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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의 발목을 잡은 진골 귀족들

Shain 2009. 9. 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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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사극을 볼 때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바로 주인공이 내뱉는 '백성을 위한다'라는 표현이다. 왕이나 귀족 중에 진정 백성을 위해 큰 뜻을 세웠던 영웅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 방법이나 배경이 우리가 알고 있는 관점과는 다르단 것이다. 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한다는 가치관 조차 그 큰 뿌리는 다르다. 영웅은 권력을 꾀하다 보니 '우연히' 백성을 염려했는가 아니면  백성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 했는가?

드라마 속 수품, 수울부 등을 비롯한 신라 귀족(화랑을 비롯한 진골이 많았으니 대개 왕족)들이 비싼 값에 곡식을 매점매석해 평민들은 수만금을 줘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상황때문에 굶주린다. 장사치들은 귀족들의 속셈도 알 바 아니고 백성들의 딱함도 헤아릴 바 아니니 단지 돈만 벌면 그만인 상황. 진골들은 곡식으로 고리대금업을 해 자영농을 소작농, 혹은 노비로 들일 기회를 잡고 왕실의 세금은 줄어든다. 남는 곡식은 봄에 구휼미로 풀고 백성들에게 덕망을 쌓을 수 있다.

신라 왕이 신성함을 강조한 건 선택이기 보단 필수적인 행위였을 지 모른다.


제정일치 사회로 종종 신관과 왕들이 제사를 올렸던 신라는 정략적으로 왕의 신성함을 강조하지만 건국 초기엔 막강한 권한을 가졌던 진골들을 막을 딱히 좋은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신라의 골품은 원래 8계급이었다 한다. 성골이 사라지고 평민들의 골품인 1, 2, 3두품의 구분도 모호해진 후, 통일신라 후대엔 애초 8개 골품이던 것이 5개까지 줄어들었다. 신라초기 부족이 연합할 때 그들의 골품이 완성되었고 드라마 속 선덕여왕이 대립하는 사람들이 왕족의 핏줄이 섞인 진골들이다.

왕의 의견에 찬반을 결정하는 화백회의(법흥왕, 상대등의 설치와 함께 시작)가 만장일치제란 글을 읽고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원래 6촌의 대표가 모여 회의를 하던 원시적 형태에서 출발했다 하니 그 부족국가의 모습이 남은 형태였던 것이다. 이 장점이 많은 제도, 화백회의에 참석할 자격엔 한계가 있었는데 골품 간 차별이 엄격했기 때문에 참석 가능한 골품은 거의 왕과 가까운 왕족이었지만 때때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왕의 방해물이 되거나 왕과 한통속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상대등은 화백회의의 장으로 회의를 주관하고 구성원들은 찬과 반을 던져 안건을 표결한다.


골품은 첫째, 같은 골품끼리 혼인할 수 있고, 둘째, 골품별로 임명될 수 있는 관직의 한계가 있으며, 셋째, 골품별로 가옥, 복장, 생활용품에 차이를 둔다. 이 골품 때문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혼인상대가 없었다는 추측이 가능하고 최고 지위인 상대등에 오른 사람들은 왕과 가까운 혈족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가야, 백제, 고구려에서 유입된 진골들이 왕따가 된 것도 이해가 간다. 서라벌에 거주하는 평민 역시 골품의 일원으로 지방민들과는 다른 우월함을 누렸다고 한다[각주:1].

이미지출처 : 네이트 한국학, 골품과 관등·관직의 관계


골품을 통해 중앙관리와 지방 관리를 임명하고 나라를 다스렸던 신라에서 진골은 당연히 최고의 특권을 누린 집단이었다. 화랑의 최초 성격이 사병의 성격이 강했듯 진골들은 각자 노비와 다스리는 구역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에는 모든 땅을 왕에 귀속한 것으로 했으나 품이 높은 귀족들은 사적, 공적으로 토지를 부여받았다. 왕권을 집중하고 싶은 왕과 권력을 늘이고자 하는 진골 간의 대립은 진평왕, 선덕여왕 시기의 귀족 반란으로 이어진다.

골품제도는 본래 신라의 지배구조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 초기엔 왕권을 강화하고 싶은 왕들의 방해물이 되기도 했고 근친혼이라는 폐단을 불러오거나 왕족(진골)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 신분의 제약으로 활약하지 못하는 인물도 나타나는 등 문제점이 있었다. 특권을 보장받은 계급이 점점 더 숫자를 늘여간다는 건 장기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귀족과 왕은 특권을 위해서 협력하지만 각자의 특권을 위해 대립한다.


선덕여왕을 비롯한 신라 왕들, 귀족은 특권층이기에 그 특권에 도전은 함께 대응할 수 있지만(지방민의 반란같은 것). 왕은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진골은 보다 많은 특권을 보장받기 위해 서로를 항상 견제한다. 농지를 개간하거나 땅을 넓히고, 물가를 안정시켜 민심을 얻는 일은 왕의 유일한 탈출구일 수도 있다. 여자왕이었던 선덕여왕은 유난히 더 많은 도전을 받았고, 덕분에 더 많이 활약한 기회를 얻은 셈이기도 하다. 장군 김유신은 그 기회를 이용해 최고 진골의 지위로 발돋움할 기회를 얻는다.

유신과 함께 신라를 장악한, 태종무열왕 이후 관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적인 성격의 신라로 개선하긴 했지만, 통일신라 후기엔 결국 귀족들의 반발과 부유함을 막을 길이 없어 신라왕은 그들을 다스릴 수 없게 되고 만다. 드라마 속 선덕여왕은 백성을 구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효율적으로 미실을 비롯한 진골들의 횡행을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신라 전체 역사로 볼 때 그녀는 절대 이길 수 없은 싸움을 한 것이다.


이미지출처, 참고자료 :


  1. 드라마상에 등장한 귀족 계층의 식량 투기, 고리대금업 등와 더불어 현대 서울공화국의 단면이 떠오르게 하는 풍경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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