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미실(대원신통)을 끝장낸 건 진짜 김유신이다?

Shain 2009. 6. 23.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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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화랑 김유신은 낭도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남달리 끈기있고 독한 김유신과 각 정치 세력의 사병 역할을 하는 화랑의 갈등은 드라마 상에서 일개 잉첩의 세력인 '대원신통'과 '왕족' 간의 갈등으로 표현된다. 가야계의 김유신은 이 다툼에서 왕족인 천명공주와 진평왕의 측으로 돌아섰다(같은 진골정통이라서 그렇다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김서현은 대원신통이긴 하지만 그의 처지를 고려할 때 진평왕과 가장 가까운 측근이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묘사하는 군사훈련 장면(6월 23일 방송분)은 어쩐지 로마의 훈련법과 비슷해보인다. 군장을 갖춰 팀을 이루고 함께 방어하고 구령에 맞춰 호위하는 연습은 백부장(센추리온)의 호루라기에 맞춰 진퇴를 반복하는 로마 병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화랑도를 비롯한 여러 신라 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니 다른 나라의 고대 자료를 기본으로 연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점이 신라 역사를 밝히는 가장 큰 난관이긴 하다.

신라의 사서로 대표되는 건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필사본' 이 세가지 뿐이다. 이 세 사서로 추측한 신라의 문화로 드라마를 꾸미는 까닭에 '아귀가 맞지 않는' 역사적 사실들이 제법 많다. 역사학계에선 성골과 진골의 정확한 정체 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한다. 골품제의 최고 신분인 성골은 왕위를 있는 사람들이란 점은 명백하지만 정확히 그들이 직계존속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라에 대한 관점을 상당부분 바꿔야하는 것 중 하나가 초기 신라 사회엔 '성(姓)'이 없었다는 것이다. 성이라는 건 부계사회에서 중점을 두었던 특징으로 부족 중심으로, 모계로 이어진 신라 초기 사회는 성의 구분 보다는 모계 혈통에 따라 왕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왕의 아들이 이미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모계에 따라 사위와 외손자가 왕위를 잇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초기에 석, 박, 김씨를 중심으로 번갈아 왕위를 이었던 이 체계는 얼핏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다.


'이 영상은 블로그에 퍼가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나타난 MBC의 '퍼가기용 동영상'

이 주장에 의하면 초기 신라의 대표적인 두 부족의 후손으로 보이는 대원신통(大元神統), 진골전통(眞骨正統), 두 인통(姻統)은 각각 그 대표격에 해당하는 여성을 두고 그를 종(宗)이라 부른다. 종손(宗孫)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그 혈통의 수장이란 뜻이다. 그리고 각 인통에서 남성 한 명을 대표로 두고(주로 종의 아들이 된다) 그 둘 중 하나가 신라의 왕이 된다. 그리고 나머지 인통의 남성은 '갈문왕(葛文王)'이란 호칭을 가지게 된다. 두 인통이 번갈아 왕을 배출하는 것이다.

두 인통은 '왕비'를 배출한게 아니라 자신들의 모계에 따라 왕을 선택한 것이고(모계 혈통은 중국 고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굳이 여왕이 아닌 왕이어야 하는 이유는 주변국의 간섭 탓 - 특히 고구려, 고구려는 소서노의 전례탓인지 남자로 왕위를 이었다 - 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원신통이 남성 1대에 한하여 물려지는 이유는 여자가 시집가면 자신의 성을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아버지의 혈통을 고려하긴 하되 모계를 우선한다. 이는 잦은 근친혼 탓으로 '부계'로도 관계가 해석되는 맹점이 있다.

후기엔 부계, 즉 왕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풍조가 점차 강화되고 모계 전통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경문왕 경우 제외). 신라초기 왕조가 부계로 이어지지 않고 모계로 이어졌단 해석이 타당하다는 관점 하에 현재의 드라마를 보면 몇가지 맞지 않는 부분이 나타난다. 진평왕, 미실, 만호태후, 지소태후, 지도태후 들의 관계가 모계 중심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진흥, 진지, 진평왕은 모계에 따라 왕이 됐다.

