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슈발리에

슈발리에 속의 인물 VS 실제 인물(4) - 표트르3세와 예카테리나 대제

Shain 2007. 6. 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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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과 개혁 사이에서
그 사이에서 진정한 기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좋게 설명해주자면, 슈발리에라는 애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부분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 간접적인 방식으로 얻으려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Peter III & Ekaterina II -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대제
표트르 3세가 애니에서 나오듯이 아주 머리 나쁘고, 계획성 전혀 없고 그런 인물이었다는 기록은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다(폭력에 관한 기록은 좀 있는 듯). 그러나 초상화들은 상당히 안 생겼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대제 역시, 애니에서처럼 그렇게 외국의 기사들에게 부탁을 하고 남편에게 얻어맞아 울고, 얌전하던 여인이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인내심에 관한 기록은 있는 듯).

사실 두 부부는 서로를 함께 기술한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애니 보다 더 길어지는 실존 인물 설명에 표트르 하나를 할애하기엔 자리가 너무 아까운 인물인지라..슈발리에에서의 그 인물은 다소 기술할 가치가 없는 상태의 남자였다.

야사 비슷하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후반에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초반에는 엘리자베타 여왕은 예카테리나와 친했고,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예카테리나에게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압박을 했다고 한다. 외도를 해서라도 낳으라는 뉘앙스로 재촉을 했고, 정말 예카테리나는 외도를 했다던가?  그래서 낳은 아이 때문에 표트르가 황위에 올랐을 때 매우 위기감을 느꼈었다고..

애니에서 나오듯이 이 인물은 엘리자베타를 이어받은 적격의 여왕이긴 했다. 후반기에 현실적인 성격의 여왕으로 돌아서기는 하나.. 엘리자베타 여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렇게 착한 마음으로 왕위에 도전한 게 아니란 건 알아둬야 할 것이다. 군인을 끌고 당당하게 황위로 걸어 갔다. 그리고 애니에서처럼 공식적으로 처형한 것도 물론 아닌 모양이다.(다만 실제로 독일식 병정놀이를 즐겼다는 표르트가 죽을 때 떨어뜨린 물건에 대해선 기가 막힌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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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 대제(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II Великая 예카테리나 벨리카야[*], 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는 러시아 제국의 여제(1762년 - 1796년)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 이름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독일어: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이며, 개명한 이름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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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는 프로이센 왕국 포메른의 슈체친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나 루터교의 세례를 받고 조피 아아구스테 프리데리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남동생이 2명 있었는데, 위의 남동생은 12살에, 아래의 남동생은 태어나자마자 곧 사망하였다. 조피의 아버지는 프로이센군 소장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 체르프스트 공작이며, 어머니도 프로이센의 지방 귀족 홀슈타인-고트로프 가문의 요한나 엘리더 베토이며, 스웨덴의 홀슈타인 고트로프 왕가의 일족이었다.

집안은 비록 가난했지만 교양과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조피는 2살 때부터 프랑스 출신의 위그노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합리적인 정신을 가진 소녀로 자랐다. 승마도 능숙했지만, 음악 실력은 별로 좋지 못하였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그녀는 사람들에게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피는 수려한 외모에 요염한 숙녀로 자라났다.

본래 가문의 명성으로 봤을 때 도저히 대국의 황후 후보에 오르내릴 정도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어머니 요한나의 요절한 오빠 카를 아우구스트가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옐리자베타와 약혼자였던 인연이 있어, 조피는 14살이 되던 해인 1745년에 러시아 제국의 제위 계승권자인 대공 표트르와 결혼하여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한 뒤 대공비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두 사람 모두 독일 태생이었이 때문에, 표트르에게는 우선 독일어로 마음껏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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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러시아 문화에 서툴렀지만,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어를 습득함은 물론 개신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교파를 바꾸는 등 러시아의 귀족들과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데 반해, 지적 장애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표트르는 독일풍을 계속 고집하여 독일식의 군인 놀이에만 열중하여 주위의 반감을 산다.

불행하게도, 표트르가 심각한 남성 능력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다. 훗날 표트르는 수술을 받아 간신히 부부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무렵에 이미 예카테리나는 다른 남성들과 공공연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미래의 황후라는 대의명분으로 묵인했다고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했다고도 전해진다. 표트르도, 유력 귀족의 딸 보론초파를 총애하게 되어, 부부 관계는 완전히 파탄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옐리자베타 여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궁정 내에서는 제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가 난무했다.

