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넝쿨째 굴러온 당신

넝쿨째굴러온당신, 둘째딸 방이숙 조금 이기적으로 살아도 좋다

Shain 2012. 8. 1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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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시집 보내고 전전긍긍하는 친정부모의 심정을 '딸가진 죄인'이라 합니다. 행여 심보 사나운 시댁을 만나 시집살이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딸가진 부모는 뭐라도 흠이 잡힐까 딸에게 하나라도 더 주고 사위를 어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딸낳은 죄인'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요새도 딸을 낳았다고 며느리잡는 시어머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며느리가 딸을 낳으면 산후조리도 해주지 않고 산모를 홀로 두고 가는 시어머니가 종종 있었습니다. 요즘에야 인터넷에나 올라올 법한 '화제거리' 사연인데 그때는 '아들이 대를 잇는다'는 생각이 많아 시어머니가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고들 했습니다.

한때 제 어머니도 '딸낳은 죄인' 취급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가 우리 며느리는 딸만 낳았다며 푸념하면 잘못한 것도 없는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집안일을 하고 덩달아 저를 비롯한 자매들은 우리 때문에 어머니가 싫은 소리를 듣는거 같아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 장면이 민망해 친척들이 '딸은 살림밑천'이라고 말을 거들면 마흔 넘은 아버지에게 지금이라도 아들 낳으면 '딸년'들이 키우지 않겠냐는 말을 하시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풍경인데 워낙 할머니와 우리의 나이 차이가 크니 세대 간의 간극이 그리 컸나 싶기도 합니다.

방이숙이 처음 사귀게 된 남자 천재용 하필 재벌 아들이라니.

 

아무리 재주많고 공부 잘해봐야 '딸'이라는 말은 평생 남는 상처입니다. 그리고 아들없는 대신 내가 아들 노릇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책임감은 꽤 오랫동안 부담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딸 넷에 아들 하나를 키운 집이 있는데 그 집 큰 딸들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돈을 벌었고 그집 아버지는 그녀들이 벌어온 돈으로 아들 대학 보내고 논밭을 사곤 했습니다. 대를 잇는 건 철없는 막내 아들인지 몰라도 그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들 노릇을 한 건 누가 뭐래도 그집 딸들인데 생각해 보면 자신의 인생까지 포기하고 부모를 봉양한다는 게 어찌 보면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방이숙(조윤희)은 짧은 머리에 털털한 성격으로 못박기. 페인트칠하기 같은 집안일 즉 다른집에서는 남자들이 한다고 여겨졌던 일들 아무렇지 않게 해냅니다. 시집가라 했더니 결혼하지 않고 엄청애(윤여정)와 오래오래 함께 살겠다고 하는 걸 보니 '아들 노릇'하겠다고 작정한 딸인듯 합니다. 본래 선머슴같은 성격의 딸들도 있지만 전막례(강부자)가 귀남(유준상)을 잃어버렸다고 청애를 구박하는 걸 오래 보다 보니 아들처럼 굴기로 마음 먹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성격은 아무래도 재벌 아들 천재용(이희준)과의 사랑에도 장애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 필요가 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의 OST인 'Kissing you'입니다. 데자레(Des'ree)가 부른 그 노래는 애틋한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곡인데 횟집 수족관을 배경으로 말숙(오연서)과 세광(강민혁)이 영화 패러디를 하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긴 하더군요. 말숙과 이숙은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른 자매입니다. 엄청애의 큰딸 일숙(양정아)이나 둘째딸 이숙은 기세등등한 할머니를 보고 자라 그런지 이혼 사실도 부모님들 때문에 말하지 못할 정도로 일단 가족이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걸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반면 말숙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돈이랑 결혼하겠다고 우기면 올케 차윤희(김남주)와 오빠 방귀남도 불편하지만 무엇 보다 힘든 건 자신의 부모 엄청애와 방장수(장용)입니다. 만약 방이숙이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혼자서 펑펑 우는 한이 있어도 속으로 마음을 접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겠지요 그런데 말숙이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갖겠다며 집나가고 노숙하고 잔머리를 굴립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절함 따위는 말숙이처럼 악착같은 딸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OST인지도 모르겠어요. 세광을 만나기전까지도 예쁘고 시집 잘가는게 말숙의 최고 목표였습니다.

이숙과 너무 다른 말숙에겐 자기 인생이 최우선이다.

