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풍선/有口無言

1987년 그때도 사람들은 거리에 모였다

Shain 2009. 6. 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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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도 5월은 써머타임을 시작하는 기간이었다. TV와 학교에선 평소 보다 일찍 나오라 학생들을 다그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책상에 엎드려 잠든 학생들은 도대체 왜 한 시간 일찍 나오란 것인 지 알 수 없었다. 에어컨같은 건 바랄 수 없는 무더운 시내버스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녔고, 사람들은 바쁘게 걸어가고, TV에선 유난히 경제 성장을 강조하던 그때, 모두들 잠을 아껴가며 80년대를 살았다.

시내에 다녀온 아이들은 종종 눈물을 흘렸다. 아이가 우는 건 그럴 수 있다지만 그 아이의 부모들까지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몰랐다. 저 가족에게 슬픈 일이 있었나 보다 짐작할 찰라 아이 아빠가 한마디 한다. 최루탄 그거 참 지독하기도 하다고.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이의 얼굴을 가렸지만 아이도 울고 있더라 했다.

세월 모르고 자라는 철없는 어린아이들. 87년에도 TV는 있었고 어린이는 만화영화를 좋아했다. 조금 나이많은 언니 오빠들은 가수의 공연을 보러 TV를 켰다. 일상의 풍경은 무심하게 잔잔했고 더운 여름이 찾아오던 그 계절, 무슨 일이 있으면 자세히 설명해줘야할 TV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어른들도 대학생들도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출처 : http://610.or.kr/museum/


지금 아이들이 귀신이 나오는 만화책을 자주 읽듯 그때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줏어들은 괴담을 좋아했다.
'우리 아빠가 시내에 나갔는데 젊은 오빠들이 최루탄을 맞으며 데모를 하고 있더래'
'데모가 뭐야?'
'간첩이 나쁜 짓하라고 시켜서 하는거야'
'간첩이 정말 시켰대?'
'그 대학생 중에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아이들이 알 수 있는 사실엔 한계가 분명했다. 어른에게 묻지도 못할 그런 주제. 어린 아이는 어른의 대화상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그 시절에 눈치 빠른 몇몇 아이들이 가져오는 소식은 낯설었고, 또 무서웠지만 대부분은 무엇을 말하는 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야기에 막바지에 끼어든 아이 하나는 이런 말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말 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대. 유언비어 퍼트리지마' 라고. 1987년의 풍경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색하고 한편으론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땐 그랬다. 뉴스에 나지 않은 이야기를 떠드는 건 어쩐지 무서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보아도 못 본 체했고 들어도 못 들은체 했었다.

출처 : http://610.or.kr/museum/


1987년은 아직,'518 광주민주화항쟁'을 '광주사태'라 부르던 때이기도 하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읽을 수 있는 신문도 책도 뉴스도 없던 때에 어른들은 조용조용 소문으로 전해진 사실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아이들이 듣는다 해도 알아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해 나누던 이야기는 총칼을 든 전쟁이 벌어졌을 때나 들음직한 내용들이었다. 그 무서운 말을 나누는 말미에도 어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며 입단속을 하시곤 했다.

1987년, 잦은 시위가 있었고 폭력 진압이 있었고 그 시민들의 전쟁 덕에 내가 어른이 되어 직접 대통령 선거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야 배울 수 있었다. 결혼을 앞둔 선생님이 왜 눈물을 흘렸는지 나중에 알았다. 내 권리를 찾는 시위에 대해 떠들면 '잡혀간다'는 말을 듣던 황망한 시절이다.

그래서였을까. 잡혀간다는 말을 무서워하며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을 속이는 TV만 보던 아이들과 어른들이 많았던 까닭일까? 그해에 있었던 선거에서 518과 무관하지 않은 대통령이 승리했고 시위 중 잡혀간 사람들은 오래 풀려나지 못했다. 누군가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희생되고 국민은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잡혀가는 걸 무서워하고 살았다.

출처 : 뉴스한국


2009년의 6월 10일은 그 해 87년을 연상시킨다.

재학시절, 단과대학 안에 기이한 조각상을 설치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 학생들이 모여 행사를 자주 갖는다는 사실이 무엇 보다 시위를 자주 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던 교수님이 공간을 없애기 위해 단과대학 정원을 조형물로 채워버렸단 말들을 했다. 90년대 후반까지 대학 학생부서는 존재했고, 그 역할이 시위 단속이란 걸 모르지 않는 학생들로서는 당연한 연상작용이었다.

사람이 모이는 일을 막기 위한 잔속임수, 비슷한 일은 2009년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촛불집회, 전 대통령 서거로 인한 분향소와 추모대회, 노제 개최, 610항쟁기념 범국민대회 개최 때 마다 서울시는 거절을 거듭해왔고 유령단체의 시간대 점거로 불가하단 답변을 하기 일수였다. 마찰을 빚을 때 마다 신용할 수 없는 말로 답변하는 서울시는 현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출처 : http://610.or.kr/museum/


경제 예측을 통해 온라인 페르소나를 쌓아가던 네티즌은 적용하기 힘든 법으로 고소를 당했고 보석이 불가한 상태로 오랫동안 잡혀 있었다. 그 개인의 사진과 이름이 본인의 동의도 없이 여기저기 퍼저 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 부적절한 글이 올라오는 웹사이트는 법으로 단속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법안을 상정 중이다.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시국선언을 하지만 언론은 그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 과거에 그랬듯 사람들은 모이고자 하지만 누군가 그들의 뜻을 막아보겠다 충돌하겠다 한다. 과거에 그랬듯 사람들은 글을 쓰고 많은 걸 알리고 싶어하지만 광장을 막고 포털을 막고 미디어를 막고자 하는 사람들은 변함없이 국민을 단속한다. 노골적인 폭력이 동반하지 않은 걸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여겨야할까. 많은 걸 막고자하는 그 시도는 제도의 폭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antimb


1987년에 사람들을 잡아간다고 정체모를 것들이 협박했다.
2009년에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 협박하고 기념대회를 열어서는 안된다 불허한다. 국민들은 여전히 잔잔한 일상을 소화하면서 87년을 기억해내고 있다. 집회가 열리기도 전에 폭력시위자를 엄단하겠다 엄포를 놓는 경찰을 보며 권리를 빼앗기고 나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지 뼈저리게 새겨보게 된다. 그래도 그 험하고 협박받던 시절에도 광장은 막지 않았다.

지금은 또다른 1987년이다.
집회를 가진 사람들이나 일반 시민들이 연행될 것을 두려워해야하고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분향소가 짓밟히며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던 시사쟈키의 안전을 걱정해줘야하고 정치인에 반대하는 댓글을 달았으면 고소당할 것을 예측해야하는 지금은 87년이 다시 한번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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