지만 정치적으로 고려와 적대적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기황후가 악녀라는 평가는 명나라의 입장이라며 그녀가 저평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입장이고 당시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입장에서는 침략자에 불과합니다. 기철 형제가 횡포를 부리고 공민왕을 내치기 위해 공격 명령까지 불사했던 그녀를 굳이 영웅으로 만들 이유가 있었을까요?

 

 

 

 

 

 

 

원래 귀족가문이었던 기황후의 집안은 불행하게 원나라로 끌려갔던 대다수 공녀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당시 원나라에 끌려갔던 공녀들 중 일부는 원나라 고관대작들의 부인이 되는 귀족 집안 출신들이었습니다. 인수대비의 고모 2명은 명나라 공녀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은 자신의 여동생이 영락제와 함께 순장당했는데도 또다른 여동생을 공녀로 바쳤습니다. 인수대비 한씨 집안의 권력은 공녀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욕심많았던 기철 형제를 생각해볼 때 기황후가 공녀로 끌려간 것이 과연 비극이기만 했을지 의심스러운 부분이죠.

글로벌한 신여성이냐 악녀냐. 이런 관점이 옳은 것일까? 쓸데없이 객관적인 건 아니고?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로서 자신이 묘사하는 캐릭터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진모의 발언처럼 역사적 사실과 다큐를 운운하는 인식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역사에 약간의 픽션을 가미하는 것이 사극이지 역사 자체를 바꾸는 것을 사극이라 하지 않습니다. 본래 주진모가 맡기로 한 충혜왕을 왕유라는 가상인물로 굳이 바꿔야했던 이유를 아직까지 납득하지 못한 것인지 고려에 적대적이었던 기황후와 망나니로 기록된 충혜왕이 그렇게까지 비판받은 까닭을 모르는 것인지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촬영분과 티저 예고편을 보니 기황후 역의 하지원이 드라마 초반부에는 '다모(2003)'에서처럼 여전사로 활약하는 모양이더군요. 왕유(주진모)와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으로 보아 드라마에서 묘사하고자 하는 기황후는 고려를 배신하는 악녀가 아닌 영웅인 듯합니다. 미드나 영드의 사극주인공들은 악행도 단점도 그대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은 사극 주인공하면 미화된 영웅으로 등장하는게 보통입니다. 50부 대작이라는 드라마 '기황후'의 기황후가 그냥 드라마 캐릭터로 남아있게 될까요? 백프로 아닐겁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멋진 여전사 기황후로 기억되겠지요.

우리 나라는 특히 사극 주인공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다. 실존인물 기황후에 대한 왜곡은 필연적.

개인적으로 장영철 작가의 '돈의 화신'을 정말 재미있게 봤고 재능있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는데 배우 주진모처럼 '다큐' 운운하는 마인드를 갖고 있다면 앞으로 사극은 절대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진 하지원과 주진모를 비롯한 배우들에게도 실망 했구요. 뭔가 조금은 다른 입장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였어요. 올초에 '화투'라는 제목으로 기황후를 만들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는 혹시나 미드나 영드처럼 색다른 사극이 나오지 않을까 잠깐 기대도 했지만 이 상태면 전혀 무리인 것같네요.

물론 사극의 주인공이 꼭 존경할만한 영웅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테러범'이었다는 기막힌 교과서에 구절처럼 우리 나라를 적대시하고 공격했던 사람이 사극의 주인공이 되어야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습니다. 기황후가 '글로벌한 신여성'이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없네요. 역사학자나 교과서 제작자들에게만 올바른 역사의식을 요구할게 아니라 역사속 인물을 만들어내는 작가나 연기자들 역시역사에 대한 똑바로된 의식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인터뷰였 습니다. 하지원, 주진모씨의 발언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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