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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은 처음부터 충성을 강조한 조직이었을까?

Shain 2009. 7. 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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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천랑과 유신랑의 충성과 의리가 TV 화면을 탔습니다. 신라의 화랑들은 화랑에 쓰인 꽃(花郞)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무술도 뛰어나고 용감합니다. 씩씩하고 거친 알천랑의 모습은 무섭기까지 하지만 우리가 책에서 읽었던, 스스로 계백 장군에게 목이 잘린, 신라군의 사기를 올린 화랑 관창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신라시대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김유신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죽을 자리에서 죽지 못했다며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습니다.

유치진의 희곡 속 원술랑은 화랑의 도와 신라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아버지로 인해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내세우는 어머니 조차 평생 만나지 못하고, 문무왕 시절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숨어 살았다 합니다. 김유신이 치른 전쟁에서 희생된 장수들과 화랑이 많았으니 자신의 아들만 살아왔다는 치욕은 나름 이해가 가면서도 그들의 에피소드가 현대인의 애국을 강조하기 위한 '교과서'로 쓰였다는 점은 어쩐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신라가 너희를 기억해줄 것'이라는 김유신의 발언, 용감히 아막성으로 군사를 몰고가 싸웠던 김서현, 용화향도, 비천지도, 김서현이 죽은 줄 알고 논공행상에서 쌀과 영지, 위령제를 논하는 모습은 우리 나라에서 수여하는 훈장 중 하나엔 '화랑무공훈장'을 떠오르게 합니다. 연합 부족국가에서 출발해 군소세력이 통합되고 하나의 나라가 되고 주변의 땅을 하나둘 흡수하자면 군인의 충성과 희생, 용맹이 뒷받침되어야함을 화랑의 발전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포스트에서도 적었듯 화랑의 성격이나 화랑의 문화 등은 아직도 많은 부분 수수께끼입니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화랑의 조직을 최고의 정예부대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화랑 각자가 마치 사병인 듯 낭도를 거느리고 있었고 각종 제를 주관했다든지 유난히 그 아름다움을 강조한 묘사 등은 최초 화랑의 성격이 '정식 군인'은 아니었지 않나 하고 생각해보게 합니다.

진평왕 24년 서기602년. 거의 질 뻔 했던 전투를 화랑 귀산과 추항의 덕으로 신라의 승리로 이끈다. 아막성은 현재 전주 남원시 일대이다(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화랑의 설치시기를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576)으로 적고 있지만 그 이전에 사다함이란 화랑이 있음을 적고 원화의 존재를 이야기 한 것으로 보아 진흥왕 초기가 맞을 것입니다. 진흥왕이 죽을 때 쯤 설치되었다면 그 사이에 많은 역사가 있을 수 없었겠죠. 초기의 화랑은 화랑세기에 의하면 고유의 도인 '선(仙)'을 강조하는 집단이었다고 합니다. 신선(神仙)이란 단어에 쓰이는 선은 자연을 벗삼아 도를 닦는 행위를 뜻하는 말입니다만 신라시대의 선이 어떤 성격의 사상이나 종교였는 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신라 시대에 신궁이 있었고 진덕왕 때까지는 신궁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꾸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삼국사기) 선도라는 것이 신라 고유의 전통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인 원화를 대신해 아름다운 화랑을 뽑았다는 기록, 그리고 대원신통의 특별한 위치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구요. 알 수 없는 신라사회의 고유한 전통이 낳은 청소년 조직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김대문의 필사본 화랑세기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화랑으로부터 나온다'는 말로 화랑의 성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모습은 어찌되었던 간에 이후에 화랑은 귀족들의 자제를 훈련시켜 나라에 등용할 인재로 키워낸 제도가 되었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초기의 화랑이 실제로 쓸모있는 군인으로 자리잡게 된 건 언제쯤이었을까요?

화랑세기의 기록엔 여러 대의 풍월주들, 즉 화랑 수장들의 혈통을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그들의 어미와 아비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그 업적을 적는 화랑세기엔 5세, 6세 풍월주인 사다함과 세종 이외에 전장에서의 공적을 가진 풍월주가 한참 뒤에 출현합니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 공통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최초의 화랑은 '사다함'입니다. 진흥왕 23년(562)에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복속시킨 공을 세운 사다함은 그 이익을 모두 부하들에게 돌려 칭송을 받았다 합니다.

