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주인공도 '방귀남(유준상)'이지만 드라마 '내일이 오면'의 보배보쌈 바깥양반 이름도 이귀남(임현식)입니다. 이귀남은 어릴 때부터 귀하게 커서 끼니 때마다 새 밥과 국을 달라 요구하는 옛날 사람인데 겉으로는 그렇게 굴어도 속으로는 아내를 끔찍히 위하는 타입의 남자입니다. 아내 김보배(이혜숙)는 그런 남편 때문에 젊을 때부터 일하느냐 5남매 건사하느냐 고생했고 이제서야 보쌈집을 차려 좀 살만해졌다 싶은 상태죠. 장사에는 재주가 없는 귀남에게 성실한 김보배는 둘도 없는 짝입니다.
큰 아들 진규(박수영)와 둘째 성룡(인교진)은 사귀는 사람이 없지만 둘째 영균(하석진)은 은채(서우)와 막내 지미(유리아)는 지호(정민)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셋째 일봉(이규한)은 보배 보쌈에서 일하는 현숙(서유정)과 술김에 키스 사건이 있었지만 감정을 정리하기로 약속하고 서인호(최종환) 교수의 딸 서유진(박세영)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늘 바쁜 서인호 교수는 이혼한 후 자주 볼 수 없는 유진이 미국에서 오자 일봉에게 돌봐달라 부탁했는데 순수하고 아름다운 유진이 일봉의 눈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영균과 은채의 사랑도 한때 어려움이 있었지만 두 사람의 열정은 양가 부모에게 결국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헛된 꿈에 빠져 이룬 것 하나 없는 일봉이 미성년자인 유진과의 교제를 허락받으려면 훨씬 더 힘든 시련을 감내해야할 지도 모릅니다. 의외로 쿨하고 판단력이 뛰어난 서인호 교수와 달리 유진의 친어머니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고 힘든 타입이라고 합니다. 보잘것없는 스펙의 일봉의 상황이나 나이차이를 달갑게 여길리 없습니다. 무엇 보다 당장 직업 조차 불안정한 일봉입니다.
현숙은 일봉과 누나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했어도 마음 한켠에 일봉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술김에 키스라지만 평소에 호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현숙의 나이는 서른 셋, 조카 다정이를 키우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느냐 이성 교제도 결혼도 신경쓰지 못하고 이제는 영락없이 노처녀라 불리며 주인 아주머니 보배까지 재취 자리에 선을 보라 합니다. 유일하게 잘해주던 일봉의 관심이 다른 여자에게 향했다는게 서운하고 미련을 끊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현숙의 사랑은 이렇게 외사랑으로 끝나고 말아야하는 걸까요.
어째서 일봉과 유진의 사랑이 더욱 아름다운걸까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일봉과 유진의 사랑이 단연 화제입니다. 이 드라마의 메인 커플인 서인호, 손정인(고두심)의 잔잔한 삼각관계나 고두심의 노련한 연기도 눈길을 끌지만 백수나 다름없던 일봉이 부잣집 딸인 유진과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은 청춘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대신 이 커플에 대한 비난도 만만치 않습니다. 현숙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 무책임하게 다른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일봉의 가벼움이 싫다는 사람도 있고 무조건 부잣집 딸만 귀하게 여기는 일봉의 태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반면 이미 끝난 일봉과의 관계에 현숙이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봉과 유진의 사랑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일단 나이많고 칙칙한 현숙과의 사랑 보다 유진과 일봉의 '그림'이 아름답고 멋지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진이 상대방의 처지나 지위에 개의치 않고 맹목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둘의 애절함이 더욱 실감난다는 점입니다. 현실적인 현숙과의 로맨스 보다 흔히 시청하는 멜로물 속의 사랑처럼 현실을 극복한 사랑이라 평가하는 의견도 있는 것같습니다. 동시에 지지리 궁상 현숙과 티격태격하는 거 보다 보기 좋다는 의견도 있는 듯합니다.
사실 이규한이 연기하는 '일봉'의 캐릭터 자체가 상당히 얄미운 역할입니다. 사업한답시고 집안의 돈을 모두 날린 아들, 셋째 아들 영균은 일봉 때문에 아직까지 월급을 차압당한 상태고 예비 며느리 은채는 차를 사라며 아버지 윤원섭(길용우)가 준 현금을 일봉에게 고스란히 넘겨줘야 했습니다. 스물아홉 나이가 되도록 착실하게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고 돈빌린 사채업자나 선배들이 늘 갚으라 아우성입니다. 직업도 경력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데 자존심은 강해서 영균이 은채네 집에서 무시당한다고 하니까 대뜸 주먹부터 휘두르는, 대책없는 인물입니다.
어머니 보배는 일봉이 태어났을 때 형편이 너무 어려워 다른 집에 양자를 주려했다며 일봉이 성룡 만큼이나 아픈 손가락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늘 대박나는 꿈만 꾸는 일봉에게 '유진'은 걸어다니는 로또입니다. 엄밀히 말해 감당하기 힘든 벅찬 연인이고 그것은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현숙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숙은 다른 보쌈집을 차려도 좋을 만큼 충분히 돈도 모았으니 혼자서 사장이 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합니다. 일봉에게는 유진 만큼이나 과분한 상대인 셈입니다. 꿈만 꾸고 살아온 '맨발의 청춘' 일봉에겐 둘 다 복권같은 여자들이죠.
일봉과 유진의 사랑은 순수하고 현숙과 일봉의 사랑은 천하다는 관점 자체가 상당히 불쾌한 면이 있는데다 현숙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잘난 여자는 아니지만 최소한 비난받거나 욕먹을 타입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 논란 자체가 엉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양아치'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일봉은 안티도 상당히 많은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은채네 집 앞에서 정민을 때리고 그냥 도망가버릴 땐 속시원하다기 보다 답답하고 짜증나는 감정이 느껴졌던게 사실이고 현숙의 통장을 훔칠까 말까 망설일 때도 얄밉다 못해 쥐어박고 싶었던 역할이 일봉이었죠.
일봉과 유진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봉은 이제서야 월급쟁이 생활을 처음 시작했기에 자신이 까먹은 사업자금을 모으려 가족들이 얼마나 오래 참고 노력했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현숙이 평생 부르튼 손으로 모은 통장의 금액이 현숙의 인생 전부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린 유진에게 '아저씨'라고 불리고 있고 세상물정에 빠삭하다고 자부하지만 성실하게 산다는 의미를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유진 역시 힘든 가족관계 때문에 마음 고생은 했어도 돈을 벌고 생활을 꾸린다는 진짜 의미를 모르는 아이입니다. 일봉이나 유진 모두 사랑을 로맨틱하게 묘사하기엔 현실과의 갭이 너무 큽니다. 무엇 보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아이라 일봉에 대한 마음이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두 커플의 두근거림을 마냥 좋게 볼 수만은 없는, 일봉의 성격이 있죠. 부잣집 딸 만나서 잘 살아보겠다고 하던 그의 진심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작가가 일봉과 유진의 사랑을 '불발한 순수한 사랑'으로 그릴지 그것도 아니면 미성숙한 남녀 사이의 감정으로 묘사할 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확실한 건 둘을 묘사하기 위해 현숙을 천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실제 배우의 나이까지 들먹이며 극중 일봉과 현숙이 맺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는 모양인데 배우 이규한씨를 위해서도 그런식의 안티는 있어서는 안되는 거겠죠. 유진이 순수하고 아름답다면 현숙 역시 아름답고 존중받을 사랑을 하고 있다는 점 강하게 어필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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