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태종 이방원, 역적이 되겠다고 선언한 원경왕후의 행보

Shain 2022. 3. 2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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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는 홧김에 역적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하는 행보를 보아하니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태종은 원경왕후(정비)가 사병 혁파를 거부감을 보인 일로 상당히 마음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는데 그중에는 파면된 이천우(일단 죽지는 않았어요) 같은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천우는 태조 이성계의 조카로 조정의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조영무는 사병 혁파를 이유로 이방원의 명을 거절하고 그 때문에 직접 무기를 손수레로 끌고 오는 장면이 인기를 끌었는데 사병 혁파는 그렇게 민씨 집안이 단속할 정도로 저항이 큰 제문였제습니다. 결국 마무리도 일단 민씨 집안의 뜻을 따르기로 해서 넘어갈 수 있었던 거죠. 사병은 누구에게나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역적이 되겠다고 선언한 원경왕후 그녀의 앞날은

 

어쨌든 덕분에 한 번 더 조영무가 배신을 당하는군요. 워낙 심지가 굳고 나중에는 정치적으로도 꽤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평소에는 참착하게 자기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병 혁파 때문에 그들이 휘말린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한 명이 혼쭐난 결과를 가져왔죠. 결국 눈치를 보아하니 위험한 조정에서 딸 원경왕후(박진희)의 발언으로 큰일이 일어날지 몰라 걱정하던 민제(김규철)가 일단 이방원의 뜻을 따르기로 한듯합니다. 남녀문제에 관해선 원경왕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죠. '내가 부인을 계속 사랑할 수 있도록 나의 신하가 되어달라'는 말은 결국 동등한 위치에서 행동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방원에게 '저는 차라리 역적이 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맙니다.

 

민씨는 자조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일평생 자수나 놓으면서 한 사내의 장식품으로 살아야 할 계집이 감히 권력을 손에 잡겠다고 날뛰었군요' - 라고 참으로 마음 아프면서 당시 여성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 왕조 이전에는 다들 남녀상열자사라며 감추긴 하지만 원래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대세였죠. 민씨는 여성이지만 군장기를 들었고 여성이지만 여려 전략 회의에 참여하며 존재를 부각했습니다. 그녀의 참여를 배제키킨다면 정말 다른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수나 놓는 것뿐입니다. 태종 이방원(주상욱)의 배신감만큼 민씨의 배신감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안타깝게도 민씨의 성만 알지 이름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병혁파 등 많은 잡음 끝에 태종 역시 왕위에 등극한다.

 

한편 민씨는 잠든 아이들을 오래간만에 궁궐로 데려가 아이들에게 보여줍니다. 첫째 왕자 양녕대군(아직 이름이 정해지기 전입니다)부터 둘째 효령대군, 셋째 충녕대군 세 사람의 왕자가 태어났습니다. 사실 역사상 왕자와 옹주가 더 태어나긴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부부싸움을 하기 전입니다. 태종은 누구보다 양녕대군을 아끼고 귀하게 여겼죠. 세 왕자가 옹기종기 모여 잠자리 같이 하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더군요. 아주 신이 나서 뛰어놀았다는 왕자들 - 그들은 잠깐의 평화를 누립니다. 부인 원경왕후는 셋째가 태어날 때 아이가 둘이나 죽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모두 12명을 낳았는데 낳은 아이들 중 꽤 여럿이 죽어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죠. 이방원과 민씨의 '전쟁 같은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후궁 효빈 김씨의 등장

 

아무튼 후궁을 들이긴 했는데 바로 아이를 낳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효빈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날 때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은 시기는 각각 달랐습니다. 대부분은 1402년에 출생한 아이들이었죠(한번 더 말하지만 궁중 가계도의 이름이 정비된 것은 거의 세종 이후의 일입니다). 효빈에 대해선 몇 가지 일화가 전합니다. 효빈은 이방간의 난이 일어날 이방원이 죽은 줄 알고 당시 나도 전투에 나겠다며 나섰는데 뛰쳐나가는 원경왕후를 뜯어말린 것이 효빈 김씨라고 합니다. 효빈에 몇 가지 일화가 더 있습니다. 이방원이 등극하기 두 달 전 침실 근처에서 흰 용을 보았다고 합니다(못 믿겠는대요).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이 '이비'였죠.

 

직접 군장기를 반납하라는 명에 조영무는 일단 따르기는 하는데

 

사실 쟁쟁한 인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처가살이를 하는 태종이 어떻게 외간 여성(?)이랑 자리를 가졌나 싶을 정도지만 그때는 이방원의 난 이후였고 조금 더 살만했던 모양입니다. 효빈 김씨는 첫 번째 후궁이자 집안이 미천한 가문의 자제여서 그런지 손쉽게 학대할 수 있었나 봅니다. 민무구, 민무질도 학대에 가담했다고 하죠. 태종은 효빈의 아이를 갖습니다. 원경왕후(박진희)는 임신한 아기를 유산하길 바랬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모를 리가) 것인지 몰라도 보다 못한 누군가가 구해줬다고 합니다. 야사에는 원래 신덕왕후 강씨(예지원)가 부리던 여종이 효빈이었다고 하고 어떤 말로는 민무구(김태한), 민무질(노상보) 형제의 효빈에 대한 학대가 조작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왕실에 많은 왕자가 필요했고 그 때문에 끊임없이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벌써 아들이 셋이나 있으니 그만 낳아도 되는 것 아니겠나 싶지만 인물이 왕손이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었죠. 그때 입궁한 사람이 신녕 궁주(신빈 신씨)입니다. 7남 3녀를 낳은 공조참의 신영귀의 딸로 태종이 가장 많이 의지하고 아낀 후궁이라고 합니다. 정신 옹주의 딸인 신녕 궁주 역시 원경왕후의 여종이었는데 신빈이 '전하께서 여자의 청탁을 받지 않는다'라며 청탁을 물리친 일은 유명합니다.

 

사실 이때 이미 효빈 김씨는 입궁해 있었다고 한다.

 

의빈 권씨(정의군주)는 원래 권홍의 딸로 정식 간택된 후궁입니다. 원경왕후가 왕비에 준하는 가례로 맞아들인다고 하자 눈물로 통곡한 일이 유명하죠. 자식은 정혜 옹주 한 명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딸도 일찍 죽었습니다. 신빈 안씨(숙선옹주)는 궁인으로 입궁했습니다. 명빈 김씨는 간택 후궁으로 소빈 노씨, 숙공 공주와 함께 입궁했습니다. 한때는 유일한 빈이었죠. 김구덕의 딸입니다. 그 외에는 숙공 공주는 모반에 연루되어 궁에서 쫓겨난 인물입니다. 그 뒤로도 여러 후궁(모두 17명으로 추정)이 궁궐을 드나들었습니다. 원경왕후는 한번 폐위될 뻔했지만 무사히 왕위는 지켰습니다. 효빈 김씨를 시작으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궁중에 발을 디딘 셈이죠. 역적이 되겠다는 원경왕후의 소원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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