그때까지는 원화로 인해 갈등하고 모여서 풍류를 논하는 귀족 자제들의 무리의 속성이 더 강하지 않았나 짐작되는 대목이 많지요. 진지왕 때 화랑들의 우러름을 받았던 문노는 지금까지 알려진 화랑정신과는 다르게 진지왕을 폐하는 일에 미실과 동조하고 미실은 그 화랑들을 데리고 궁궐을 장악합니다. 국가의 이익이 아닌 사병으로서 활용된 성격이 있지 않았나 짐작되는 부분이죠. 반면 당시의 세종은 진지왕 2년(577)에 백제의 침입을 막기도 하고 전시가 아닐 땐 재상으로 일하며 국가를 위해 충성하기도 합니다.

이 화랑 집단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들은 원광법사, 김서현, 김유신 이 세 사람입니다. 백제와 다툼이 잦아지고 진흥왕은 성왕의 머리를 신라 저잣거리에 묻었다고 하는 시기에 화랑제도를 설치했음은 국가에 제대로 훈련된 엘리트 집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다함과 세종을 제외하고 초기 풍월주 중에서 전공을 세운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각 신라 세력의 파워를 과시하는 경향이 더 강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때의 기록은 대원신통파와 진골정통파 등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하였다는 글이 더 많습니다. 미실의 아들 하종 때에 이르러 가야, 미실, 이화 등이 단결하였다고 적고 있죠. 이때부터 김서현의 가야세력이 점점 득세하기 시작하고 원광법사는 600년경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의 세속오계를 전하게 됩니다. 불교가 화랑정신과 결합하며 자신들의 도를 가지게 된 것이죠. 하나의 조직이 생긴지 수십년이 넘어가니 그 기틀이 다져지는 것이 일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진평왕 24년(602)에 실제 야막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귀산과 추항에게 전해진 화랑의 다섯가지 정신,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은 그 뒤로 화랑이 모범으로 삼아야할 모범이 되고 이에 의해 원술랑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초를 겪게 되지 않나 합니다. 또 전시에 화랑을 다스리기에 이보다 더 효율적인 원칙은 아마도 없었겠죠. 김유신은 그 장점을 취해 수하들과 장수들을 다스리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특히 화랑의 모임은 유신 풍월주 대에 이르러 국사를 걱정하는 성격으로 바뀝니다. 알천(閼川), 임종(林宗), 술종(述宗), 염장(廉長), 유신(庾信), 보종(宝宗) 등의 칠성우(七星友)가 남산에 만나 놀았다는 이야기는 지난 포스트에서도 적었죠. 보종은 전쟁에 임하는 화랑답지 않은 행동으로 유신을 난감하게 했던 거 같기도 한데 영리한 유신은 보종의 화랑도는 자신과 달라 '선(仙)'의 도라 치켜세우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자면 유신을 따르라고 했다고 하죠.

풍류(風流)라는 단어의 쓰임은 오늘날에도 멋스럽고 풍치있게 노는 일을 뜻합니다. 화랑도의 또다른 이름인 풍류도라는 단어로 보아 보종같은 화랑도 분명 많이 있었고 화랑의 성격을 규명함에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유난히 신라시대의 풍요로움이나 문란함을 강조하는 해석이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을 세워 골품을 올리고 싶었던 김유신 등의 가야 세력과 국가를 확장했어야 했던 신라의 시대적 요구는 오늘날 TV에서 보이는 용감한 화랑의 호국정신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드는 화랑 관창의 현신처럼 용감히 전진하는 알천랑은 김유신 보다 훨씬 더 선덕여왕에게 가까운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 대의 알천랑은 대장군으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전쟁에 출정하여 공을 세웁니다. 선덕여왕은 상대등 을제 등에게 자신을 섬기게 했다고 하니 오히려 연인으로 설정하기에 김유신 보다 더 적합해 보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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