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정도전

정도전, KBS의 제작 능력이 가장 잘 드러난 사극

Shain 2014. 6. 29. 08:29
728x90
반응형

KBS가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수신료 인상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동안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드라마가 바로 '정도전'입니다. 드라마 제작사로서 KBS는 다른 공중파나 케이블에서 쉽게 따라올 수 있는 몇가지 장점을 갖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극입니다. KBS는 국영방송으로 출발해 '수신료'라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상대적으로 타 방송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80년대 사극에 엄청난 공을 들여 드라마 사상 최초로 가체와 대례복을 구현한 MBC가 지금은 국적 불명의 퓨전사극만 제작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제작비 때문입니다. 더불어 수십년 동안 사극을 제작한 오랜 경험이 KBS 사극의 또다른 장점입니다.


정몽주의 무덤 앞에서 대업을 완성했노라 울부짖는 정도전.


모두가 KBS 직원이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고증을 통해 각종 소품, 세트, 의상, 분장 등을 담당하는 전문인력이 'KBS 아트비전' 이란 KBS 자회사로 분리되었고 담당자가 사극을 제작하기 전부터('정도전'은 5개월 전부터) 오랜 기간 자료를 수집합니다. '정도전'같은 경우 과거 인기리에 방송된 '용의 눈물(1996)' 때 모아둔 방대한 자료가 제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죠. '정도전'이 큰 인기를 끌며 최고의 사극으로 호평을 받은 건 이렇게 오랜 KBS의 경험 덕분입니다. 고증 자문위원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만이지만 자문된 내용을 제작하는 문제는 연륜이 중요합니다.


한때 MBC도 퇴사한 이병훈 PD를 중심으로 연대기 사극 '조선왕조오백년(1983)'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만 지금은 거의 외주 제작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외주제작으로 가다 보면 협찬과 자본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꼼꼼한 고증 보다 제작비 절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SBS는 거기다 90년대에 신생 민간 방송사로 출발해 사극 제작 노하우가 부족했고 아직까지도 고증은 별로 내세울 처지가 못 됩니다. 퓨전을 내세운 드라마틱한 재미 외에 '사극'으로서는 기대하기 힘든 드라마가 많죠. 우리 나라 지상파 방송 중 제대로된 사극을 만들 여건이 되는 방송국은 KBS 뿐이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KBS 만 제작할 수 있는 형식의 정통사극.


KBS 그 중에서도 KBS1은 정통사극을 제작하는 채널이라는 인식 아래 꽤 많은 인기 사극 제작해왔습니다. 그러나 KBS도 '광개토태왕(2011)'이나 '근초고왕(2010)', '대왕의 꿈(2012)'같은 소위 삼국 사극 시리즈에서 기존의 원칙을 깨트려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시대 고증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많은 부분을 창작하기도 했고 사극 전문 배우도 아닌 아이돌 배우의 출연, 복식 고증과는 전혀 동떨어진 웨딩드레스 스타일의 의상 등 정통사극에서 벗어난 행보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KBS가 가장 잘 하는 것은 고증에 충실한 정통사극인데 타 방송사의 인기를 쫓으려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셈이었습니다.


'정도전'으로 정통사극에 복귀하긴 했으나 사극 제작 환경이 가장 좋다는 KBS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정도전'도 세세히 따지고 보면 틀린 부분이 몇가지 있습니다. KBS에는 시대별 복식 고증 도감을 발행할 정도로 능숙한 제작인력이 다수 있지만 '불멸의 이순신(2004)'같은 경우 국궁 아닌 양궁의 활쏘기 방식으로 논란이 됐고 사서의 진법을 무시한 허술한 전투신은 타 방송사와 마찬가지로 지적되곤 합니다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역사를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이니 제대로된 사극 제작도 공영방송의 책임입니다. '정도전'은 사서에 충실한 동시에 역사 속 인물들에게 현대적인 캐릭터를 부여해 극적 재미도 살렸지만 왜 정통사극이 중요한지 다시 한번 그 필요성을 일깨운 드라마입니다.










KBS의 정통사극 제작은 공영방송의 책임


몇년전 배우 안재모가 아침 드라마에 출연하는 걸 보고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연기 경력도 오래되었지만 사극에서 경력을 쌓은 흔치 않은 30대 배우들 중 하나라 사극을 하면 아침 드라마 보다는 더 잘할텐데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안재모가 유동근과 함께 다시 부자 연기를 하게 되다니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맡았구나 했습니다. 유동근이 태종 이방원의 아버지 이성계 역을 안재모가 충녕대군의 아버지 이방원 역을 한다는 것은 배우 개인에게도 특별한 경험이겠지만 같은 배우가 같은 역사 속 인물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면에서 흥미로운 일입니다. 유동근의 이방원과 안재모의 이방원은 같은 실존인물이지만 전혀 다른 캐릭터였죠.


사실 배우에게 '사극 전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이미지가 필요한 배우에게 사극같은 '고루한' 드라마에만 어울린다는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재모처럼 사극에서 보면 더 반가운 배우들이 있습니다. 젊을 때부터 사극에서 훈련받은 연기자들은 발성부터 음색까지 다른 배우들 보다 뛰어납니다. 아무리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도 사극에 출연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배우도 있습니다. 서인석, 임호, 이병욱, 이광기같은 배우는 현대극 보다는 사극에서 보면 더욱 빛이 나죠.


다른 어떤 드라마 보다 사극에서 더 빛나는 배우들.


대한 민국 최고의 인기를 끄는 아이돌 스타라 해도 박영규가 연기한 이인임이나 백수 최만호를 연기한 최달프 서인석의 '내공'을 쉽게 따라올 수 없습니다. KBS 정통사극은 스타는 아닌지 몰라도 연기력 만큼은 최고인 배우들이 자신의 숨겨진 저력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역사 속 인물을 TV 속에서 구현하려면 제작진의 특별한 해석도 중요하지만 연기자들의 전문적인 캐릭터 창조 역시 중요한 문제입니다. 꼼꼼한 고증과 제작, 완벽한 연기가 만나면 최고의 사극 한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사극의 가치는 시청률로 따질 수 없습니다.


KBS의 운영방식 전반을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수신료 납부방식이나 공영방송, 언론으로서의 역할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정도전'같은 드라마를 보면 KBS에 낸 수신료가 아깝지 않습니다. MBC가 사서에 기록이 없는 인물로 민중사극을 만들고 SBS가 판타지 드라마를 만든다면 KBS의 특징과 역할은 사서와 고증에 충실한 정통사극을 만드는 일입니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의 정통사극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같은 환경에서는 처음부터 KBS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시청률로 잴 수 없는 사극의 가치. 최고의 마지막회를 기대한다.


덧붙여 '정도전'은 정통사극의 부활이란 측면 이외에도 현대사의 정치판에 빗댄 역사 해석이 돋보인 드라마입니다. 이성계라는 조선 건국의 영웅이 사람들을 학살하는 거골장 신세를 한탄하고 가족들의 불행과 '성계탕'이란 말에 눈물짓는 인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또 그런 이성계를 둘러싼 고려왕족, 신진사대부와 왕자들의 갈등이 국회의 대립을 연상시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전권을 휘두른 간신이 아닌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획자 정도전(조재현), 그리고 왕자들의 파워게임 속에서 사라져간 민본의 가치가 오늘밤 어떻게 마무리될지 오늘은 최고의 마지막회를 기대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