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도 한번 썼지만 예전에는 장남이나 장녀가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풍경이 흔했습니다. 동생들이 모두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때까지 돈도 모으지 못한 장녀가 신세가 서럽다고 울며 부모와 갈등했단 이야기. 흔한 80, 90년대 풍경이었죠. 그런데 장녀는 장남들과는 또 경우가 달랐습니다. 장남의 경우 며느리가 들어오면 오히려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고 안정적이 되어 결혼을 장려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집 장녀에겐 어서 빨리 결혼하라는 말을 하지 않더 군요. 그 시절엔 시집가면 남의 집 사람이라 친정에서 돈 달라는 말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포스팅에서 거론한 그 집은 내 딸과 결혼하면 장인 장모 먹여살릴 거냐고 예비사위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유일하게 연애하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과도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잘 풀리지 않았고 꽤 늦은 나이까지 혼자 살고 있는 그집 딸은 아직까지도 한스러운게 있다고 합니다. 그건 부모님이 단 한번도 자신에게 '결혼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어차피 악착같이 직장다니고 돈모으느냐 바빠 사람 사귀기도 힘들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식 걱정이 된다면 한번쯤 결혼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 봤을텐데 그런 말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나이 차서 결혼하고 분가하는 동생들의 혼수 비용이나 결혼 비용이 얼마라며 돈달라고 한게 고작이지요.
'금나와라 뚝딱'의 윤심덕(최명길)은 몽희(한지혜)에게 널 아들처럼 남편처럼 생각하고 의지해서 그랬다면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듯 이야기하고 심덕의 어머니 최광순(김지영)은 심덕이 부린 허영이 자기 돈 벌어서 한 거 아니냐고 화를 내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윤심덕의 허영은 큰 딸 그것도 친구의 딸인 몽희의 인생을 희생해서 얻은 것 입니다. 몽현(백진희)에게 좋은 집안과 선보라며 명품옷을 사주고 몽규(김형준)에게 약사 아가씨와 선보라며 사진을 들이밀면서도 몽희에게는 적극적으로 결혼을 권유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윤심덕이 정몽희의 인생을 걱정해서 했던 일은 유일하게 형부 박현수(연정훈)와의 사랑을 말린 것 뿐 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적극적으로 말려서 중간중간 몽희에게 고졸이라며 막말도 했고 몽희가 원했던 보석 디자이너 일을 하지 말라고 했죠. 몽희가 길에서 불어터진 라면 먹는 걸 봤을 땐 한소리하고 끝났지만 대학원 다니던 몽규가 노점상 일한다니까 펄쩍 뛰면서 집안을 뒤집어놓습니다. 몽희 입장에서는 넌 그냥 사랑도 하지 말고 디자이너같은 고급스런 일도 하지 말고 평생 노점상이나 하면서 내 돈줄이 되라는 뜻으로 들려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큰딸이 알아서 자기 삶을 잘 챙기니까 동생들 보다는 야무지니까 의지가 되고 또 경제적 보탬이 되는게 든든했을 수도 있겠지만 빈말이라도 결혼하라고 하지 않는 그 처세에 숨겨진 본심은 절대 자식에 대한 걱정은 아닐 것입니다. 20대 중반 밖에 되지 않은 몽현은 그렇게 열심히 선자리에 내보냈으니까요. 거기다 빚지고 몽현의 혼수비용을 마련하고 몽규를 그런 고졸 여자애랑 노점상하게 둘 수 없다는 윤심덕에게 몽희가 한소리하자 윤심덕은 누가 너더러 돈벌어오랬냐며 딸이 돈번다고 유세한다고 막말을 했죠.
부자집에 시집보낼 혼수 비용도 없어 몽희가 간신히 마련한 일억으로 몽현의 혼수를 마련한 부모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의외로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더군요. 위에서 거론한 그 집에서도 자기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는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큰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커녕 돈벌어온다고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더랍니다. 겉으로는 형부와 얽힌 몽희에 대한 걱정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윤심덕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현실적이라 소름이 돋더군요. 아 저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싶어서 말입니다.
물론 평생 고생하는 딸을 옆에서 뒷바라지하며 손주들을 키워온 최광순의 시선에서 윤심덕을 본다면 이해못할 것도 없습니다. 일명 샌드위치 세대였던 지금의 50대는 돈과 학벌이 인생의 최고이던 시대를 살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미덕 이었습니다. 돈없어서 학벌낮아서 무시당하던 그 세대가 지금의 장년층을 고학력으로 키웠고 부족함없이 자라게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세대들은 고생하며 돈버는 법은 몰라도 낭비하고 자존심세우고 꾸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죠. 자식에게 돈쥐어주고 교육시키면 다 잘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몽규가 같이 장사하던 민정(김예원)과 결혼하겠다고 나서자 몽규의 성격을 아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민정을 반깁니다. 민정과 사귀는 모습도 보기 좋지만 사회경험이 부족한 몽규에게 민정은 정말 최고의 짝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심덕이 고졸에 친정엄마까지 모신 처지라며 무시하고 정병후(길용우)의 짝으로 반대했던 김필녀(반효정) 마저 내 손주에겐 그런 생활력강한 아이가 딱이라며 적극 찬성 합니다. 내 자식 만큼은 높은 학력에 많은 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나 호사를 누리길 원했던 윤심덕은 자신의 옛모습이 떠오르는 민정을 못견디게 싫어하며 말을 함부로 합니다.
'부모가 없어서 배워먹질 못해서 그러니'라는 말로 민정을 모욕하던 윤심덕의 이기심은 몽준이 나타나서 민정의 편을 들자 폭발하고 맙니다. 우리 형편에 너한테 명품구두 신게 해주고 친구들 축에 빠질까봐 프랑스 고급와인만 마시며 놀게 해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냔 말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몽규는 형편도 안되면서 재벌집 아들 부럽지 않게 키워만 놓으면 재벌집 아들도 못되는 주제가 어떻게 세상에 나가 섞여사느냐며 엄마를 원망합니다 윤심덕은 자식들에게 자신의 입장에서 최고인 것을 베풀었지만 자식들은 정작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무엇 보다 '자식 위해서'라는 말로 스스로 만족하던 윤심덕이 몽희에게 한 행동은 딸에게 한번도 결혼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부모의 욕심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배고프게 살았던 전후세대와 장년층 세대의 갈등이 안타까운 순간인 동시에 우리 세대 부모님들의 전형인 윤심덕이 안쓰러워보이는 순간 입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밉다고 할 수만은 없는게 자식 세대의 입장이죠. 윤심덕은 바라는게 달랐던 몽현과 몽규와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눠야하지만 몽희에게는 좀 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하는게 아닐까 싶더군요. 윤심덕은 마지막회가 가까워질수록 대놓고 못된 다른 악역들 보다 현실적이라서 보기 불편한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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