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근초고왕

근초고왕, 계왕은 왜 실패한 왕일까

Shain 2011. 1. 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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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느끼는 거지만 사극의 '왜곡 시비'는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KBS 근초고왕'의 주인공 반이상이 가상의 인물이고 실제 삼국사기에 기록된 인물일지라도 그들의 드라마틱한 갈등 모두가 허구이지만 '실제' 진승, 해건, 부여화란 인물이 있는 지 없는지 백제 계왕의 실제 이름이 부여준인지 부여화를 고구려에 시집보낸 '사실'이 있는 지 검색해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삼국사기'에 '계왕(契王)'은 단 두줄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서왕의 맏아들로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우며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 했다고 합니다. 원래 분서왕(汾西王)의 뒤를 이어야 했지만 비류왕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비류왕이 즉위 41년 만에 죽자 백제 제 12대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당시 백제가 드라마처럼 계왕이 '위례궁주'로서 왕권을 다시 뺐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 길 없지만 백제의 세력이 갈라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초고왕계를 주장하는 비류왕 자손들과 분서왕 즉 고이왕계를 주장하는 자손들이 대립하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죠. 해씨 해소술은 비류왕에게 시집보내고 해여울은 계왕에게 시집보냈다는 설정은 그런면에서 그럴듯합니다.

고대의 왕들 중 '성공한' 인물들은 대부분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왕들입니다. 그만큼 왕권과 정권이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고 정쟁이 적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면 때문에 부족국가였던 백제 초기 기록이 '장자 상속'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옆 나라 신라는 지금도 잘 파악되지 않는 상속 형태를 보여줬다고 하지요(사위 상속도 있습니다).

하여튼 그런면에서 계왕, 분서왕, 비류왕 등은 '장자 상속'에 실패한 왕들입니다.



계왕은 대방땅을 고구려에 넘기려 하는가

극중 계왕 부여준(한진희)는 부여화(김지수)를 고구려왕 사유(이종원)와 혼인시키고 백제 어라하 등극에 도움을 받기로 약속합니다. 다른 조건 중 하나는 백제의 대방땅을 고구려에 넘겨주고 백제의 국경선을 남쪽으로 물리는 것이었죠. 근초고왕(부여구)을 지지하는 진고도(김형일) 장군은 고구려의 침략을 우려해 진씨를 도우러 한성으로 가지 못합니다.

고구려 국상 조불(김응수)의 방문으로 고구려왕과의 약속이 남당에 공개되고 백제 귀족들은 반발합니다. 계왕의 편이었으나 대방 부근의 땅을 하사받기로 한 귀족들 역시 반기를 듭니다. 남당에서 직위를 잃었던 진씨들 역시 남당으로 출두해 비류왕의 업적을 없앨 참이냐며 항의합니다. 부여찬 역시 아버지의 땅이라며 반대합니다. 계왕은 고구려가 원래 한민족이라며 넘겨줘야한다 설득하지만 영토를 잃는다는데 환영할 사람은 없습니다.


계왕은 설정이 아니라도 대방과 낙랑땅 등 북방 정벌의 뜻이 없을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사반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고이왕(古爾王), 그 고이왕은 백제의 기반을 세워놓은 입니다. 좌평 등의 16품의 관직체계를 정비했고 왕과 귀족의 의복색도 정해줍니다. 강화된 왕권으로 낙랑, 말갈과 충돌하고 북방에 진출하기도 하는 진취적인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책계왕(責稽王)은 대방군 태수의 딸 보과와 결혼했고 고구려에 맞서 장인인 대방을 편들기도 했지만 한나라군과 맥인에 맞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분서왕 역시 뒤를 이어 한나라군과 맞서다 낙랑이 보낸 자객에 죽고 맙니다. 책계왕이 즉위 13년 만에 죽고 분서왕이 즉위 7년 만에 죽고 전쟁 때문에 나라를 자주 비우니 국내 지지 기반이 약해지는 건 당연하겠죠.

비류왕에게 왕위를 빼았겼다 41년만에 등극한 계왕이 그들의 직계인 이상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왕권 강화에 실패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설정은 비류왕과 고구려 미천왕이 대방을 점령했지만 계왕이 그 땅을 고구려에 돌려주려 생각할 만큼 계왕에게 백제가 절실했다는 뜻이 되겠죠.



41년의 기다림, 짧은 권력

극중 비류왕(윤승원)의 제 1왕후였던 해소술(최명길)은 부여찬(이종수)을 태자로 만들려 부여준과 결혼까지 받아들인 상태입니다. 아들 부여휘(이병옥)의 반대, 그리고 자신의 사촌 여동생 해여울[각주:1]이 계왕과 40년 부부관계였음에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첫째부인 자리를 꿰어찹니다. 계왕은 비류왕에게 빼았겼던 정혼자를 취한다기 보다 비류왕의 세력을 조율하기 위해 해소술을 받아들입니다.

계왕은 결국 해소술쪽 사람들에게도 해여울 쪽 사람들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아들 부여민(안신우)을 비롯한 부여문(황동주) 역시 조강지처 어머니를 멀리하는 아버지를 불신합니다. 어라하의 자리는 반대파를 모두 감싸안아 권력을 누리는 자리인데 진씨 일가에게 등을 돌린 마당에 해씨들까지 계왕의 마음을 떠나게 생겼습니다.

더군다나 비류왕의 정식 후계자라 주장하는 부여구가 살아 있는한 귀족들은 계왕과 부여구를 두고 저울질할 것이 분명합니다. 계왕은 자신의 평생 원수이자 부여구의 지지자인 흑강공 사훌(서인석) 마저 마음대로 죽일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 부여휘와 부여찬은 어찌되었던 흑강공의 친손자이기 때문입니다.


대외적인 강경함까지 포기하고 차지한 백제의 왕위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습니다. 태자는 죽기전까지 정하지 않겠노라 엄포를 놓아보지만 그런 계왕의 태도는 오히려 부여민과 부여찬과의 암투를 자극할 것이 분명합니다. 2년 뒤 계왕이 죽으면 부여구는 내정 분란으로 초토화된 한성왕궁을 차지하러 돌아오겠지요.

분서왕이 죽고 계왕이 너무 어리다는 핑계로 비류왕이 왕위를 차지했다면 계왕이 어라하의 위에 오른 나이는 50세 전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생을 기다려 오른 왕위에서 2년 만에 사망한 것(삼국사기엔 단순히 죽었다고만 적혀 있습니다), 그것도 비류왕의 장자가 아닌 차남에게 이어진 점은 당시 백제 왕실의 권력 관계가 역동적이었으리란 짐작이 가능하게 합니다. 불안정한 상황을 보아 독살설 역시 가능한 설정이란 이야기죠.

  1. 예전까지 계왕의 첫번째 부인, 소해비라고 표기했는데 해소술과 같은 해씨이다 보니 '해여울'이란 이름을 따로 주었더군요. '해비'라고 호칭하면 두 사람 모두 해비가 되니까요. 해녕의 누이 역할인 듯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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