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나무, 대혼란의 마무리는 세종을 위한 최고의 찬사 용비어천가

Shain 2011. 12. 1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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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 과정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비밀과 비밀 결사 조직 '밀본'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극중 소이(신세경)는 어린 시절의 충격으로 함묵증을 앓아 세종 이도(한석규)에게 한글 창제의 동기를 부여한 백성이자 한번 본 그림과 문자는 모두 외울 수 있고, 한글 창제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천재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마치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밀레니엄'의 리스베트처럼 아스퍼거 증후군에 걸린 천재가 연상되는 여성이고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성배'는 사실 술잔같은 물건이 아니라 '여성'이었다는 비밀처럼 한글 해례 그 자체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집현전 학자 장성수(류승수)가 죽고 그가 남긴 팔사파 문자가 적힌 책을 소이가 읽고 후 모두 찢어버리는 장면에서 소이의 역할이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라는 걸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해례가 소이 머리 속에 있다'는 대사도 있었구요. 소이는 세종이 한자를 소리에 따라 분류하는 과정에서 컴퓨터같은 기억력으로 한자를 적어냅니다. 그녀는 한글 프로젝트의 실질적 총책임자라 해도 좋은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분석하고 찾아온 자료를 소이는 단 한순간에 읽고 기억해낼 수 있으니 위험하게 해례를 서책으로 전달하는 것 보다 소이 본인을 궁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신하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고 밀본을 포용한다 선언한 세종.

밀본의 정기준(윤기문)이 광평대군(서영준)을 죽여서라도 한글 반포를 막겠다 마음먹고, 한글 반포를 앞두고 위기에 처한 세종이 조말생(이재용)과 협조해 궁녀를 내보내고 한글부터 널리 알리겠다 결심한 것은 이 드라마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어제 방영된 21화를 기준으로 단 세 편의 방영분을 남겨두었을 뿐입니다. 어떻게든 1446년 한글이 정상적인 절차로 거쳐 반포되기 직전까지 산재한 문제들을 마무리하고 집현전 학자들의 뜻을 모아 서적 간행을 진행해야 하는 시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밀본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기 위해 광평의 죽음까지 없던 일로 하고 밀본임을 밝혀도 등용하고 살려주겠노라 선언한 세종의 계책으로 직제학 심종수(한상진)와 우의정 이신적(안석환)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역병처럼 퍼질 한글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심종수와 이신적은 왕자까지 죽여 한글을 막으려는 정기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밀본들은 각자 파가 나뉘어 궁녀 사인방과 해례를 뒤쫓게 됩니다. 정기준은 윤평(이수혁)을 시켜 이신적은 명나라의 견적희(윤이나)를 앞세우고 심종수는 직접 궁녀들을 따라갑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를 위한 용비어천가

밀본의 눈을 피해 멀리 떠난 궁녀들이 백성들의 무속신앙을 이용해 부적처럼 한글 교본을 제작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퍼트리는 동안 밀본의 분열이 일어나 강채윤과 무사들의 대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청자들 궁금하게 했던 조선제일검 이방지(우현)과 북방의 전설 개파이(김성현)의 대결은 우방지의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윤평과 강채윤이 맞붙게 될 지 개파이와 강채윤이 맞서게 될 지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거기에 조선 제일검이라는 무휼(조진웅)과 그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 심종수까지 가세한다면 누군가 하나 명을 달리할 수도 있겠죠.

지금 궁금한 건 밀본 내 세력 다툼에 휘말려 죽게될 사람이 누구냐 하는 부분입니다. 정기준을 지키던 윤평과 개파이가 강채윤이나 무휼, 심종수와의 대결하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같고 그들 중 누군가 마음을 돌려 세종의 편으로 돌아선다면 예측불허의 상황이 되고 맙니다. 사대부로서 밀본의 대의를 좇던 심종수가 밀본을 지키기 위해 정기준을 배신하기로 마음먹고, 이기적인 권력자 이신적과도 등을 돌린 건 확실한 상황이고 궁녀들의 뒤를 쫓아 강채윤이나 세종을 돕는 인물이 될 것이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어긋날 것이냐 하는 문제만 남았습니다.

부적이라며 뿌린 것은 한글 자모음이 들어 있는 한글 학습 교본.

'선덕여왕'을 비롯한 김영현 작가의 작품에서는 유독 죽는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 운명을 달리한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라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종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정기준이 '선덕여왕'의 미실처럼 자결하게 될 수도 있고 밀본과의 접전 끝에 누군가 희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세종이 광평대군의 죽음을 등에 업고 대의를 추구했듯 또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오늘밤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상이 지배적이더군요.

세종은 당대 그 어떤 학자 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로 스스로 우월감에 빠져 사대부들의 엘리트주의에 동참할 수도 있는 인물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엘리트들이 비싼 사교육을 통해 명문대학을 가거나 유학을 다녀와 정재계의 요직을 차지하듯 오만이 넘는 한자를 공부해 조정에 등용되는 당시의 반상제(양천제였으나 실질적으론 양반만이 등용)의 문제점을 모른척할 수도 있었지만 백성을 위한 문자를 만들고 그들의 삶에 유용한 학문을 개발한, 민주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를 둘러싼 이들의 갈등, 그 결과는?

드라마 초반에서 밀본은 자신들이 진정한 조선의 '뿌리'이며 왕은 화려하게 피어난 '꽃'일 뿐이라고 폄하한 적이 있지만 드라마 속 밀본들은 '뿌리'로서 해야할 일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보다 왕의 비밀 업무를 방해하고 암살자로 활약하는 살인집단에 불과했습니다. 어린 세종을 비웃으며 단지 이방원(백윤식)의 아들이란 이유로 왕위에 오른 왕족 쯤으로 치부하던 정기준은 백정 가리온으로 살며 정체를 숨기고 세종을 저지하기에 급급했을 뿐 세종을 자신들의 뜻으로 꺾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사대부들로 구성된 밀본의 정체성은 정기준 조차 불만족스러워합니다. 이신적과 혜강(권성덕)이 밀본지서를 요구했던 이유는 밀본지서에 그들이 정도전과 함께 한다는 연판장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밀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가 굳이 정기준에게 동참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눈 앞의 이익 만을 위해 대의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그들이 두고두고 칭송받을 왕의 업적을 방해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이제 와 밀본이 '조선의 뿌리'임을 자처하기는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세종에게 진정한 조선의 뿌리를 누구인가

훈민정음으로 지은 최초의 한글 서적 '용비어천가'. 그 내용은 조선의 개국을 찬양하는 내용이기에 이성계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많습니다만 마지막 부분은 어렵게 만든 나라를 그르치지 말고 정치를 잘 하라 당부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굳이 '훈민정음'으로 조선의 개국을 노래하려 했던 세종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드라마 속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자면 국가의 뿌리인 이념과 제도를 확립하고자 대립했던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보아도 될 듯 합니다. '용비어천가' 2장의 첫부분이 이 드라마의 제목인 '뿌리깊은 나무'가 나오는 구절입니다.

'불휘 기픈 남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라매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뿌리깊은 나무는 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꽃이 좋고 열매도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고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 극중 태종 이방원(백윤식)이 건국되지 몇십년 되지 않은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며 세종에게 나라를 맡긴 것은 국가의 '뿌리'를 튼튼히 하라는 말이었고 '용비어천가'는 그런 세종을 위한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우리가 찾아야할 진정한 '뿌리'는 누구였을까요. 그 해답을 얻을 시간이 다가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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