1761년 12월 25일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자 표트르가 새 황제로 등극하여 표트르 3세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기간 동안 옐리자베타의 시신 앞에서 열흘을 지내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이러한 예카테리나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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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결국 1762년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힘을 빌려 남편을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예카테리나는 군의 지지를 얻을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영으로 갔다. 그곳의 사령관 키릴 라주모프스키는 예전부터 예카테리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군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로 선포함과 동시에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이어 예카테리나는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를 거느리고 대성당으로 갔다. 곳곳의 연대와 근위기병 연대가 속속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는 예카테리나가 장악하게 된다. 마침내 예카테리나가 대성당에 이르자 대주교는 그녀의 즉위를 축복해주었다. 일설에 의하면 예카테리나는 군복으로 남장을 하고서 그들의 선두에 서서 어전회의에 난입하였다고 한다. 이후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압력을 받고 제위에서 물러나 유폐되고 8일 후 암살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가장 시급하게 당면한 문제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저항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와 다른 하나는 군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 수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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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러시아 사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법전을 편찬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에 맞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녀는 먼저 입법을 논의하기 위해 입법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것은 러시아 제국 전 지역에서 성직자와 노예를 제외한 모든 계층의 대표자인 564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국가회의였다. 이 회의를 통해 입법의 틀을 기초하기 위하여 예카테리나 2세는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와 베카리아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참고하여 계몽 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계몽사상가들이 제시한 이상적 정부 구성의 요건인 3권 분립 이론과 같은 권력 행사의 제약 요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러시아의 전제군주주의 원칙 수호에서는 단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은 결과를 낳아 입법회의 소집 의의는 빛을 잃고 말았다. 또한 지주 계급에서도 노예에 대한 권한의 내용을 명시하여 실질적으로 무한대에 가까웠던 자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의도에 필사적으로 반발했다. 이같은 충돌로 입법회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고 느낀 예카테리나 2세는 위원회가 구성된 지 2년도 채 안 되어 해산시키고 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녀는 지배 계층과의 투쟁보다는 그들의 요구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쪽을 선택했다. 즉 몰수했던 교회 영지와 황실 영지 중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농노와 함께 신하들에게 분배했다. 그리고 자신의 즉위 전에는 농노제가 실시되지 않았던 지역에도 농민들의 이동을 금지하였다. 이처럼 그녀의 농민 정책은 그녀의 기본 노선이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는 사실상 농노제의 발달과 확장이 절정에 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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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착수한 계획은 동방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민족 및 우크라이나 민족의 주거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자신의 2번째 손자인 콘스탄틴을 새로운 그리스 제국의 황제로 앉히고자 하였다. 이 계획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넓히는 데에 그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을 이용했다. 즉 1768년부터 1774년에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시 성당을 세우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정교도들을 보호 및 관리하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또한 상업을 목적으로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다넬스 해협을 비롯한 오스만 제국의 영해 내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도 1722년 프리드리히 2세의 제안으로 폴란드 분할에도 가담하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혁명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폴란드의 일부 영토를 획득하기도 했다.

1767년 입법회의의 실패를 겪고 난 그녀는 영국인 블렉스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지방의 행정적 개혁에는 프랑스보다 영국의 예를 많이 적용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에는 진보적인 성격을 띤 집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히 장 자크 루소나 볼테르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사상을 선호했다. 계몽주의자들의 책이 빠른 속도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러시아의 계몽주의자들은 당시 러시아 내의 봉건주의적 폐단과 전제주의의 폐단과 지주들의 잔악함에 의한 하층 계급의 고통에 대해 많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몽 군주로서 명성을 얻고자 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이때 이들의 작품을 관심 있게 읽었으며, 궁전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녀는 서유럽보다 훨씬 뒤쳐져 있는 러시아를 문명 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문학, 예술, 과학을 장려하고 새로운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힘썼다. 그래서 대규모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고 수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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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던 1773년 그동안 쌓여왔던 농노제에 대한 불만이 쌓여 푸카초프를 중심으로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이 농민 반란은 농노제에 대항한 가장 큰 봉기였다. 그 여파는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농민들은 푸카초프를 환영할 태세를 갖추는 위험한 사태에 이르렀다. 많은 도시를 점령했으며 주력 부대가 오렌부르크를 포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푸카초프 군대를 저지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774년 4월 부분적으로 반란군을 격파할 수 있었고 여세를 몰아 푸카초프 주력부대를 우랄 지방으로 일단 퇴각시켰다. 그러나 타타르족, 마리족 등이 합세한 바시키르 기병대가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자 정부군이 급파되어 푸카초프 군대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면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반란군은 수천 명의 병사를 잃고 결국 패배하게 되었으며 바시키르 기병대는 우랄 연방관구 지역 너머로 급히 도주했다. 이 봉기는 예카테리나 2세가 신봉하고 있던 계몽 사상과 러시아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반란에서 나타난 잔인성에 크게 충격을 받은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젊은 시절의 자유주의적 이념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또 자신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러시아에 도입하려 했던 자유 사상을 강력하게 탄압을 가했다. 또한 유럽의 여러 군주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프랑스에 군주제를 부활시키자고 호소했다. 1793년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당황하게 되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건강이 악화되어 앓아눕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단절하였다. 1796년 67살이 된 예카테리나 2세는 사망하였다

한편 그녀는 정신이 불안정하던 아들 파벨과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는 편애하면서 그에게 계몽주의적 교육을 시켜 차기 후계자로 양성시켰다. 그녀는 알렉산드르가 파벨을 대신해 제위에 오르기를 원했지만, 알렉산드르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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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의 표트르3세

표트르 3세(러시아어: Пётр III Фёдорович,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는 1762년부터 1762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로, 홀슈타인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이다. 독일식 이름은 카를 페터 울리히(독일어: Karl Peter Ulrich).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매우 친프로이센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한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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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칼 12세의 조카인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로, 킬에서 태어났다. 1739년, 아버지가 죽자 작위를 물려받아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황제와 스웨덴 국왕 양쪽 모두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었다.

