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나무, '무한알티'되는 한글의 저력 밀본을 이기는 힘

Shain 2011. 12. 2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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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마지막회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여운이 남는 결말'이라면서도 창작된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는 '피바다'에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문해주신 이웃 블로거들 중에도 소이(신세경)을 죽이면 작가 테러하겠다고 하던 분이 계신데 이 독한 여자 소이가 세종(한석규)에게 직접 해례를 전하지 않고 죽어가는 몸으로 속치마에 해례를 적더군요. 세종실록 기록에 정인지가 적은 해례 서문이 적혀 있길래 내심 소이 만은 살아 세종이 있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했는데 소이 머리 속에 들어 있던 해례는 똘복(장혁)이 받아 세종에게 전해줬습니다. 그것도 목숨 걸고 개파이(김성현)와 칼부림을 하면서 말입니다.

김영현 작가와 박상연 작가의 드라마를 처음 시청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건 버리기 힘든 습관인가 봅니다. '선덕여왕'에서 비담(김남길)이 많은 오해와 눈물 속에 덕만(이요원)을 향해 전진하다 피투성이로 죽음을 맞았고 여왕으로서 임무를 마친 선덕여왕도 병으로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여왕의 라이벌이자 비담의 어머니 역으로 등장한 미실(고현정)도 실패한 반란 때문에 자결했었죠. 드라마 '로열패밀리'의 결말은 그나마 주인공들을 죽이지 않고 실종된 것으로 처리했지만 '김박' 두 작가의 작품에서 감히 넘기 힘든 거대한 힘과 싸우던 주인공들은 대부분 힘이 소진되어(?) 죽습니다.

모두 죽어버린 주인공,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세종의 마지막.

'뿌리깊은 나무'의 주인공 세종 이도가 마지막회에서 죽지 않은 건 역사 속 인물인 덕택이겠죠. 그러나 세종 이도 역시 한글 반포 4년 후엔 지병으로 사망하고, 성삼문(현우), 박팽년(김기범)같은 인물들도 한명회(조희봉)와 수양대군의 반란 덕에 목숨을 잃으니 역사 자체가 비극이긴 비극이네요. 드라마는 정기준(윤제문)과 함께 사그라든 밀본의 힘이 심종수(한상진)로 인해 활활 타오르지는 않아도 두고두고 조선 왕조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재상총재제를 꿈꾸던 정기준의 뜻을 이어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부추켜 왕위를 찬탈하게 하고 그 권력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과거 80년대에는 악을 징벌하고 선을 추구하는 드라마들이 답답하다고 했었는데 '뿌리깊은 나무'처럼 옳은 일을 추구해도 죽어야 하고 옳치 못해 보이는 일을 해도 살아남아 뿌리를 잇는, 이런 구도는 너무나 현실적이지만 가슴 한켠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극중 세종의 말처럼 '생각이 다르다고 죽이지는 않는다'는 가치관에는 동의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위해 살인까지 불사하는 특정 세력이 현대에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극중 '한명회'는 끝까지 살아남아 현대까지 이어진 삐뚤어진 사대부들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청계천으로 숨어든 밀본 만큼이나 분통터지는 일입니다.




세종이 만든 한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김박 작가의 드라마에는 대부분 대립되는 두 세력이 존재합니다. 두 세력은 보수와 진보,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 때로는 권력자와 지배받는 자로 분리됩니다. 둘은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이나 취향이 극명하게 다른 인물들입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준과 세종은 똑같은 정도전의 글을 읽고 유학이념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세종이 애민하고 목민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 '문자'인 반면 정기준이 생각해낸 방법은 왕의 권력을 조율할 재상총재제였습니다. 같은 이론을 읽었지만 세종이 백성의 입장에서 이로운 것을 따졌다면 정기준은 사대부의 입장에서 가치를 따진 것입니다.

