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한국의 '엽전'과 미국의 '루저'

Shain 2010. 11. 2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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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말이지만 저는 루저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한국에도 증가한 루저 논란이 자기 비하적 체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에 '적당히' 즐겨야할 문화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컨텐츠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기기만 하는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까닭에 오락거리처럼 등장하는 루저 주인공은 더욱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극과 정치극은 현실을 기반으로 했고 항상 현실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즉 사람들의 생각을 부르는 드라마들입니다. 저는 같은 오락거리라도 이런 류를 좋아합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로맨스 소설 보다는 앞뒤를 짜맞춰야 하는 추리 소설이 훨씬 구미가 당기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루저(looser)란 용어는 패자라는 뜻의 '루저(loser)'에 철자 o를 하나 더 보태 상대방이 루저란 걸 강조해주는 말입니다. 계속 해서 패배하고 실패하는 인물이란 뜻으로 최근엔 '덜 떨어진 인물들'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어 속어로 '찌질이'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뭘 해도 잘 안될 거 같으니 늘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는 인물들이죠.





한때 유행했던 '엽전'이란 표현

미국 드라마도 루저물이 인기이긴 하지만 그 정서가 블랙 코미디 쪽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가볍게 웃어넘기거나 씁쓸하게 하는 정도죠. 한국에는 몇가지 자기 비하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엽전[각주:1]'이란 용어입니다. 흔하디 흔한 조선의 동전을 뜻하는 이 단어는 서민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말입니다.

일제 강점이 이전에도 서민의 삶은 피폐해서 경제적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어 부자집 종으로 들어가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 그들의 분노는 한때 민란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민초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서러움은 한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스스로를 낮춰 불는 자조적 성격도 보여줬습니다만 그것이 '조롱'의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보수적이고 융통성 없는 존재, 혹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한가지도 없는 흔하고 무력한 존재, 엽전의 뜻이 본래 이렇게 비하적이었던 건 아닙니다. 숙종조에 발행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언제나 똑같은(常平) 가치로 널리 사용되는 보배(通寶)라는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이렇게 귀하던 상평통보의 가치가 하락한 건 일제강점기 때입니다.




조선 경제에 약영향을 끼친 몇가지 조치로 엽전의 가치가 하락하고 서민들의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치자 그들이 '조선인들'을 보수적이고 변하지 않는 융통성없는 존재들이라 '엽전'이라 조롱하고 폄하해 부른 표현이라고 하죠. 그 대중을 향한 비하 표현은 꽤 오랫동안 서민층에 회자되어 80년대까지도 국민들을 엽전이나 무지렁이로 부르는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요즘은 영어 '루저', 네티즌 용어인 '잉여', '덕후'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일제 강점기 때의 '엽전'에 묻어 있는 혐오의 감정이 조금은 덜하지 않나 싶습니다. 타국의 점령자가 민족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하던 표현이 자기 민족을 경멸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늘 국가의 제 1순위로 대접받지 못하는 서민들의 역설적인 한을 표현하는 단어같기도 합니다.



미국에는 루저 드라마가 있다

'평등과 기회의 나라'란 판타지를 심어준 미국에도 물론 루저[각주:2]가 있습니다. AMC 드라마 'Breaking Bad(2008)'의 배경인 뉴멕시코는 경제적으로도 낙후된 지역입니다. 폐암말기에 의료보험도 변변찮고 장애인 아들에 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수입이 마땅치 않은 가장 월터는 결국 마약을 만들어 팔기로 합니다. HBO의 'Hung(2010)'은 대출받은 돈을 갚을 길 없고 생활비 조차 궁색한 남자주인공이 결국 성매매를 하러 나서죠.

루저에는 경제적인 루저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뚱뚱하고 못 생기고 인종이 다른 것도 루저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NBC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리얼리티 프로그램 'The biggest loser(2004)'에서는 체중 감량에 성공하는 사람들에게 상금을 줍니다. 올해 캔슬된 ABC Family의 'Huge'는 외모가 루저인 뚱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Community(2009)에는 아예 루저들이 단체로 등장합니다. 학위 위조가 들통나 변호사 자격이 박탈될 처지에 처한 30대 중반의 남자, 직장에서 은퇴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할아버지, 이혼했지만 생계를 위해 자격증을 따고 싶은 주부, 대중문화 정키, 고등학교의 모자란 학점을 채우러 온 먀악중독자와 전직 풋볼 선수 등 사회에서 그리 성공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닙니다.

드라마 Glee(2009)는 학교의 일명 '왕따'들인 루저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일등은 아니지만 남들과 조금 다를 뿐 별차이가 없는 아이들까지 루저로 분류하는 걸 보니 도드라지는 현상이긴 한 모양입니다. 이외에도 본격 루저물인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It s always sunny in philadelphia)'이나 '러키 루이(Lucky Louie)' 등이 대표적인데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드라마들이죠.


NBC의 커뮤니티




루저물을 좋아하는 이유?

우리 나라의 근대사를 지배하는 식민지 정서란게 있습니다. 딱히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강자인 일본에 맞서 꿋꿋이 일어서는 저항의식은 점점 더 약해지고 그들이 비난하는대로 '엽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의 정서'가 뿌리내릴 수 밖에 없었다고들 합니다.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서민층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되어 이 한의 정서는 독특한 자기 비하와 체념을 내포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평범하고 일순위는 아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드라마에서 본다는 것, 재미있고 공감이 가고 동질감이 느껴지죠. 한국의 서민 드라마는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 공감하는 대중의 모습이 재미있게 묘사되었고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의 루저물은 현실을 풍자하고 대범하게 웃어넘기는 듯하지만 약간은 자조적인 느낌을 줍니다.

요즘 사회엔 그나마 굶는 사람들은 없지만 스스로를 '잉여', '덕후', '루저'라고 부르는 동안 그 체념과 폄하의 정서는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다른 '엽전'의 탄생인 거죠. 애초에 사람을 루저와 위너로 나누는 자체가 탐탁치 않은 일이고 보면 일제 점령자들이 조선인들을 엽전이란 말로 계속 기죽였듯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말 역시 그런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면 현대인들은 다양한 오락거리와 컨텐츠를 즐기고 있다는 점은 참 다행입니다.


  1.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를 낮잡아 이르는 말 (다음 국어사전) [본문으로]
  2. Loser, 실패자, 패자, 전혀 쓸모가 없는 것(사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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