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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리플리, 장미리가 미쳐야 의미있는 결말이었을 것

Shain 2011. 7. 3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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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끝난 드라마를 두고 왈가왈부한다는 게 의미없는 일같기도 하지만 드라마 '미스리플리'는 사회 풍자와 작품성을 동시에 노려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의 드라마였습니다. 배우들의 호연도 살리지 못하고 시청자들을 만족시킬 만한 캐릭터가 탄생하지 못해 많이 아쉽고 안타까운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유일하게 극중 송유현(박유천)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드라마가 호평을 받아야 연기자로서의 보람도 있는 법이니 박유천 본인에게도 그리 좋은 작품은 아니리라 봅니다.

전 아직까지도 이 드라마에 두 가지 궁금증이 있습니다. 어차피 통속극으로 마무리될 내용이었는데 신정아를 연상시키는 장면을 대체 왜 연출했냐는 것이 첫번째이고 배우들의 캐릭터를 변질시킨 이유가 무엇이었나 하는 부분이 두번째 의문입니다. 처음 드라마 '미스리플리'를 제작하기 시작했을 땐 두가지 요소를 모두 제대로 살려볼 요량이었는데 시청률과 압력 때문에 내용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아니면 일부의 예상대로 불화 때문에 캐릭터도 바꾸고 결말도 변화시켜 버린 걸까요. 어느 쪽이든 제작자와 시청자 모두에게 불만족스런 결과입니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도 또 '리플리'도 상당한 수작이었기 때문에 '리플리 증후군'을 조명해 보겠다는 이 드라마의 취지는 흥미롭게 다가왔던게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선한 사람, 때로는 지적인 사람, 때로는 악당의 가면으로 세상을 대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진심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단지 가면에 불과할 때도 있습니다. 꾸미지 않은 맨얼굴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맨얼굴과 맨몸으로 세상에 나간다는 건 다치고 상처입는다는 뜻입니다.

주인공 장미리(이다해)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스펙을 갖춘 명문대생으로 거짓말하고 그에 맞는 가면을 쓰고 세상에 나갔지만 세상 사람들은 가짜 장미리에게 환호합니다. 면접하러 온 미모의 여성을 성추행하고 자신의 후배 장명훈(김승우)의 애인인 장미리에게 하이쿠나 읊으며 치근덕거리는 중년 남자들, 모두 사회에서 '한끝발' 한다는 사람들이지만 그 속은 썩어문들어진 위선자들일 뿐입니다. 마치 장미리에게 '자격'을 운운하던 이화(최명길)의 정체가 사랑을 위해 딸을 버린 속물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적인 척, 교양있는 척, 선한 척 장미리를 나무라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은 마치 고졸 학력의 과거 유흥가에서 일했던 장미리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정상적인 사회'에 진입할 수 없다고 협박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처음부터 고졸 학력이라도 일본어에 능숙하다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유흥가에서 일했더라도 싹싹하고 적극적인 성격은 취업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추행이나 하는 이면의 더러움을 숨긴 사회는 장미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이런 대조적인 설정이 극의 긴장감이나 박진감을 더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어찌된 일인지 주변적인 것에 흔들려 그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맙니다. 고졸 학력일 때는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던 사람들이 명문대생이란 껍데기 하나에 대접이 달라지고 친한 척 달라붙는 모습을 좀 더 세밀하게 그렸더라면 장미리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풍자의 아이콘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장미리의 사기 행각이 가능했던 건 사회가 이중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최후의 순간에 장미리가 마주 쳐야 하는 고통, 장미리에게 기회를 줬지만 장미리에게 사랑을 배신당하는 장명훈의 인간적인 고뇌, 장미리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모든 인생을 카피당해 사랑 마저 빼앗긴 문희주(강혜정)의 원망,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했지만 그 모든 것을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된 송유현(박유천)의 분노 등을 모두 장미리가 직면했어야 합니다. 남들처럼 가면을 쓰고 세상에서 대접받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 좀 더 심각하게 깨달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허울 뿐인 사회의 약점을 알게 된 장미리가 이런 고통을 겪게 된 직후 나올 수 있는 반응은 미쳐버리는 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학력 위조와 성상납을 했고 그로 인해 사랑받았기에 행복했던 장미리는 분명 그 거짓된 세상을 버리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했던 장명훈, 송유현, 친구 문희주의 원망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그 괴리 때문에 자신 만의 세상에 갇히게 되는 것이죠.


장미리가 미치는 순간은 검사를 대면하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게 된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온세상 사람들이 장미리를 비난하고 검사도 법적 처벌을 받게 하겠다며 서슬퍼런 심문을 진행하던 그때 장미리는 자신의 세계를 깨뜨리기 싫어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의 딸이 장미리라는 걸 알게된 이화와 자신을 동정하게 된 주변 사람들이 장미리를 처벌받지 않도록 구해줍니다. 히라야마(김정태)는 비밀을 감춘 채 일본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도 동경대생이라고 속였을 때처럼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지요. 마치 해피엔딩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엔 병원에 입원한 자신의 '여동생'을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는 송유현과 그런 딸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화, 또 한때 사랑했던 여자의 말로를 보며 씁쓸해하는 장명훈, 자신의 인생을 빼앗아 갔기에 원망했었고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안쓰러운 정신병 환자가 되버린 친구 미리를 보며 동정하는 문희주가 그려졌더라면 어땠을까요. 장미리가 처벌받아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런 위선적이고 교양있는 사회와 장미리의 간극은 엄청난 것이죠. 그 괴리를 메꿀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습니다.

교양있는 사회에 끼어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는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던 장미리가 세상에서 살아남는 진짜 해피엔딩은 미치는 것 뿐일 거라 봅니다. 친어머니가 계부와 이혼해서 법적인 오빠였던 송유현과 결혼할 가능성이 생기는, 그런 해피엔딩은 사회풍자와 통속극 특유의 장렬함을 모두 놓친 엉성한 결말입니다. 아주 간만에 등장한 '리플리 증후군' 드라마였는데 정말 아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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