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김유신이 아내를 고르는 남다른 기준?

Shain 2009. 6. 21.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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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공주와 선덕여왕의 연인으로 김유신이 선정된 것을 보고 참 재미있는 설정이라 생각했다. 진흥왕이나 진평왕이 강조한 '성골'의 뿌리, 즉 직계 존속의 개념을 강요하던 신라 왕조는 골품제를 깨트리는 것을 금기시했다. 성골이나 진골 왕족이 같은 골품 안의 여러 연인을 두는 것 - 비록 남매거나 근친, 혹은 동성일지라도 - 은 허락했으나 골품을 어겨 결혼하거나 연인이 되는 건 '사통'이라 표현했다.

드라마에서 표현하는대로 아버지의 신분이 낮은 설원랑(금진궁주의 아들, 아버지는 설성 - 사다함과 아버지가 다른 형제)은 미실과 사통을 하고 색공지신을 할 지라도 그의 정식 파트너는 되지 못하고 세종의 아들 하종에게 면전에서 천시를 당하기도 한다(실제 하종이 그런 성격이었는지는 알 길 없으나 설원랑을 높이 샀을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등장한 만명공주와 김서현 커플도 '사통'이라 표현된다.

만명공주의 신분이 왕족의 결합으로 태어난 높은 골품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다. 만명공주의 아버지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이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다. 즉 왕족에 아주 가까운 핏줄이 바로 만명공주이다. 거기에 지소태후를 이어 진골정통의 수장 위치에 있던 만호태후는 진골정통들과 결속력을 다져왔고 사도왕후와 미실로 이어지는 대원신통을 경계했다.

김유신탄생지및태실(金庾信誕生址및胎室) - 김서현이 공을 세우기 위해 고구려 변방인 진천에 거주하였다. 현재 우물과 태실이 남아 있다.(출처 : 문화재청)


김서현은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공을 인정받아 신라 진골에 편입되긴 했으나 진골 중에선 품계가 낮았다. 성골과 가까울수록 그 신분이 높게 인정되는 신라 왕족과 혈연관계가 적었던 것이다. 또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받아 대원신통이었다(남자도 1대에 한해 세습 가능). 그런 김서현이 만명공주와 혼인할 수 있는 자격이 될 리 없었던 것이다. 만명부인은 궁에서 도망쳐 김서현과 사통했고 결국 신분이 족강되고 만다.

그들의 신분 차이나는 연분이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사랑이야기의 '원본'이란 설도 있다(삼국유사를 제외하곤 선화공주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된 사서가 없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신라 내 이야기일 거란 설이 많다). 신라 변방 만노성(충북 진천)에서 공을 세워 신분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던 김서현은 결국 만명과의 사랑을 허락받고 서라벌로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문노 역시 신분이 낮은 화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진골이나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로 왜국에서 바친 공녀라 한다. 능력으로는 감히 그를 따를 자가 없던 문노는 설원랑을 비롯한 미실의 측근들에게 자리를 위협받기도 한다. 공도 많고 존경할만한 그였지만 신분이 낮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초반에 미실은 설원과 하종 등에게 매수한 낭도를 붙여주며 문노를 눌러보려 하지만 후에 진지왕 폐위의 공을 인정해 벼슬을 주고 동륜태자의 아내였던 윤궁과 맺어지게 한다. 그의 골품을 상승하게 해준 것이다.

성골의 지위를 격상해 왕권을 강화시킨 진흥왕의 후계자, 진평왕으로서는 아들이 없음이 상당히 난감한 일이라 자매들을 가장 가까운 왕족이자 자신의 사촌들인 용수, 용춘과 번갈아 맺게 하고 후손을 보고 싶어한다. 성골의 핏줄을 이어보려 최대한 노력했기에 천명은 용수와 김춘추를 낳았지만 선덕은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한다. 이런 골품제 속에서 성골 중의 성골인 선덕여왕 혹은 천명공주가 방계인 진골, 김유신 집안과 맺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김유신묘.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을고 왕릉의 예를 갖추어 무덤을 꾸몄다 한다. 십이지신상이 유명하다. (출처 : 문화재청)


신라의 왕권은 모계사회의 견제 속에서 간신히 그 기틀을 마련했다. 불교와 유교의 적절한 도입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이론적 기반은 마련했지만 직계존속의 품위가 이어지지 않으면 왕은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나마 만명공주가 진평왕의 누이이자 작은 할아버지의 딸로 촌수가 가까웠지만 아버지의 신분은 무시할 수 없는 차이였다. 김유신이 전장을 떠돌며 공을 세우려 필사적으로 노력한 건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으로 봐야한다. 골품제는 공을 세운 자에 한해서는 유연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진평왕과 만호태후의 허락을 얻어 서라벌에 입성하고 15세에 풍월주가 됐으며 각종 정복 전쟁을 통해 명성을 쌓았음은 물론 상대등 비담(미실과 진지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설정 - 드라마 속에서 미실에게 '더 이상 네가 필요없다'란 말로 버려졌다)의 난를 비롯한 국내 정세도 직접 다스려 선덕여왕의 신임을 얻었다. 또한 천명공주와 김용수의 아들로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제외하고 가장 성골에 피가 가까운 김춘추와 혈연을 맺기 위해 보희, 문희 두 여동생을 선보인 것도 유명한 일화다.

