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모계혈통집단, 대원신통(大元神統), 진골전통(眞骨正統)은 생각할수록 이야기거리가 많다. 지난번 포스트를 기준으로 따져봤을 때[각주:1] 미실은 대원신통의 종으로 왕비가 되진 않았으나 모계 중 최고신분이었고 그 신분으로 왕들에게 색공을 바칠 의무, 아니 권리가 있었다. 즉 쟁쟁한 인물들의 아이를 낳을 권리가 있었던 것이고 이는 왕이 거부할 수 없었다. 사도황후와 함께 진지왕을 폐위할 때 그녀들은 절정기의 권력을 맛보고 있었다. 사도의 손자이자 진골정통인 진평왕이 즉위 후에도 왕의 자식들과 혼사를 성사시키며 제법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유리제대부배. 신라고시대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신라시대 출토 유물 중엔 색색가지 유리잔이 아주 많다. 모두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금제 장신구 역시 유난히 화려한 그들의 생활을 엿볼수 있게 한다(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초기에 진평왕은 대원신통이자 자신의 사촌, 그리고 어릴 때부터 아들처럼 키운 용수,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줄까 했지만(사위왕이 된다는 이야기, 두 인통은 교대로 왕의 자리에 오르곤 했다) 결국 선덕을 선택한다. 진골정통의 만호태후는 미실계 세력과 대원신통을 핍박하고 경계했다. 진지왕의 아내였던 지도부인도 대원신통에게서 진평왕의 후손은 공주만 태어났다(미실의 딸).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난 두 딸, 천명과 덕만은 어머니를 따라 진골정통이었다. 대원신통이 후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다.

왕위와 가장 가까웠던 상대등 신분의 비담도 가야파와 결합한 진골정통, 선덕여왕을 이기지 못하였고, 선덕의 후계자 진덕여왕은 비담쪽 인물을 30명 처형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자신들의 정권에 유리한 구도를 그때부터 세우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가야세력이 진골정통과 결합하여 대원신통이 몰락했고, 장기적으로는 진골정통 모계의 존재 이유도 희미해져 김춘추는 중국의 주장대로 부계 성씨 계승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장자에게 무리없이 왕위를 물려준다.

화랑세기를 위서라 보는 입장 중 많은 주장이 '문란한' 관계를 그 이유로 든다. 그러나 부계 사회를 거울로 반사하듯 모계사회를 비추면 그 책에 기록된 많은 내용은 부계에서는 제법 이해가 가는 행동들이다. 아버지가 성을 결정한다는 유교적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들은 그런식으로 설명된다. 모계던 부계던 가부장적 문화가 이뤄짐은 파워의 문제이니 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첩으로 들인다

우리가 가족제도의 근간으로 알고 있는 부계 계승이 풍습으로 확정된 것이 바로 신라다. 고려시대에는 모계 계승이 유효한 경우가 있었고 조선 초기까지도 데릴 사위 풍습이 남아 있어 신사임당은 남편을 처가살이시켰다. 성씨를 중요시하고 종친회 등이 발전한 것도 조선 시대다. 신라 초기는 부족 연합의 개념으로 이뤄진 나라라 가문이나 성씨 보단 자신의 혈통, 부족을 중요시했다. 왕위 계승 방법으로 교혼을 선택하였지만 모계로 부족이 이어지는 원칙은 대원신통이 약해질 때까지 이어진다.

미실은 잘 알다시피 세종전군을 남편으로 두었으나 여러 왕에게 색공을 했고 자신도 색공을 받았다. 그 사이에서 자녀를 수없이 낳고 그 자녀들을 출가시켰기에 꾸준히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화랑세기에 나타난 세종 전군은 이를 '바람'이라 여겨 질투하지 않는다. 흡사 조선시대 대가집 아녀자가 밖에서 할 일이 많으신 바깥사람의 외도를 투기하지 않는 모습과 비교할만하다. 세종은 '정절을 지켰다'라고 표현된다.

