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불이 나서 정신없이 끄고 있는데 누가 자꾸 뒤에서 말을 건다고 치자. 계속 해서 어깨를 두드리며 지금 네 집의 불을 끄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설득하고 저 멀리 저 뒤쪽을 보라고 귀찮게 재촉한다고 상상해보라.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기억 특히 80년대 민주화 시대의 기록을 떠올리라는 것은 아마 그런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과거를 되새기란 건 내 발등에 불끄기도 바쁜 젊은이들에게 누군가 자꾸 뒤를 돌아보라며 의미없는 소리를 하는 걸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발등의 불이 잘 보이지 않는 화산에서 날아온 화산재 때문에 일어난 거라면? 집의 불을 끄려고 정신팔린 사이 더 크고 힘든 위험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거라면? 과거라는 건 때로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고 감당하기 벅찬 무서운 족쇄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를 둘러싼 진실찾기에 돌입한 서정후. 게임캐릭터 같던 밤심부름꾼 서정후가 마주친 냉혹한 현실.
'힐러'의 서정후(지창욱)에게 80년대 이야긴 신경쓸 필요가 없는 과거였다. 남들이 어떻게 살든 남의 일 따윈 신경쓸 것도 없고 밤심부름꾼 힐러로 먹고 살고 돈을 벌어 언젠가 섬으로 떠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언제부턴가 없어진 아버지와 어린 시절에 재혼한 엄마, 소년원에서 출소했을 때 사부랍시고 나타나 같이 먹고 살며 이것저것 가르쳐준 기영재(오광록), 한번도 얼굴을 본 적 없지만 서정후에게 힐러란 이름을 주고 임무를 전달하는 아줌마 조민자(김미경)가 그의 전부였다. 서정후는 현실 세계를 돌아다니지만 마치 가상의 게임 캐릭터 같았다. 밤심부름꾼에 특화된 그의 운동신경과 판단력은 파티션을 나눠놓은 하드디스크처럼 의식을 차단한 사이버 캐릭터같았다.
김문호(유지태)의 지시로 채영신(박민영)에게 접근하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서정후가 박봉수란 이름으로 섬데이뉴스 기자가 된 후에도 서정후의 대화 방식은 어딘가 모르게 사이버틱했다. 서정후는 몰래 채영신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채영신은 전화통화로 대화하는 장면이 많아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수줍은 듯 내성적인 듯 솔직하게 이어진 채영신과 박봉수의 대화는 타자를 쳐서 SNS로 대화하는 것처럼 나긋나긋했다. 채영신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을 궁금해하는 듯한 서정후의 감정이 물씬 느껴졌던 것이다.
함께 힐러 일을 하는 서정후, 기영재, 조민자는 어쩐지 현실로부터 떠나고 싶어하는 느낌의 사람들이다. 기영재는 해적방송을 하다 11년 동안 옥살이를 치른 인물이다. 조민자는 사이버수사대에서 일하다 아이를 잃고 어렵게 얻어낸 수사 결과도 흐지부지된 과거가 있다. 대인기피나 은둔형 외톨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은 모종의 질서로 돌아가는 이 시대의 현실이 아닌 자신들 만의 질서를 추구하는 듯 보인다. 해킹이나 밤심부름꾼이란 존재 자체가 질서나 룰 위의 존재들이니 말이다. 김문호와 채영신은 그런 서정후를 과거와 이어진 현실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채영신은 김문식(박상원)에 의해 버려져 최명희(도지원)와 헤어지고 사고 트라우마를 갖고 있지만 채지수(박상면)의 손에 자라며 다양한 사람들을 체험하고 세상을 돌아볼 기회를 넓힌 반면 어린 시절 어머니와 헤어진 서정후는 외톨이로 자라 속은 따뜻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엔 서투른 편이다. 그가 채영신에게 관심을 느끼고 사랑하고 밤심부름꾼에서 남자로 거듭나는 모습은 가상의 게임캐릭터가 현실로 태어나는 모습과 비슷했다 해킹에 능숙해서 서정후의 TV 속을 돌아다니던 조민자가 밖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서정후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정후가 살고 있는 세계에 채영신이 찾아들어간 것이지만.
과거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김문식과 김문호.
채영신에게 설레여하던 서정후는 기영재의 죽음으로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어했다. 마치 컴퓨터의 전원을 꺼버리듯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고 혼자 틀어박혀 있던 그가 채영신과 함께 다시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잠자다 깨어나 옆에 있는 채영신의 존재를 계속해서 만지고 확인하고 부둥켜안고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어하지 않는 서정후는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사람같았다. 서정후는 그동안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던 감정을 이제서야 자신의 감정으로 인정한다. 이게 진짜일까 이게 진짜여도 괜찮을까 생각하는 서정후의 모습이 이제는 정말 현실 속의 사람같다. 그는 진짜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람이 된 서정후가 마주친 세상은 생각 보다 가혹하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를 왜곡하는 제일신문 사장 김문식은 의심하지 않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밤심부름꾼은 살인용의자로 의심한다. 의문의 사고로 죽은 서정후의 아버지 서준석(지일주)은 채영신의 아버지 오길한(오종혁)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밤심부름꾼으로 살아가는 동안엔 힐러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고 가짜 신분증 몇개를 간단히 위조해 도망가면 그만이었는데 김문식의 추적을 받는 동안 아버지나 다름없던 기영재가 대신 죽었다. 무엇 보다 더욱 가혹한 사실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채영신에게 밝혀야한다는 점이다. 더 이상 힐러라는 가상의 캐릭터 뒤에 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진짜 서정후를 찾기 위한 노력과 채영신의 혼란.
김문식은 기득권의 질서를 이용해 서정후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채영신에게 서정후의 아버지가 살인용의자라는 것을 서정후도 살인용의자라는 것을 밝힌 김문식은 세상의 질서라는 것으로 채영신의 불신을 키우려 한다. 김문호가 아무리 세상에 진실을 외쳐도 김문식이 가진 언론의 힘에 비하면 서정후가 유일하게 기댈 수 밖에 없는 김문호의 힘은 미약하기만 하다. 서준석의 진술을 녹음한 박동철 형사는 고작 4대보험과 경비 일자리에 녹음테이프를 김문식에게 넘기겠다고 했단다. 억울한 죽음과 진실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시대에 진짜 서정후를 누가 알고 싶어할 것이며 누가 신경이나 쓸 것인가. 살인 누명이나 한 건 더 쓰지 않으면 다행이지.
채영신이나 서정후 모두 어린 시절을 잊어버렸다. 그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몇 사람 살아남지 않았다. 흔한 드라마에서 그러듯 사랑은 모든 걸 용서하니까 과거 따윈 잊어버리고 사랑하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현실세계의 질서를 가르치겠다는 김문식과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김문호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채영신의 표정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과거 따위는 모른척하고 과거의 힐러처럼 사이버 공간에 숨어버리거나 김문식이 내세우는 4대보험에 순응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고민하고 있는 채영신의 선택이야 말로 냉혹한 현실에 부대끼는 서정후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고 또한 과거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요즘 세대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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