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공주의남자

공주의남자, 세령과 승유의 사랑은 현실을 초월한 득도의 경지

Shain 2011. 9. 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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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인정해야할 부분은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구현된 계유정난은 픽션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묘사였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드라마 속 수양대군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해석이 덧붙여져 '구국의 결단을 내린 영웅' 쯤으로 묘사되어 왔는데 이 드라마 '공주의 남자'를 통해 권력욕에 빠진 한 남자의 무차별 학살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명회와 신숙주의 재능이 아무리 탁월하다 한들 한 시대를 휘어잡았던 권신이자 배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게 그들의 정체죠.

두번째로 인정할 부분은 그런 역사적 사실과 한편의 '로맨스'가 특히 실제 있었던 일인 경혜공주와 정종의 애닯은 이별, 그리고 가상인물인 이세령(문채원)과 김승유(박시후)의 사랑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세희공주와 김종서의 손자가 혼인했다는 글이 전해져오기는 하지만 누군가 분석한대로 사실상 수양대군의 딸이 김종서의 손자와 혼인하기는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수양대군을 대놓고 욕할 수 없었던 백성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엮어 딸 조차 김종서의 편을 들더라 이야기를 꾸민 게 아니겠냐고 추측도 있습니다. 드라마는 이런 민담과 창작을 적절히 배합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이

생각해보면 민담에 등장한 수양대군에게 쫓겨난 딸 세희와 김종서의 아들이 우연찮게 만나 혼인하게 되었단 이야기도 참 극적입니다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세령과 승유의 관계 보다는 조금 더 '여유있는' 사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김종서의 손자라고는 하나 당시 대부분의 자손들이 멸족당하던 처지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김종서와 그닥 가까운 사이는 아닐테고 아무래도 극중에서 아들로 등장하는 승유 보다는 원한이 덜하지 않았을까요.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적자가 아닌 서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민담 자체가 진실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이니 그 민담을 그대로 드라마에 옮길 수도 없었겠지만 김종서의 손자를 세령의 연인으로 등장시키는 것 보다는 아들을 연인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드라마틱' 해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원한도 원망하는 감정과 갈등하는 마음도 훨씬 더 역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덕분에 학살자, 인간백정 수양대군의 딸이자 김승유를 목숨 바쳐 사랑하는 세령의 입장 만 몇배로 난처해질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과연 금계필담처럼 해피엔딩이 가능할까

예나 지금이나 학살을 저지른 사람은 쉽게 용서를 말하고 화해를 말하지만 가족을 잃은 유족이 그들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다가도 비명에 죽어간 망자 생각에 몸이 떨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살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남다른 감정을 가진 동물이기에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듯 예사로 사람을 죽인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권력과 재물을 위한 학살이 끊긴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양대군(김영철) 역시 혈연을 눈 하나 까딱 않고 죽였던 냉혈한 중 한명이구요.

반면 김승유는 하늘같았던 아버지 김종서(이순재)와 두 명의 형님,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조카 아강이(김유빈)를 모두 잃었습니다(물론 극중에선 세령이 숨겨주긴 했으나). 아버지 김종서의 목이 잘려 봉두난발이 된 얼굴로 거리에 효시되어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수습해 묘라도 얹어드리고 싶은데 수양과 그 일파들은 김종서의 시신을 들에다 버렸다고 합니다(실제로도 김종서의 시신은 다리 일부 말고는 수습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여자 가족은 드라마처럼 잔인하게도 공신들에게 보내졌습니다).

김승유가 어떻게 이들을 용서한단 말인가

금계필담에서 살아남은 김종서의 손자는 남자라는 이유로 잡히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처지였을 것입니다(그래서 전국을 돌며 피신했을 것이구요). 할아버지의 죽음이나 숙부들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나 고모들, 여자 형제들이 노비가 되는 모습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대를 잇는 것이 목적이니 수양대군이 아무리 끔찍하고 원수같다 해도 극중 김승유 만큼은 복수의 칼날을 갈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걸 직접 겪은 승유는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만큼 수양대군을 증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체불명의 공주 세희 역시 아버지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직접 알 수는 없는 처지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조선 초기 아녀자들의 삶이 후기에 비해 자유롭고 당당했다고는 하나 극중 수양대군이 세령에게만은 절절 매듯 딸아이에게 자신의 과오를 허물없이 보여줄 왕가의 아버지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극중 세령은 김승유로 인해 아버지가 '백정'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사욕을 위해 죽이고 이치에 닿지 않는 욕심을 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세희 공주의 입바른 말과는 차원이 다른, 가슴 사무치는 비난을 퍼붓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어제 방송에서 딸을 구하러 나타난 수양대군은 도포 안에 갑옷을 입고 김승유의 화살을 맞아 목숨을 건지고 세령은 신면(송종호)이 김승유에게 쏜 화살을 대신 맞고 쓰러집니다. 교활하든 어쨌든 자신의 목숨을 구하러 온 아버지 앞에서 참으로 대단한 사랑을 선보였다고도 할 수 있지만 와신상담의 각오로 복수를 꿈꾸는 김승유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이지만 원수의 딸이기에 최대한 독하고 최대한 잔인하게 복수하려 했건만 자신을 대신해 화살을 맞다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비극과 악연을 넘어선, 정말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서는 저런 사랑이라면 성불의 경지가 아닐까 싶어져 가슴이 서늘하기도 합니다. 아비의 죄를 모두 감싸앉고 죽겠다는 희생이라고 해야하나요. 아버지를 막을 수 없는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해야하나요. 이 또한 가해자의 딸이기에 가능한 사랑이고 온정이라 해야할지 김승유 역시 부처가 깨달음을 얻듯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둘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인데 '금계필담'의 커플처럼 해피엔딩은 아예 불가능한 인연인 걸까요. 보고 있기가 껄끄러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경혜공주의 비극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분명 세령과 승유 커플이지만 두 사람이 현실을 초월한 엄청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보니 차분히 생각하면 허공에 둥둥 뜬 듯 가끔은 와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극의 특성상 실제 역사와 창작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는 것같기도 합니다. 현대극과 사극 말투가 확 차이나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덕분에 실록에 기록된 경혜공주(홍수현)와 정종(이민우)의 사랑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일 겁니다. 단종(노태엽)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한 부부의 사랑은 유배지에서도 이어지는 고달픈 여정입니다.

안절부절 정종을 기다리던 경혜공주와 거사를 실패한 정종

금성대군(홍일권)이 수양대군을 제거하려는 음모는 한명회(이희도)와 권람(이대연) 등에게 발각되었지만 세령이 납치되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금성대군을 잡아둬야 하는 수양은 신숙주(이효정), 온녕군(윤승원) 등과 상의하여 금성대군을 한성부로 끌고갑니다. 어떻게든 단종과 경혜공주 등이 금성대군을 살려 보려 하겠지만 손발을 잃은 어린 두 남매로서는 역부족이겠죠. 금성대군 역시 안평대군처럼 목숨을 잃을 것이고 곧 정종의 시련이 시작될 것입니다.

민담처럼 전하는 세조의 딸 세희와 김종서의 손자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원수를 사랑으로 이겨낸 로맨스이기도 하지만, 처참하게 죽어가야 했던 어린 단종과 세조의 형제들, 그리고 억울하고 무고한 많은 신하들의 죽음이 담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억울한 경혜공주의 고달픈 인생 역정은 두고 두고 백성들을 안타깝게 만든 비극입니다. 다음주에는 정종 역시 금성대군과 함께 유배를 떠나게 될까요. 뒤늦게 사랑을 깨닫게 될 공주마마의 눈물이 벌써부터 안쓰럽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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