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근초고왕

근초고왕, 부여구는 부여씨인가?

Shain 2010. 11. 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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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드라마가 거의 없지만 그중에서 백제에 대한 드라마는 아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도 매우 짧아 중국의 사료를 기반으로 정보를 얻는게 삼국시대다. KBS 드라마 '근초고왕' 역시 이런 류에 정보를 기반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메꾸지 못한 부분은 가설이나 픽션으로 대체한다.

근초고왕이 방영된 후 읽을 수 있었던 반응은 참 다양하다. 간만의 정통사극 분위기라 밋밋하고 단순해서 재미가 떨어진다는 감상평도 있고 오히려 아주 반갑다는 평도 있다. 제일 많이 지적된 것은 주인공들의 성이 왜 '부여씨'가 아니라 '부'씨냐는 것이다. 교과서를 비롯한 많은 책에 부여의 왕족은 모두 '부여씨'라 적혀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적은 대로 백제의 11대왕 비류왕이 온조계의 핏줄을 잇는다고 했지만 사반왕이 죽은 지 70년 후에야 왕위에 오른다. 온조왕 직계라 주장하기엔 말이 맞지 않아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 흑강공 사훌을 설정한 듯하다. 근초고왕 역시 계왕의 즉위 2년 후에 왕위를 이어받지만 계왕은 독살당했다는 의심도 받는 인물이란다. 왕위 계승 과정을 매끄럽게 하자면 계왕의 딸 부여화가 필요하다.




공백이 많은 시대에 대한 각 학자들의 추측이나 주장이 몹시 다르고 교과서 등에서 채택하는 내용도 다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백제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드라마는 설정상 소서노를 백제의 국조모로 모셔 제사지낸다고 했지만 백제가 고구려의 온조왕 때부터 동명왕에게 제사기냈다는 기록도 '삼국사기'에 전한다.

삼국사기는 마찬가지로 비류를 우태(소서노의 남편)의 아들로 적지만 수서는 우태를 동명왕의 후손이라 적는다. 덕분에 비류와 온조 역시 주몽, 동명성왕의 자식들이 아닌가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백제가 이후에 '남부여'라는 국호를 정한 것도 부여에서 출발한 주몽의 뒤를 잇는단 뜻이 아니겠냐며 그 맥락을 강조하지만 드라마는 소서노가 졸본 출신이라 근본을 강조하는 것이라 설정한 듯하다.


비류왕을 죽이려 했던 고국원왕의 본명은 사유(斯由) 혹은 쇠(釗’)이다



왜 근초고왕의 주인공들이 '부여씨'가 아닌가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지만 몇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고대사회에서 '성씨'가 분명했느냐의 문제(5-6세기 이전엔 성을 쓰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이고 두번째는 그 시기 인물들이 사용했던 성씨는 백제어를 한자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고려 시대에 정리한 사서를 보고 백제를 추측하다보니 왕에게 쓰인 왕호, 시호, 묘호는 각각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신라왕 호칭이 거서간, 차차웅, 니사금 이었듯 백제는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 등과는 다른 백제의 말로 백성들은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불렀다. 이런식으로 한국어와 중국어가 다름에도 표기는 한자어로 했기 때문에 정확한 용법과 발음을 알 수가 없다는게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명이 정확히 기록된 사극을 보아왔기에 시청자들의 편의를 위해 사서에 기록된 혹은 작가에 의해 작명된 중국식 '성명'을 기재하기는 해도 삼국시대 초기에 성씨 문화가 보편적이었다는 점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중국식 성명을 사용하지 않고 고유의 이름을 쓰는 집단도 당연히 많았을 것이다. 부여씨가 성이라 기록됐다 해서 그의 성이 '부여'라는 법은 없다.

현재는 성씨와 이름을 함께 쓰는 방법을 취하고 있지만 외국 사서에서 이 현대적인 형태의 이름을 최초로 쓴 사람은 신라 진흥왕(6세기)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을 '진흥(進興, 삼맥종이란 이름도 있다)'이라 한다.

우리는 김유신, 김춘추 등에 익숙하지만 신라를 비롯한 삼국시대 초기에는 이 '성명'을 쓰는 방식이 아니었다고 한다. 각 부족을 지칭하는 호칭은 있었어도 이것이 이름과 결합한 현재의 성씨와 같은 용도였는지는 불분명하다.

현대에는 유교적 관점에서 성씨는 바꿀 수 없는 고정된 것이지만 고대의 한 씨족, 부족의 명칭을 바꾸는 것이 지금 보다 자유롭지 않았을까 싶다. 부여씨, 여씨, 해씨가 지칭하는 부족이 같은 집단일 수도 있고(주몽이 성이 해씨였고 고구려의 왕의 이름이 해씨였으므로 부여왕도 해씨였을 수 있다는 주장) 성을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거기다 우리는 대부분 왕들이 직계로 후손을 물려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신라의 초기 왕위가 석, 박, 김 세 성씨에게 교대로 물려진 것으로 보아 왕위의 장자 상속이 정착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음이 분명하다.

주몽은 자신의 성을 '고'라 했지만 유리왕의 성은 '해'씨란 기록이 있다. 백제에도 '해'씨가 있다. 그들이 부여씨였거나 어라하 자리에 오른 사람을 부여씨로 칭했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의 유명한 유물 중에 사택지적비란게 있다. 사택 지적은 백제의 대성팔족(귀족이 된 8개의 성) 중 하나인 사택씨의 인물로 의자왕 때 대좌평을 지냈다고 한다. '사택 지적(砂宅智積)'이란 독특한 이름처럼 대성 팔족의 성씨는 당시의 고대어를 한자로 표기했기에 두 글자인 것들이 많았다. 사택씨는 '사탁'씨 도는 '사'씨로 목협씨는 '목라'씨 또는 '목'씨 등으로 동일하게 사용된다.

드라마의 전체 맥락을 잇자면 앞뒤가 맞아야하기 때문에 몇가지 가능성 중에 한가지를 선택해야한다. 부여씨가 당시 고유의 성씨로 정착했는 지도 의문이지만 '어라하'나 '아바지' 등의 어휘를 강조하는 드라마에서 이름을 구분하기 위해 성명을 쓰긴 하지만 정확한 용례는 알 수 없으니 복성(두글자 성)이 아닌 중국식 단성을 썼을 수도 있다. '부여씨'를 '부씨'로 줄여 설정한 것일 수도 있다.

당시의 세계를 드라마 속에 고스란히 구성하는 것이니 백제의 고대 환경과 부족 관계를 살리다 보면 몇가지 원칙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근초고왕'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초고왕'을 닮았다란 뜻인지 아니면 다른 고대어를 차용한 것인지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제작자의 해명이 논란을 줄이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미지 출처, 참고기사:

* 오해가 있을까봐 추가합니다. 제작진은 왜 부여구가 여구인지 그러니까 부여씨가 여씨인지 부씨인지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만 사서 등에 부여씨를 '여'로 줄여 표기한 것같고 부여씨가 여씨로 성을 바꾸었단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작가 이문열은 그 형태를 채택했다구 하구요. 정설인지 아닌지는 모른단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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