서로 복잡한 혼인을 통해 왕과 갈문왕을 교대로 선정하던 두 인통이 진평왕을 이를 후계자를 낳지 못한 건 진골정통의 만호태후가 인척 간의 혼인에서 대원신통을 배제한 까닭이라 한다(진흥왕 당시 미실의 세력이 막강했음으로 견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들의 세력을 늘이기 위한 관계를 맺었던 그들 인통에게 관계 단절은 세력을 잃음을 뜻하는 것이다. 진골정통의 후계가 선명하게 기재된 반면 대원신통은 그 후계가 묘연하다. 초기엔 양분된 권력이었지만 후반기엔 힘을 잃은 듯하다.

모계의 장점이자 약점은 부계와 달리 자손이 그리 많이 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계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들의 정통 후손은 모계의 수장이 왕 혹은 갈문왕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 뿐이다. 진흥왕을 비롯한 후기에 많은 부분이 달라지고 부계로 이어지는 '성(姓, 예를 들어 진골정통은 김씨, 대원신통은 박씨)'을 갖게 되면서 이들의 파워게임은 조금 양상이 달라져 버린다. 궁궐 안의 세력도 화랑도 각각 나뉘었으나 전쟁이 잦아지면서 화랑도를 강조하게 되고 병권은 통합되는 경향이 생긴다.

출처 : MBC 선덕여왕 홈페이지


미실은 늙은 후 절에 들어가 스님으로 은퇴(?)한다. 설원랑과 함께 지내며 병을 앓고 설원랑이 대신 죽었단 기록도 그때쯤 남긴다. 선덕여왕이 태어나 활약할 시기엔 이미 죽고 없었거나 세력을 잃은 상태다. 진흥, 진지, 진평을 모시는 와중 은퇴했으니 맞대결은 불가능했고 이미 후계구도가 약해져 대원신통은 용수, 용춘 만 남는다. 선덕여왕이 후계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대원신통은 후계가 끊기고, 진덕여왕 다음 왕인 김춘추는 천명공주의 아들로 또다시 진골정통이 되는 것이다.

진골정통의 수장인 선덕여왕이 여왕의 자리에 오르고, 대원신통의 수장인 진덕여왕이 여왕 자리에 오르지만, 후계는 다시 진골정통에게 넘어가고 신라 말기엔 '진골' 만이 왕족을 뜻하는 말이 된다(흔히 사서에 성골, 진골 만을 구분함은 그 탓일 것이다). 신랑의 이 체계를 점차 변화시키고 파워게임에 힘을 실어 부계 중심 사회로 이어지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하나가 김유신이다. 초기에 하종의 딸과 혼인하여 진골정통이지만 하종과도 친하게 지내던 그지만, 역사서의 기록을 따져보면 군신의 예를 유난히 강조했다.

가야세력 출신으로, 신라 왕실의 혈통이기도 한 김유신(진골정통). 김부식이 많은 부분을 할당해 기록했다는 김유신은 자신의 무공으로 세를 모으고 화랑을 이끌며 충효를 강조하는 무장이다.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힘을 실어줘 진골정통의 파워게임에 우위를 차지하게 했으며 목숨을 불사했다. 선덕여왕이 사망할 때 쯤 일어난 비담(드라마에서는 미실과 진지왕 사이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다)의 난은 대원신통의 마지막 반항이었으나 유신의 지략으로 여왕이 승리를 거둔다.

비담은 당시 화백회의의 의장이었고 대원신통의 주력이자 부계로서는 왕의 아들이었다. 중국이 주장하던 '남자가 왕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본인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김유신은 비담에게 성공을 거두고 왕권을 수호했으며 진골정통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신라의 왕족은 그 이후 대원신통의 맥이 끊기고 진골정통이 유일해지게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충효(忠孝)'로 살겠다는 그의 말처럼 선덕을 돕고 춘추를 옹립한 그는 진정으로 대원신통의 맥을 끊은 당사자가 아닐까. 

드라마 속 미실과 선덕여왕, 김유신의 대립은 연대상 불가능하지만, 대원신통을 마무리 지은 인물로는 김유신과 선덕여왕을 선택한 드라마의 구도는 정확히 맞다는 이야기다. 또다른 사서가 나타나 신라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한 그들의 세력 다툼은 선덕여왕 대가 끝이다. 물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의 도리가 유입되고 불교를 부흥시킨 건 또다른 신라의 문제가 되버린다.


이미지 출처, 참고자료 :
http://www.history21.org/journal/
http://www.imbc.com/broad/tv/drama/seonduk/sketch/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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