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없이 이어지는 검사들의 싸움이 치열하다. 굴지의 재벌이 잡혀가면서 검찰총장이 넘어가나 싶더니 법무부 장관이 받쳐주고 법부무 장관이 휘청하나 싶더니 대검찰청 반부패부장이 구치소에 잡혀간다. 증언하는 사람도 죽고 한때 떵떵거리며 바지사장 노릇하던 검찰총장의 형도 하루 아침에 차디찬 물에 몸을 던진다. 드라마 '펀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박정환(김래원) 검사가 윤지숙(최명길) 장관과 이태준(조재현) 검찰총장을 공격하는 이야기다. 아들의 병역비리를 숨기기 위해 이태준을 개로 부리고 박정환을 압박하던 윤지숙은 결국 국무총리 내정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박정환은 윤지숙 하나를 물먹이기 위해 이태준과 성원각에서 또다시 짜장면을 나눠 먹는다. 일분 일초가 아까운 시간 - 지금까지 윤지숙 하나 잡으려 헛주먹질 한 시간이 얼만데 이태준 때문에 한번 더 허공에 주먹을 날려야할지도 모른다.
박정환은 또다시 이태준과 짜장면을 나눠먹는다. 박정환의 펀치가 자꾸 헛주먹질을 하는 이유는 밥그릇 싸움.
생각해보면 그랬다. 수술 받으러 들어간 사이 이태준이 조강재(박혁권)와 함께 박정환을 모든 비리 사건의 주범으로 밀어넣을 궁리만 하지 않았어도 죽어가는 박정환이 이렇게까지 악을 쓰진 않았을게다. 이태준은 박정환의 아내 하경(김아중)을 이태준의 형 이태섭(이기영) 대신 살인범으로 집어넣으려 했고 정환의 딸 예린(김지영)을 부모없는 아이로 만들려 했다. 그것만 아니면 박정환이 짜장면 나눠먹는 이태준하고 굳이 이렇게까지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박정환에게 딸 예린이는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였다. 부나 명예는 죽으면 없어질 부질없는 것이지만 자식은 그렇지 않다.
윤지숙이 아들이자 판사인 이상영(이중문)의 병역 비리를 덮기 위해 기를 쓰고 이태준이 형의 자식들과 자신의 자식들을 감싸기 위해 기를 쓰고 검사의 도리를 강조하는 정국현(김응수) 차장검사가 미국에 있는 아들 때문에 발목잡히고 조강재가 딸아이 앞에서는 존경받는 검사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박정환은 차마 딸에게만은 손가락질받는 아빠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정환에게는 세탁소집 아들로 태어나 힘들고 어렵게 매달리듯 살아왔던 자신과는 달리 예린이는 이왕이면 곱고 편한 비단길을 갔으면 하는 마음도 한구석에 있었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검찰총장이나 법무부장관이나 법대로 하면 그만이고 정의가 이기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한방의 펀치로 끝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물고 물리는 싸움이 계속 되는 것일까? 나는 이상하게 동정이 가는 악역 이태준을 보며 어쩌면 이 드라마의 재미가 선과 악의 구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드라마는 이제는 권력에 미련이 없는, 박정환이라는 한 남자를 통해 법대로 처벌되지 않는 권력의 속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속성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식당이나 회의실, 집에서 나눠먹는 음식 말이다.
흔히 권력 싸움을 밥그릇 싸움이라고 한다. 이태준은 나눌 것이 있을 때 마다 식사를 함께 했다. 이태준은 박정환과 짜장면을 윤지숙과는 홍어나 막걸리, 스파게티를 이태섭과는 칡뿌리를, 김상민(정동환)과는 만두를 나눠먹었다. 밥을 같이 먹은 만큼 그들의 관계는 돈독해졌고 그들이 배신한 명분이나 약속은 흐지부지해졌다. 윤지숙 장관은 아들의 안전이나 국무총리라는 권력 앞에서 이태준 검찰총장을 해임한다는 명분을 잊어버렸고 윤지숙의 몰락과 함께 대검찰청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이호성(온주완)은 깨끗한 검사가 되겠다던 검사선서 따위는 잊어버렸다. 잘났든 못났든 화초든 잡초든 간에 명분은 눈 앞의 나눠먹을 밥그릇 보다 한참 보잘 것없고 쓰잘데기 없었던 것이다.
권력이라는 밥그릇 앞에 정의라는 명분은 흐지부지해진다.
국무총리 내정자가 되어 박정환을 압박하는 윤지숙. 박정환은 윤지숙을 잡기 위해 이태준과 짜장면을 먹는다. 이태준은 윤지숙의 개가 되어 국무총리 후보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새로운 밥그릇이 나타났으니 놓칠 리가 없다. 수십년은 된 듯한 낡아빠진 인테리어의 성원각 짜장면이 그들이 나눠먹는 밥그릇이다. 검사의 정의가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밥그릇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 지금까지 보여준 '펀치'의 먹방은 그래서 결코 단순하지 않다. 권력이란 음식이 있는 한 검찰개혁이나 정치개혁이란 명분은 언제든 뒷전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박정환이 지금까지 윤지숙과 이태준에게 속시원히 한방 날리지 못하고 헛주먹질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나눠먹은 밥그릇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박정환 검사는 이대로 죽으면 자신은 '박정환 게이트'의 당사자가 되어 영원히 비리검사로 기록에 남게 된다. 자신이 저지른 만큼 비난받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태준의 모든 비리를 뒤집어 쓸 수는 없다. 남겨질 딸을 위해 죽을 때 만큼은 그 누구하고도 권력도 음식도 나눠먹고 싶지 않은 박정환의 의지가 있는 한 윤지숙을 끌어내린 것처럼 이태준도 함께 끌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어떤 명분 보다 속시원한 한방을 보여줄 그의 펀치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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