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근초고왕

KBS 근초고왕, 또 다시 방황하는 왕자

Shain 2010. 11. 2.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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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역사에 악당은 없다, 이렇게 단언을 하긴 했지만 역사상 타고나길 악한 성정의 인물이 있긴 하다. 개인적 회한에 빠져 많은 사람을 피흘리게 하고 전쟁에 휘말리게 한 인물도 많다. 그럼에도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 정치인과 정치인과의 갈등에서 '입장차이'는 존재할 수 있어도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는게 맞다.

드라마 제작 초기엔 장희빈의 표독스런 눈빛과 모사에 핍박받는 인현왕후를 그리는 사극이 많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남인의 후원으로 중전까지 오른 희빈 장옥정 역시 자신의 '입장'이란게 있고 절대악에 해당하는 인물은 전혀 아니다.

사극은 종종 절대 악인이란 관점을 나라와 나라 간의 이야기에도 적용시키곤 한다. 주인공이 다스리는 나라의 적국은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 나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1월 6일 첫방영될 'KBS 근초고왕'에서 주연을 맡은 감우성.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사극을 만든다는게 쉽지 만은 않다. 'MBC 선덕여왕'의 미실처럼 충분히 자신의 입장이 설명된 라이벌은 주인공 보다 큰 호응을 얻기도 하고 양쪽 간의 합리적인 정치적 차이 만으로 극을 꾸리면 드라마가 밋밋해지기 쉽다. 서민 드라마가 외면받듯이 이런 사극도 외면받을 게 뻔하다.

사극에서 이런 밋밋함을 탈피하기 위해 채용하는 뻔한 패턴이 사실 제법 많다. 어린 시절의 고난은 필수이기에 외국에 나가 죽을 고생을 하고 오는 것 따윈 기본 중의 기본이다(SBS 연개소문). 외국에 나가지 않은 인물은 최소한 노숙자나 거지 생활이라도 해봐야한다(MBC 동이). 또 반드시 무찔러야 할 평생의 라이벌이나 적이 존재한다. 'MBC 동이'의 경우 동이의 적이 되기 위해 장희빈은 검계에 누명을 씌운 일당이 되어야 했다.


백제와 갈등 관계에 있는 고구려의 고국원왕 역을 맡은 이종원



'KBS 천추태후'는 왕건의 후계인 공주로서 경종의 황후로서 고려의 장래를 걱정하는 영웅 황보수가 전장을 헤집고 다니는 내용이었다. 경종과 성종의 업적을 다소 깎아내리면서까지 장부 못지 않은 천추태후의 영웅성을 부각했지만 그녀는 친아들을 제거하고 혼외자인 아들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려했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제주의 거상 김만덕의 일생을 묘사한 'KBS 거상 김만덕'은 교과서적인 주인공의 언행으로 도마에 올랐다. 성인군자인듯 악행을 저지르는 상대방에 조언하는 김만덕은 짧은 분량 탓인지 충분히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도 못했지만, 사극 특유의 영웅화가 지나쳐 공감을 얻지 못했다. 어린시절 부모와 떨어져 자란 귀한 아이가 라이벌과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후 성인급의 영웅이 된다. 이 패턴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근초고왕 역의 감우성, 비류왕의 제 1 왕후이자 고이왕계의 수장인 해비해소술 역의 최명길, 근초고왕의 아버지이자 비류왕인 부구태 역의 윤승원. KBS 토지의 길상이 이후 대작은 간만인듯 하다.



최근 만들어진 사극은 백이면 백 그런 패턴으로 제작됐다. 출생의 비밀, 쌍둥이 공주란 사실이란 조차 모르고 자란 MBC 선덕여왕의 패턴은 처음 보는 연출이 아니라 사극이라면 한번씩 써먹었던 장면들이다. 이번에 제작되는 KBC 근초고왕 역시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는 20여년을 왕자 자리에서 쫓겨나 중국에서 성장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왕족이었으나 중국에서 소금을 파는 할아버지, 흑강공 사훌(서인석)의 손에서 자란다.

숙빈 최씨의 일대기를 그린 'MBC 동이'가 60부작이었듯 KBS의 '근초고왕'은 무려 70부의 대작이다. 소서노의 후예들인 비류와 온조가 세웠던 백제, 고구려와의 인연을 태생적으로 끊을 수 없는 백제는 왕위의 계파 문제로 갈등 양상을 보였다. 계왕의 사위로 갈등을 딛고 백제를 통합해 왕위에 오르는 근초고왕과 고구려, 그리고 한반도의 정세를 그리는 대하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백제 내의 갈등과 고구려와의 갈등이 사서에 의하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설정이란 거고 이문열 원작의 소설이 존재해(대륙의 한) 전체적인 진행은 허술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늘 백제를 한나라로 만들고 싶어한 고구려의 욕심, 그리고 애초에 둘이었던 왕위 계승권자 간의 갈등을 집어넣어 '한명의 영웅을 만들기 위한 인물 배치' 구도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높다.


근초고왕의 제 2왕후인 위홍란 역할의 이세은, 위홍란의 오빠 위비랑 역할의 정웅인. 제 1왕후 부여화역의 김지수가 참석하지 않아 이세은이 여주인공 역할을 했다. 요서 지방에서 근초고왕과 함께 하는 설정이다.



백제의 어라하(왕)은 온조계의 후손들로 이어져왔지만 8대 고이왕이 어린 사반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으로 이어진 고이왕계는 11대 비류왕 때 다시 온조계로 넘어가게 된다. 비류왕은 왕위를 다시 고이왕계의 계왕(12대)에게 물려주지만 계왕은 후계를 그의 사위이자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양쪽 혈통의 통합으로 백제 내의 갈등이 봉합된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나는 사극이나 정치극이라면 거의 빼놓지 않고 보는 타입이다. 평소 '안티'에 가깝게 싫어하는 작가나 방송국, 연예인이 등장해도 반드시 본다. 드라마 중에서 가장 시청자에게 영향을 끼치기 좋은 콘텐츠가 바로 사극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가치관, 즉 특별한 사명을 받은 영웅이 존재한다는 선민의식이나 인물론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기 가장 편리한게 사극이다.


오랜만에 사극에 등장하는 진승 역의 안재모. 진씨 가문의 적장자이자 근초고왕의 죽마고우.



SBS 드라마 '대물'에서 서혜림이란 대통령 후보를 반대하는 건 '평범한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타고난 인물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잠재된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성장과정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서혜림을 지지하지 못한다. 한편 모든 것이 타고난 운명이자 인물이란 식으로 이끌어지는 '영웅형 사극'은 인물론을 탈피해야할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 발상이 아닌가 싶다.

물의를 빚은 김지수의 불참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KBS 근초고왕'은 11월 1일 제작발표회를 가졌다.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참여한 이번 드라마는 보기 드문 대작이지만 촬영일정이 매우 촉박한 상황이라 한다. 배우들과 제작진도 생방송과 마찬가지인 제작일정을 8개월이나 지속해야한다는 부담감에 걱정을 드러냈다. 그동안 몸싸움 시비를 비롯한 각종 트러블이 인터넷을 타지 말란 법이 없다.

11월 6일 방영될 첫방송을 보고 나면 영원한 안티가 될 지 좋은 점이 있는 사극임을 알게 될 지 결판이 날 것이다. 생방송 사극이야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니 두고 보더라도 중국까지 장악한 영웅으로 벌써부터 외국으로 좇겨가는 왕자의 이야기란 말을 듣고 보면 사극 특유의 전형적인 영웅이 등장할 거 같아 기대감이 반감한다.



이미지 출처, 참고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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