세종과 대등하게 대립해야할 안티 히어로인 정기준의 한계는 바로 그 부분 때문입니다. 본래 정기준은 가리온이라 불리던 반촌 백정으로 양반네가 체통 때문에 감히 하지 못하는 해부학 공부도 대신하고 누구 보다 고기를 잘 다루는 잡학 전문가였습니다. 죽어도 의학같은 잡스러운 학문에는 종사하지 않던 사대부가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백성 사이로 숨어들었는데 그는 24년 동안 백정으로 살았음에도 백성 입장에서 세종 이도의 정책을 판단하지 않고 여전히 사대부의 왕으로서 세종을 판단하고자합니다. 백성의 긍정적인 힘도 무지하고 어리석은 약점도 동시에 느꼈을 그가 세종과 다른 관점을 가진 것입니다.

정기준이 끝끝내 막고자 했던 반포식, 한글은 이미 유포되고.

물론 백성이 늘 바른 판단을 하고 올바른 행동을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기준의 우려처럼 학문을 갈고 닦지 않은 백성들은 때로 의견을 내놓을 자격도 없는, 어리석은 존재처럼 행동합니다. 윗전들이 자신을 긍휼히 여기길 바라고 미래에 대한 꿈도 포기합니다. 정기준이 그나마 '로열 패밀리'의 공순호같은 인물과 달랐던 건 그런 백성들을 혐오하거나 '원래부터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정도입니다. 정윤함에서 세종을 보호하는 강채윤을 보며 '핏줄이 천해서' 어쩔 수 없다고 자극적인 말을 내뱉긴 해도 그는 어리석은 백성을 대신해 사대부가 곧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분명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처음엔 백성들을 위한 훌륭한 도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자를 익혀 벼슬길에 나서던 양반들이 한글을 천시하자 백성들 스스로도 한글을 '언문'이라며 경시하는 풍조가 생기고 양반네들이 수만자의 한자를 익혀 벼슬길에 나서는게 당연하다고 여기니 한글은 있으나 마나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산이나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백성'이란 말이 와닿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지혜의 도구 한글이 그릇된 지배층들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속이는데 이용당할 것이란 정기준의 염려는 현대사회를 생각해보면 맞는 말입니다.

한글로 욕도 하고 낙서도 하고 이름없이 피는 꽃처럼 살아남는 백성들.

과연 누구에게 권력을 쥐어줄 것인가. 현대 사회도 그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합니다. 아직까지도 정치권을 바라보며 정치의 '성인(聖人)'이 나타나 국민을 바로 이끌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 국민은 여론의 향방이나 정치권의 바른 미래를 따지기 보다 감정적으로 휩쓸려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혹은 이 정책이 백성을 위한 것인지 일부 이익집단을 위한 것인지 따져보지 않고 찬성하기도 합니다. 과거와 다르게 문자를 가진,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백성이 되었지만 '대중'의 속성은 본디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종은 그 문제에 '괜찮다'라고 대답합니다. 때로는 권력자들에게 지고 이용당하고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영원히 이 땅에 살아남을 자들은 왕조도 권력자들도 아닌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힘과 선택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싸우면 된다'고 답하는 세종의 믿음을 어떤 의미에서는 백성들이 지켜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널리 퍼트리지 않으면 부스럼이 난다는 미신 때문이었지만 어린아이 연두(정다빈)의 가르침에 따라 한글을 배우고 쓰는 백성들의 힘은 밟고 또 밟아도 다시 꽃을 피우는 '노란 꽃', 잡초같은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공존하는 밀본, 그들을 대처하는 방법은?

정치권이 암울할 때도 사람들은 SNS와 인터넷, 블로그를 보며 희망을 찾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널리 알아야할 소식이 있으면 손품을 팔아 그 내용을 '무한알티'하는 트위터 유저들의 힘, 짧은 글이언정 의견을 나누며 폭넓게 공감하는 그들의 파도타기는 한글이 퍼져나가는 모습 만큼이나 감동적일 때가 많습니다.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만들었던 세종, 그 왕이 겪었을 가상의 괴로움을 극화한 '뿌리깊은 나무', 세종의 반포식과 함께 창작된 존재들도 한바탕 꿈을 꾼듯 모두 사라졌지만 대중에게 '한글'이란 문명의 권력이 이양되는 그 과정이 처절했다는 점, 그 부분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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