선덕여왕이 신분이 맞지 않는 춘추와 문희의 결혼을 허락한 건 김유신의 지혜이자 의도적인 설정이었던 것이다. 후에 보희 역시 김춘추의 첩으로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폐위된 왕의 아들인 용춘공(선덕여왕, 천명공주의 남편 역을 함)과 친하게 지냈고, 김유신은 김춘추를 선택해 남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우정을 쌓았다. 고구려로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쳐들어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유신에게 선택된 여인은 화랑세기의 기록을 합쳐 모두 셋이다. 화랑세기엔 15세에 보종이 양보하여 풍월주가 되고 하종공(미실과 세종 전군 사이의 아들)의 딸 영모를 처로 맞았다 기록한다. 기록은 없으나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엔 10대 즈음에 천관녀와 어울려 만명부인의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또한 환갑의 나이에 김춘추의 셋째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인 지소와 결혼하여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낳았다 기록되어 있다.

천관녀의 전설이 내려오는 경주 천관사지. 석재와 기와 조각만이 남은 이곳은 천관사가 있던 곳인지 천관녀를 기려 세운 곳인지는 불분명하다. (출처 : 문화재청)


일단 천관녀(天官女)설화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하지 않고 민간에 전승된 이야기다. 기생 천관녀와 어울리는 유신을 나무란 만명부인은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천관이란 이름이 '천관(天冠)보살' 내지는 '천관사'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리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은 아닌 듯하다. 천관사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 역시 신라의 성지로 여겨지는 곳들이 모여 있는 장소다. 즉 천관녀는 사당의 무녀이거나 신당의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

화랑세기에는 '신국의 도'라는 표현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들과 다른 신라의 전통을 의미하는 말로 보인다. 그 신국의 도에 의해 그들은 결혼을 하고 풍습을 장려한다. 신라 초기엔 신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법흥왕 때 불교가 도입되고 진흥왕 때 불교가 부흥 이후 또 모계의 권력이 줄어가면서 지위가 낮아졌을 것이라 한다. 기생이란 표현은 신녀에 대한 오해라 쳐도 김유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선 절대 도움되는 처지가 아니란 뜻이다.

둘째로 기록된 하종공의 딸 영모는 그다지 다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정식 부인으로 기록된 지소 부인이 환갑 나이 유신과 자식을 9명이나 낳았다는 건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으므로 그 자식들 중 몇은 영모의 딸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엔 김유신과 지소부인 사이에 삼광, 원술, 해간, 원정, 장이. 원망이란 다섯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성과 어머니를 알 수 없는 서자 군승이 있었다 한다. 삼광과 지소 부인의 나이차이를 봐도 최소한 기록이 많이 남은 삼광은 지소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진덕여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무열왕의 비는 김인문의 글씨가 비문으로 새겨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김춘추는 왕이 된 후 김유신을 신라 최고의 지위로 올리고 자신과 문희 사이의 딸 지소, 즉 김유신의 조카를 유신의 아내로 준다. 환갑이 다 된 김유신은 늙어서야 신분상승을 위한 결혼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그제서야 소원을 성취한다. 조카이자 왕의 딸인 공주와 마지막으로 결혼하여 평생 소원을 이룬 것이다. 아들 원술과 지소부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유치진의 극으로도 유명하다. 어머니의 성을 모른다는 서자 군승은 기록되지 않은 천관녀의 자식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유신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모두 신라의 중요한 신하가 된다.

왕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신라의 왕이 될 자격이 없었던 김유신.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왕을 세우는 최고의 권력자가 됐고 왕에 못치 않은 지위를 보장받았다. 연인을 버리가며 그의 피를 깎는 노력으로 신분을 상승시켰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결혼은 그를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을 배필로 생각하기 보단 왕위에 세우고 자신의 뜻을 이룰 지지기반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연상인 까닭이라기 보다 왕녀의 신분이 족강되면 굳이 결혼한 의미가 없기 때문 아닐까 한다.

이미지출처 :
http://www.cha.go.kr/main/KorIndex!korMain.action
본문 중 모든 이미지는 문화재청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문 내용의 출처는 기억(화랑세기)에 의존해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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