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시작할 때 마다 조용하게 등장하는 안내 문구가 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인물, 사건, 장소는 허구'라는 내용의 이 안내 문구는 이상하게 더욱 이 드라마를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드라마가 현실에서 모티브를 얻어 가상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허구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까? 그런데 드라마 속 대사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묘하게 현실 속 사건이 떠오른다.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의 성접대 사건이 떠오르는 '영상 속의 인물을 송아름이라 확신할 수 없다'는 대사나 문희만(최민수)의 '정치개입은 했으나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같은 대사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현실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렇게 드라마를 '허구'라고 강조하면 할수록 더욱 리얼하게 느껴지는 '오만과 편견'이 어제 종영했다. 박만근(정찬)을 잡기 위한 민생안정팀의 승부수는 통했고 박만근은 수감되었다.


진짜 박만근인 최광국을 잡고 희생한 문희만. 묘하게 현실감이 드는 검사들이 인상적이었던 '오만과 편견'


그러나 재벌과 검찰이 싸고 도는 박만근이라는 엄청난 대어를 낚은 것에 비해 민생안정팀은 처참하기만 하다. 구동치(최진혁)은 검사복을 벗고 문희만은 죽고 민생안정팀은 텅 비었다. 아들바라기인 구동치의 아버지(한갑수)는 평생 동안 꼭꼭 숨기고 싶었던 아들의 죄를 보게 되었고 정창기(손창민)는 여전히 피폐한 인생이다. 승리라고 하기엔 너무 슬픈 상황이다. 박만근 사건 3년후 한열무(백진희)와 구동치가 다시 만나긴 했으나 박만근 하나를 잡기 위해 그들이 치른 대가는 너무 크다. 부장검사와 수석검사 하나를 희생하고 잡히는 범인이라니. 20회에서 사건을 덮자고 제안했던 구동치의 말처럼 이건 계산이 맞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도 '드라마'고 '판타지'니까 '오만과 편견' 마지막회에는 속시원하게 사건이 해결되고 범인이 벌을 받는 권선징악적 결말이 그려질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최광국 검사 행세를 했던 박만근이라는 악의 축이 잡히긴 잡혔는데 이건 시원하다기 보다 어쩐지 떨떠름하다. 결과적으로 드라마는 집요하게 사건을 파헤치는, 능력있고 젊은 검사와 자신의 부하검사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노련한 부장검사를 박만근과 맞바꿨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박만근의 수많은 죄 중 한별이를 살인교사한 죄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정창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살인을 교사하고 검찰을 쥐락펴락한 죄는 드러날지 조차 의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건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대한 단순한 가치 계산인지도 모른다. 아들 한별이를 잃고 오랫동안 조울증 상태로 살아왔던 한별의 엄마 명숙(김나운)과 백곰(이현걸)의 죽음을 괴로워하던 가족들의 궁금증은 해소되었다. 늘 아이처럼 한열무의 속만 썩이던 한별엄마는 이제는 법정에서 힘겹게 진술한 강수(이태환)를 친아들처럼 위로하기도 한다. 한별이의 죽음은 한열무 때문이라 소리소리 지르고 난리쳤던 때와는 달리 한별이 옆에 같이 있어줘서 다행이라며 강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별이의 죽음으로 붕괴된 한열무 가족이 비로소 작은 위로를 얻게 된 것이다. 문희만과 구동치의 희생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만과 편견'의 구동치는 한 사건에 꽂히면 끝을 보고야 마는 의욕있는 젊은 검사였고 문희만은 정의를 추구하는 검사라기 보다 윗사람의 눈치와 때에 맞춰 결정하는 타입이었다. 구동치는 때때로 사건을 보류하거나 수사하라는 문희만과 부딪히기도 하고 문희만의 지시로 다른 지방에 발령받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구동치는 지금까지 올바르게 살아왔기에 자신은 누구에게 공격받아도 떳떳하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문희만은 덮어도 그만인 작은 사건의 범인 보다 사회에 해를 끼치는 큰 사건의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동치의 오만과 문희만의 편견 - 그것이야 말로 이 드라마의 진짜 의미인지도 모른다.


최광국을 검거하다 산산조각난 민생안정팀.


구동치는 한별이 사건을 파헤치기전까지는 몰랐다. 자신이 한별이를 구하기 위해 쇠파이프로 백곰을 때렸을 때 백곰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정당방위고 의식하지 못한 죄라지만 백곰의 죽음은 끝끝내 박만근 재판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공소시효가 몇시간 남지 않은 순간 재판정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검사복을 벗는다. 문희만은 마약사건, 성희롱 사건, 취업준비생의 입사 비리 고소, 학생들의 돈을 횡령하는 화영 사학재단의 비리가 결국 한몸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세상에 가리고 덮어도 되는 작은 사건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문희만은 결국 공소시효도 얼마 남지 않은 한별이 사건에 자신의 목숨을 걸게 된다.


그러고 보면 '거대한 악은 따로 있는 줄 알았다'는 문희만의 말은 참 의미심장하다. 사람좋은 검사 노릇을 하며 구동치, 문희만과 함께 일하던 최광국 뒤에는 사람들의 납치, 살인을 지시하고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 박만근이란 가상의 인물이 숨어 있었고 흔히들 넘겨버리는 미해결 살인사건과 마약, 성추행 사건에 의료계, 법조계, 재벌가의 비리가 감춰진 상황은 '법 무시하고 사람 죽이고, 법 피해서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법 위에서 놀면서 나라 등치고, 지 배 불리는' 사람들의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한다. 뭐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숨은 권력자라는 박만근의 이름이 실존인물에서 한자씩 따온 것이 아니냐는 농담까지 나왔을 정도니까. 역시 '허구'라고 강조하면할수록 현실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창기의 교통사고를 덮으려 했던 과거가 박만근을 덮어준 셈이다.


문희만은 정창기가 강수의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죽였을 때 특검이라는 큰 정의를 위해서 사건을 덮으려 했다. 대의를 위해서 작은 것을 감춰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건은 오랜 시간 동안 문희만과 정창기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정창기의 교통사고를 덮어온 시간만큼 박만근(최광국)을 키워준 셈이다. 다소 급박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한 것같기도 한 이 드라마의 끝마무리는 그래서 그런지 못내 찜찜하다. 특검이라는 대어와 교통사고라는 일상 사건에서 고민하는 우리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작은 사건 하나라도 치열하게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는 박만근이라는 대어를 낚을 것같기도 하고 그런 악의 축을 잡으려 희생되어야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겉으로는 해피엔딩인 이 드라마의 마지막회가 시원하지 않은 것은 첫회부터 느껴진 그 기묘한 현실감 때문인 것같다. 


아무튼 별 기대없이 보았던 드라마에서 최민수의 문희만이라는 특별한 캐릭터를 만난 것은 행운인 것같다. 마치 현실 속에서 톡 튀어나온 진짜 검사처럼 대한민국 검찰의 현실을 콕 집어내고 때로는 느물거리고 때로는 날카롭게 대처하는 문희만의 반응은 드라마를 보는 중요한 재미였다. 한별이의 뒷모습과 이어진 그의 마지막 표정, 가족들이 남겨진 세상에 대한 짧은 미련과 후회없이 사건을 처리했다는 검사의 소신이 엿보이는 그 마지막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눈을 감는 그 표정 때문에 현실같은 이 드라마의 여운이 더 깊게 남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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