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미아가 된 아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해 아차 실수로 잃어버린 아이가 미국에 입양되는 경우가 없잖아 발생하곤 했습니다. 6.25 전쟁 이후 꾸준히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발생했지만 70, 80년대는 꼼꼼한 기록이나 사회적 관심을 바랄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부모찾기에 유전자 검사가 이용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죠. 차라리 아이가 죽으면 가슴에 묻고 그리워하면 그만인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이는 영원히 부모의 한이 됩니다. '자식잃은 죄인'이 되어 평생 동안 아이 때문에 속앓이 하는 부모의 심정, 정말 당하지 않으면 모를 겁니다.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갑작스레 나타난 시댁 때문에 고부 갈등을 겪게 되는 한 억척 며느리 차윤희(김남주)의 이야기입니다만 삼십여년을 잃어버린 아들 찾기에 매진한 부모 방장수(장용)와 엄청애(윤여정)의 사연은 코믹하게 보아넘길 수가 없는 장면입니다. 앞집에 살던 그 젊은이가 잃어버린 내 아들이었음을 알고 평생 가슴에 숨겨둔 사진을 꺼내 보며 확인시키던 아버지 장수의 눈물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게 합니다.
한편으론 지금까지 드라마를 시청한 사람들이라면 그들 가족의 생이별에 특정인물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이 귀남(유준상)을 버리지 않았다면 엄청애나 방장수의 가슴이 아플 일도 없었고 막례(강부자)가 둘째 손녀 이숙(조윤희)의 생일상을 차리지 말라며 트집잡을 일도 없었습니다. 대가족의 할머니 막례의 둘째 며느리 장양실(나영희)은 가짜 귀남이 나타났을 때도 금방 가짜라는 걸 알아보았고 귀남이 잃어버린 지갑에서 귀남의 어린 시절 사진을 꺼내 찢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고분고분해 보이는 장양실에겐 테리강이 미아가 되도록 방치한 혐의가 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해 큰 동서의 아들을 버렸다?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양실의 행동이 석연치 않기도 하지만 70, 80년대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그 말이 맞는 것같기도 합니다. 어르신들은 결혼을 했으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한다고 했고 아들낳지 못하는 건 소박맞아 당연하다며 공공연히 며느리를 압박하던 시절이니 몇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생겼다면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양실은 어쩌다 천륜을 끊을 무서운 짓을 하게 된 걸까요. 그 사연이 궁금해지는 시점입니다.
결혼하면 왜 비이성적인 일들이 일어날까
한 여자에게 결혼은 남자보다 좀 더 다양한 의미가 있는 것같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도 '결혼'은 여자에게 복잡한 의미를 지닌 제도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않는대로 사회부적응자 취급을 하지만 결혼을 한 여자는 존중해주기는 커녕 아줌마라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 인생을 놓고 봤을 땐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도 결혼하면 누군가의 남편이자 며느리, 어머니인 부수적인 존재가 되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장양실처럼 자식도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에게 들락거리는 며느리는 피한방울 안 섞인 남인데 어떻게 버티고 있는걸까요.
장양실의 남편 방정훈은 지난주에 단 한번 등장했습니다. 아내인 장양실이 다정하게 말을 붙여도 제대로 대답하는 법이 없고 어머니 막례에게 인사가자고 해도 바쁘다며 화를 낼 뿐입니다. 잘 보니 그동안 장양실이 시어머니에게 잘해준 건 딱히 애정이 있다기 보단 시어머니 핑계로 남편을 잡아두고 싶었던 것같습니다. 남편이 없는 것 보다 낫지 않냐며 며느리를 위로하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전부터 남편과 장양실은 데면데면한 사이였습니다. 남편이 양실을 그리 사랑하지 않으니 아내로서의 위치가 흔들리고 그래서 더욱 시어머니에게 집착하는 듯 합니다.
지금이야 부부가 맞지 않으면 이혼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지만 과거에는 여자에게 이혼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옛날 말로 '소박'은 '출가외인'을 교육받은 며느리들에겐 가장 두려운 일 중 하나였습니다. 소박맞은 딸은 친정에서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현대에는 남편의 사랑을 잃는 것이야 말로 가장 슬픈 일이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까운 70, 80년대만 해도 이혼하면 의지할 곳없는 여성들은 남편과는 형식적인 부부면서도 시댁의 인정을 받으려 필사적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 중 하나가 그 시대의 맹목적인 '아들낳기'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의 남아선호사상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습니다. 아들을 위해 줄줄이 딸을 낳으면서도 출산을 포기하지 않고 심하면 태아 감별을 통해 아들이 아니면 유산시키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아들 하나 낳으려고 임신한 아이를 지우다니 무서운 일이죠. 그 시대 며느리들은 한 집안의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낼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라기엔 지나치게 아들에 집착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필사적으로 아들을 낳으려는 심리엔 가족 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단 뜻입니다.
아들 때문에 순간적으로 눈이 획 돌아 남의 집 아이를 유괴했다거나 첩을 들이라는 시댁의 요구에 순응했다는 며느리,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당했다는 이야기는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양자를 들이라는 종친들의 압력으로 반갑지 않은 먼 친척을 아들로 입양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모은 재산을 피도 별로 섞이지 않은 양자에게 물려주려니 속이 타는데 딸에겐 권리가 없다고 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귀남(유준상)의 작은 엄마, 장양실이 귀남을 버린 비이성적인 행동은 그런 맥락에서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결혼하고 남편이 딴살림을 차려 이혼을 요구하거나 일에 미쳐 아내를 돌보지 않는 경우 아내는 보통 결혼 생활에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은 죽어도 결혼을 포기할 수 없는데 시어머니는 아이 낳으라 추궁하고 남편은 바람막이가 되어주긴 커녕 남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 하니 아들낳고 대접받는 큰동서가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장양실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런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무서운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요? 귀남이 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장양실은 귀남이 과거를 기억해낼까 무서워 벌벌 떱니다. 분명 처음부터 독한 마음으로 그런 짓을 한 것같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양실이 시집살이의 피해자라거나 이해받을 행동을 했다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이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도 묘사하는 '고부갈등'이나 '시집살이'의 속성이 장양실의 행동처럼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하다는 점이죠. 결혼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인데 종종 결혼 때문에 벌어지는 불행한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성적으론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 현상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표적으로 새언니가 생기자마자 설거지부터 시키려는 극중 막내 시누이 말숙(오연서)의 이상한 행동처럼 말입니다.
30여년을 헤어져 살아온, 그래서 생활 환경은 남이나 다름없는 아들이 아침으로 빵을 먹는다고 한소리할 수 있는 엄청애(윤여정)의 간섭이나 PD 생활을 하는 질부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방송출연부터 결정하는 방정배의 행동, 딸은 이해해도 며느리는 이해 못하는 편견, 입양아가 친부모를 찾았다는 기사엔 잘되었다고 하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잘 해주던 사위에게 친부모가 나타났다고 하자 불편해하는 윤희(김남주)의 어머니 한만희(김영란). 생각해보면 작은 이기심에 휘둘리는, 불합리한 결혼 문화는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장양실의 이해안가고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은 결혼이 여성들에게 가져온 씁쓸한 부작용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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