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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가면을 쓴 검은 화랑 비담, 그리고 비형랑

Shain 2009. 10.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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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에 등장한 비담(毗曇)의 기록은 몇 줄 되지 않는다. 골품과 관등제도가 유지된 신라 시대니 높은 골품의 왕족이었다 추측할 뿐이다. 비담은 선덕여왕이 죽을 때 쯤 갑자기 사서에 등장해 진덕여왕이 즉위하자 마자 9족을 멸하는 처형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 반역자의 정보를 상세히 적는 나라는 흔치 않으니 선덕여왕 제작진은 그의 캐릭터를 설정함에 자유로움을 느낀 동시에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암흑 속의 인물이다.

최고의 상대등 비담이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선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이 있어야 한다. MBC 선덕여왕에서 셋팅한 비담의 어두움은 '출생의 비밀'에서 출발한다. 태어나자 마자 쓸모가 없다며 버린 어머니, 자신을 친자식 보다 사랑했고 모든 걸 주겠다고 했지만 하루 아침에 냉정해진 스승님, 이미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친구들, 권력에 눈이 멀어 뒤돌아보지 않는 어머니 등. 비담의 인생은 '삐뚤어지기' 위한 준비를 모두 갖추고 있다.

검은 옷의 화랑 비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역할.


작가가 설정한 비담은 진지왕과 미실궁주의 아들로 정궁인 지도태후의 아들 용수, 용춘과는 다르지만 최소한 전군의 지위는 보장받을 수 있는 왕족, 그리고 지도태후가 천주공(진흥왕과 월화공주의 아들)과 사통해 낳은 염장(廉長)과 더불어 김춘추의 삼촌뻘이 되는 인물이다. 스승 문노가 죽은 후 검은 옷의 화랑으로 분장한 비담은 루이 14세 시기의 철가면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숨겨진 왕족들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하는 것처럼.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는 진지왕의 아들로 현재 극중 비담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가 비형랑(鼻荊郞)이다. 화랑세기는 비형랑이 용춘의 서제로 용춘이 풍월주가 될 때 그를 도왔다 한다. 삼국유사엔 좀 더 자세한 비형랑의 기록이 있다. 도화녀(桃花女)의 아들 비형은 진지왕이 폐위되고 죽은 뒤 그 혼령과 관계를 가져 낳은 아이라 한다.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진지왕이 낳은 아들, 그의 존재는 야사인듯 바람인듯 어둡기만 하다.

가면을 쓴 비담의 캐릭터는 루이왕의 형이란 철가면 소문을 닮았다.


화랑세기, 삼국유사 공통으로 진지왕의 폐위를 적고 있지만 삼국유사는 폐위 후 죽었다 기록하고 화랑세기는 죽음을 적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폐위 부분은 적혀 있지 않고 죽었다라고만 기록한다. 어머니 사도태후는 왕좌에서 끌어내려야할 이유가 있어 사륜을 폐했지만, 큰 아들 동륜을 비명횡사로 잃은 그녀가 둘째까지 참수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즉위 전에도 미생과 자주 어울려 신분을 벗어난 색을 탐하던 진지왕은 폐위 후에 자유롭진 못했을 지언정 몰래 신라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진지왕이 왕이었던 시절, 사량부의 도화녀(또는 桃花郞)가 아름답단 이야길 듣고 궁으로 불러 시중을 들게 하려 했지만 남편이 있어 불가하다며 끝내 거절한다. 왕은 남편이 없다면 가능하겠냐 물었고 도화녀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왕이 폐위되고 2년 만에 도화녀의 남편도 죽자 10일 만에 찾아온 진지왕은 옛날의 약속을 지키라 말한다. 끝까지 거절했지만 왕과의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7일 동안 함께 지낸다.

태어나면서 버려진 왕자 비담과 태어나면서부터 낮은 신분의 비형랑


도화녀는 아이를 낳고 비형이라 이름지었고, 진평왕이 소문을 듣자 15살에 궁으로 불러 집사 벼슬을 내린다. 정궁, 후궁의 아이도 아닌 민가의 비형이 높은 골품일 리 없으므로(4두품으로 짐작된다) 집사란 벼슬이 어떤 자리인 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높은 화랑이나 풍월주 관등을 바랄 수는 없는 위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밤마다 귀신과 어울려 50명의 인원이 지켜도 잡을 수 없었다. 진평왕은 그가 귀신을 부린다는 말을 듣고 불러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으라 했더니 하룻밤 새에 다리가 놓인다.

비형은 진평왕이 신하로 쓸만한 귀신을 데려오라 하자 길달(吉達)이란 인물을 데려오고, 왕은 아들이 없는 임종에게 길달을 주어 아들을 삼게 한다. 길달은 흥륜사 남쪽에 길달문을 세우는 등 일을 하다 여우로 변해 도망갔고 비형은 그 여우를 잡아 죽여버린다. 처용의 이야기처럼 귀신을 부리고 귀신이 무서워한 비형의 이야기는 전설이기 보단 뛰어난 재주와 기이한 능력을 가졌으나 신분이 낮아 조용히 살다간 이름없는 영웅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무명지도의 비담처럼 말이다.

귀신을 부린 비형랑과 최고 지위 상대등의 연결고리가 되는 부분이 무엇일까? 신라의 골품?


비담은 점점 더 어두움이 짙어간다. 성골 공주로 왕을 꿈꾸는 덕만, 아들은 바라보지 않고 왕후가 되고 싶어하는 미실, 성골의 직계로 왕이 되겠다 설치는 철없는 꼬맹이 김춘추, 길달이란 여우처럼 자기 이익 만 따지고 드는 장사꾼 염종까지. 모든 사람들이 밝은 영웅들을 바라보는 사이 무명의 비담으로 살기엔 모든 분위기가 어둡기만 하다. (비록 설정이지만) 진지왕의 아들로 상대등이 될 비담의 캐릭터는 선덕여왕도 어쩔 수 없었던 신라 왕족과 귀족의 불합리를 모두 내포하는 성격을 띄게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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