세종은 미실을 싫어하는 어머니 지소태후를 설득해 자신의 원비를 차비로 두고 차비인 미실을 원비로 삼았다. 지소태후는 형식적으로 대원신통 미실과 연을 맺게 하긴 했으나 사도왕후의 조카인 미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종의 짝사랑은 미실이 여러 왕에게 색공하는 동안에도 이어져 그녀의 청으로 풍월주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미실이 원화 자리에 앉자 낭도들에게 미실을 잘 따라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미실의 연인이 설원랑이고 미실 역시 그를 최고의 연인으로 여긴다 하는데 풍월주로 미실의 심복이었던 설원은 정식으로 미실과 혼인하지 않은 '애인'의 신분이었다. 그는 미실이 진흥왕의 명으로 원화가 될 때 봉사랑으로 봉해져 미실을 따르게 된다. 진평왕을 모시던 미실이 설원과 야합하여 보종을 낳고 이부형인 하종이 보종을 귀하게 여겼으며 진평왕은 마복자로 여겨 재물을 주고 아버지라 불렀다 한다. 부관이자 '첩'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 시대의 남성들 역시 역으로 사회적 관계의 확장을 위해 첩과 부인을 둠에 제약이 없었다 한다.


원화는 병권을 담당하는 인통의 여성이었다

6월 23일 방송된 선덕여왕에선 김유신과 덕만공주, 그리고 김서현이 목숨을 건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로마의 전투사들 혹은 공성전을 연상케하는 그들의 전투신은 다소 과장된 면은 있지만 화랑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음을 보여주기엔 무리가 없다. 설원랑, 김서현, 김유신 등은 전쟁에서 뼈가 굵은 화랑 출신들이고 김유신은 전쟁을 하다 돌아와 다시 떠나기 위해 자기 집 우물물 만 마시고 갔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한다. 원광이 세운 세속 오계를 보아도 국방을 위해 활약한 강력한 군인들임을 알 수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으로 알려진 상주 금돌성. 시기적으로 맞물려 김유신은 호국정신을 화랑에게 강조하게 된다(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화랑은 진흥왕 때 처음 만들어졌고 최초의 화랑은 설원이라 기록되어 있다. 미모가 뛰어난 남모와 준정을 원화로 삼아  낭도를 따르게 하였는데 이는 화랑이라는 군사의 장악권을 여성에게 준 셈이다. 국선, 풍월주, 화랑 등 화랑을 다스리는 여러 조직과 직위가 후에 생겼지만 최초로 화랑을 통솔하던 원화는 상당히 강력한 권력을 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준정과 남모는 미모와 재물을 기반으로 서로의 화랑과 낭도를 모으기 위해 경쟁했다.

진흥왕의 모후이자 섭정인 지소태후는 자신과 자매인 남모 만을 원화로 세우려 했고 남모에게 낭도를 더 붙여주기까지 한다. 세를 잃을까 위기를 느낀 준정이 남모를 독살했다. 이는 약간 내용이 다르지만, 삼국사기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다. 두 원화는 미모를 질투하여 죽인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주장대로 기생의 원형이라기에도 무리가 있으며 병권을 장악하던 두 명의 수장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사건 이후 화랑은 용모가 아름다운 남성을 풍월주로 삼게 된다.

진흥왕의 총애를 받던 미실은 남편 세종과 설원랑 등을 이용해 다시 원화를 부활시킨다. 드라마에서처럼 낭장결의를 했음은 무리가 있겠으나 직접 전쟁에 나가는 화랑들을 다스림은 권력 장악 차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진지왕 폐위시 낭도를 휘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 설원, 하종, 보종, 문노 등이 그녀의 편이었으니 원화가 아니었다 한들 병권을 장악했음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아이의 지위를 올려주려면 마복자로 만들어라

마복자는 신라에만 있는 특이한 풍습으로 화랑세기가 위작임을 증명하는 주제라고들 한다. 현대의 관점으로는 몹시 해괴하다. 임신한 여성이 높은 지위의 남성과 관계를 가지면 그 아이를 지위높은 남성의 양아들처럼 대우받게 한다는 것이다. 신라는 여성의 신분을 물려받는 사회였기에 종종 여성의 신분만으로 신분 상승의 제약이 있을 때도 있다. 혹은 남편의 신분이 낮아 여성이 신분이 높아도 상승할 수 없을 때도 있다.