 

지난주 방이숙이 천재용의 누나들을 만나는 장면은 자못 안쓰러웠습니다. 차라리 천재용과 사랑에 빠진게 말숙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기죽지 않고 무슨 방법을 찾았을텐데 방이숙은 재용이 재벌아들인 줄 몰랐다며 포기 의사를 밝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재용이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가난한 남자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는 환경이 다른 남자라니 '더는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이숙. 그런 이숙을 지켜보는 재용의 마음이 안타까우면서도 이숙이 '가까이 오지말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와닿는 장면이었습니다.

'결혼은 꿈도 꾸지 말고 연애만 하자' 그리고 '외면당하기 싫으면 방이숙이 먼저 차라'는 말로 천재용은 이숙의 부담을 줄여주려 하지만 연애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다'는 말로 거부하기는 했지만 천재용과 사귀자면 변호사이던 규현(강동호)를 사귈 때와는 전혀 다른 괴로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효자동에 건물 한채를 갖고 있는 부모님이 빚이 얼마고 재산이 얼마고 큰언니가 이혼했고 오빠는 30년 동안 잃어버렸다가 최근에 찾게 되었다는 그 가족사를 샅샅이 찾아낸 그 재벌가의 눈초리가 가족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제일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재용에게 더 이상 가까워지지 말자고 하는 방이숙.

 

방이숙의 캐릭터를 제일 처음 봤을 때 특이하게 다가왔던 건 강박에 가까운 그녀의 '바른 생활' 기질입니다. 작가가 여성성을 거부하고 아들 노릇을 하겠다며 털털하게 구는 딸을 캐릭터화한 것도 신기했지만 그녀들이 '건전함'에 대한 모종의 집착을 보이는 것까지 묘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차윤희를 붙들고 쓰레기 분류하는 법을 연설하는가 하면 윤희가 단지 이웃집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천재용과 불륜사이라 생각해 고운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뭐든 건전하고 착실한 그녀의 성격이 가족을 위해 살도록 꽁꽁 묶어버렸습니다. 적극적인 건전함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규칙에 대한 순종과 수동성을 뜻합니다.

규현을 10년 동안이나 좋아했던 그녀가 누가 봐도 감탄할 정도로 예쁘게 차려입고 규현과 동창들이 함께 하는 자리에 나갔을 때 혜수(최윤소)를 보고 물러나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꾸미지 않은 외모로 여성성을 가리고 살아온 만큼 '나는 예쁘지 않다'라는 생각도 자주 했을테고 '내가 여자로서 자격이 있나'는 컴플렉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릴 때는 엄마를 위해 가족을 위해 노력한 것이겠지만 이제는 성격으로 자리잡은 방이숙의 소극성은 새로운 사랑도 불가능하게 할 정도

입니다. 천재용이 자연스럽게 그런 이숙에게 접근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은 어찌 보면 기적입니다.

가끔은 자기 만을 위한 선택을 해도 좋지 않을까.

 

얼마전 방이숙은 할머니와 진심어린 화해를 합니다. 애 잃어버리고 밥이 넘어가냐며 엄청애를 나무라던 전막례, 며느리를 미워하며 원망하던 막례는 귀남을 찾고 장양실(나영희)이 아이를 잃은 당사자란 걸 알게 되고 방이숙에게 사과합니다. 자신의 집착 때문에 평생을 눈치보고 살아온 이숙과 소주를 나눠 마시며 살아있는 동안 네 생일상은 내가 차려주겠노라 말합니다. 삼십평생 눈치보고 살았지만 방이숙에게는 평생의 설움이 풀리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기 생일상 차렸다고 통곡하는 할머니가 그냥 좋기만 했을까요. 이숙은 그러나 그런 미움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천재용이 재벌 아들이란 건 어떻게 보면 평생을 희생하던 그런 이숙이 처음으로 깨야하는 굴레인지도 모릅니다. 가족들이 피해입을까봐 또는 자신의 매력에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 싶은 천재용. 그러나 처음으로 깊은 마음을 나눠본 재용을 놓치지 않아야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착하고 성실하고 순수한게 매력인 곰팅이 이숙이가 용기를 내면 무서운 재벌 누나들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딸로 태어난 죄'를 삼십년 동안 안고 살았던 그녀가 자신을 위해 조금쯤 이기적이 되는 모습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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