1742년, 후사를 이를 아이가 없던 숙모인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옐리자베타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표트르는 14살이 되던 해부터 러시아 궁정에 살면서 안할트제르프스트 공국의 공녀인 조피 프리데리케와 결혼했다. 같은 독일 태생이었던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으나 조피가 이름을 러시아식인 예카테리나로 바꾸는 등 차츰 러시아인으로 변하며 국민적 지지를 얻을수록 독일에 아직 강한 애착을 가졌던 표트르는 그녀를 멀리하고 부재상 미하일 보론초프의 조카딸인 옐리자베타 보론초파라는 여인을 가까이 두었다.

1761년 12월 25일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함에 따라 새 황제로 등극한 그는 표트르 3세로 선포되었다. 표트르 3세는 옐리자베타의 장례기간 내내 사람들 앞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가 하면, 프로이센에 국가 기밀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추도 기간이 끝난 후 표트르 3세는 즉시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을 중지해, 멸망 직전에 몰리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을 구해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프로이센과의 7년 전쟁에서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표트르 3세는 여전히 독일적 성향을 버리지 않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우상처럼 숭배했기 때문에 승자로서 마땅히 적에게 항복의 조건을 요구하는 대신 프로이센이 원래의 영토를 유지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러시아군의 제복을 프로이센과 비슷한 제복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는 자국인 러시아의 국익보다는 프로이센의 안위를 더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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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루터교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음에도 별로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황제가 된 후에는 모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해버렸고, 성직자들에게 수염을 깎고 개신교의 목사처럼 옷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표트르 3세는 이제 공식석상에서도 정부인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 함께 지냈고 오직 황족에게만 허용되는 여러 가지 특권들을 그녀에게도 허용했다. 그에 반면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는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는 데다가 심지어는 감옥에 가두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계속되는 실정과 방탕한 생활로 표트르 3세는 급속이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잃어갔다. 그러나 황후 예카테리나는 그녀의 오랜 친러시아 성향과 교양 있는 행동으로 점차 민중의 환심을 얻어 남편과 큰 대조를 이루었다.

드디어 1762년 여름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하였다. 국민적 지지를 얻은 그녀는 페테르부르크 주위의 모든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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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다리를 봉쇄할 것을 지시했다.

그 무렵 아무 것도 모른 채 정부와 함께 페트르호프 별궁으로 가던 표트르 3세는 잠시 후 예카테리나가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의 새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던 표트르 3세에게 측근들은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거기에 있는 함대의 지지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표트르 3세는 음식, 술, 의상 등을 배에 싣기 위해 시간을 낭비했고, 반면에 예카테리나는 민첩하게 크론슈타트 군 지휘관들에게 전갈을 보내 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크론슈타트 해군들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것을 알고 표트르 3세는 경악해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측근들은 다시 그에게 충성할지도 모를 군대가 덴마크의 침공에 대비해 레벨항에 집결해 있으니 그 곳으로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표트르 3세는 이미 기진맥진하여 결단을 내릴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는 그 곳으로 가는 대신 낮잠을 잤다.

6월 29일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 2세가 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영원히 포기하라고 작성한 문서에 순순히 서명했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를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여름 별장으로 보내 오를로프 백작 형제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는 정통성을 가진 표트르 3세가 살아있는 한 자신의 제위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카테리나 2세가 제위에 오른 지 1주일 후에 그녀의 오른팔인 알렉세이 오를로프에 의해 표트르 3세는 교살당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표트르 3세는 심한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사망했다고 공표되었다. 표트르 3세의 암살에 예카테리나 2세가 직접 명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바라던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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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
http://ko.wikipedia.org/
http://en.wikipedia.org/

이미지출처 :
http://www.sgu.ru/rus_hist/?wid=1324
http://kredit.ru/index.php?zi=54&chp=showpage&num=95
http://www.alexanderpalace.org/jewels/catherine.html
http://www.search.com/reference/Catherine_II_of_Russia
http://www.mecenat100.ru/category.php?id=402
http://podolsk.biz/history/podol-podolskyi-podolsk.php
http://www.nndb.com/people/581/000078347/
http://www.weltchronik.de/ws/bio/p/peter3ZvR/pk01762a-Peter3ZarVonRussland-17280221b-17620717d.htm
http://www.fortunecity.com/victorian/hornton/890/PeterII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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