화랑세기엔 마복칠성이라 하여 대표적인 마복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미실 역시 이 제도를 활용해 자신의 자녀들의 신분을 높인다. 세종 전군의 아들인 하종과 옥종은 진흥왕의 마복자로 하종전군이 되고 풍월주 자리까지 맡는다. 설원랑의 아들 보종전군(보종랑) 역시 진평왕의 마복자로 진평왕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랐다 한다. 나이 들어서는 설원랑에게로 돌아갔다.

이처럼 영리하게 마복자를 활용하면 자녀의 신분을 왕자, 공주급으로 상승시킬 수 있었고 왕은 그들을 후원해주었다. 미실같은 궁주는 그를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왕의 입장에선 자신의 양아들을 얻어 세력을 얻게 되므로, 즉 모계 혈통에 자신의 추종자를 갖게 되는 셈이라 그리 손해볼 것이 없었다(용춘과 용수 역시 진평왕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랐고 지도 왕후가 진평의 첩인 것으로 보아 가능한 설정이다). 풍월주 역시 이런 풍습이 있었다 한다.


아이 못 낳는 사위는 소박맞는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대로 사위왕이나 외손자가 왕이 된 경우는 모계가 그 쪽이 더 우위였기 때문이다. 진평왕 대에는 양 인통과 관계한 성골이 태어나야 다음 왕이 될 수 있는데(번갈아 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해) 애초에 진평왕은 용수(갈문왕이었단 글도 있다), 용춘을 사위로 들여 왕위를 주려 했다. 그것이 그때까지 지켜온 관습과도 맞았고 그때까지는 미실과도 관계가 좋았던 듯하다.

천명과 선덕에게 의중을 물어 사위왕의 배필이 될 사람을 찾으니 천명이 물러났고, 선덕여왕은 용수와 아이를 낳아 왕위를 이으려 한다. 그러나 아이 낳기에 실패하고 용춘과도 시도했으나 그 역시 실패하고 홀로 왕위에 오른다. 결국 천명에게는 초반에 용수를 주어 혼인하게 했으나 후에 용수가 죽자 용춘과 부부를 이뤄 살도록 한다. 사위가 되어 왕이 될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이었고 그 자격도 있었으나 아이 낳기에 실패하여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후에 삼서제를 적용해 흠반공, 을제공도 사위로 두었지만 그들에게서도 아이는 얻지 못했다.

애초에 진평왕이 진골정통의 위세를 강화하고자 두 인통의 전통을 깨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용수, 용춘은 단독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위치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부계 사회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가 첩을 두듯 딸을 낳지 못하는 사위는 교체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부계의 성을 물리는 것처럼 모계의 혈통을 물려줬기 때문에 남자는 혼인해도 자신의 혈통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못한다.


모계사회의 특징을 그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원시시대엔 부계 보단 모계가 더 강력한 파워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소수에서는 물리적 힘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지만 부족이나 부락을 이룬 다음엔 '자식'이 자신의 세력을 뜻한다.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선명한 까닭에 모계는 자녀들을 두고 그 파워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중국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현상은 종종 발견되지만 고대의 일이라 자세히 찾아낼 수는 없다 한다.

신라는 중국과 다르게 그 풍습을 아주 오래 지켜왔고 부족의 특성도 오래 유지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때까지도 형식적이지만 화랑도와 신당 등에서 그 풍습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한반도의 변방에 있었던 까닭인지 주변국 보다 훨씬 늦게까지 부계를 도입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미실은 어쩌면 그 부족 세력의 마지막 저항세력일지도 모른다. 즉 모계사회의 마지막 권력자였을 것이란 뜻이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새로운 권력자로 신라의 전통을 많은 부분 바꿔 버린다. 유교가 건승한 고려 이후엔 화랑세기 이외에 현대에 전하는 모계혈통 기록은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며 가장 아쉬운 건 그 부분이다. 진평왕이 미실에게 느끼는 공포는 일면 타당하지만, 왜 그런 갈등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지도 않고 미실의 권력은 어떤 이유로 정당한 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사도태후, 만호태후를 비롯한 많은 인물이 빠진 까닭일 수도 있겠으나 그 시대의 특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1. 물론 각 사서별로 입장이 다르므로 화랑세기를 인정한다는 기반 하에서 용납해야한다. 해석도 아직 이론의 여지가 있다. [본문으로]


공감하신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한번만 꾸욱 눌러주세요~

  1. ㅋ2-3반임ㅋ
    2011.05.11 23:35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