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공주의남자

공주의남자, 수양대군을 평생 괴롭힌 세 명의 여인들

Shain 2011. 8. 1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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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하고 분통한 김종서(이순재)의 죽음, 어린 왕을 위해 충성을 다 했건만 소위 종친이라는 자가 최고 불명예인 역적 누명을 씌우더니 죽고 나서도 최악의 형벌이라는 효시 즉 목을 베어 거리에 구경거리로 삼는 벌을 받게 합니다. 죽어버린 김종서는 봉두난발이 된 머리로 무섭게 아들 김승유(박시후)를 내려다 봅니다. 김승유 역시 아버지를 저리 수치스럽게 만든 수양대군(김영철)에게 어떻게든 복수하고 말리라 독한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김승유가 보게 된 건 수양의 장녀가 자신이 사랑하던 열이, 즉 세령(문채원)이란 사실이었죠.

역사가 승자의 역사 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을 읽어보면 김종서가 죽임을 당할 만한 이유를 납득하기 힘듭니다. 말 그대로 수양대군은 권력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혹자는 세조 시기에 많은 발전이 있었고 한명회(이희도)와 신숙주(이효정)가 똑똑했노라 평가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렇게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놓고서 그 정도도 못하면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세조 역시 자신의 죄책감과 열등감 등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세조의 말년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형제를 여럿 죽이고 조카까지 죽였다는 꺼림칙한 기분이 평생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인지 천벌을 받았는지 권력을 향해 달려가며 칼로 그들을 베어버릴 땐 단호하더니 뒤끝은 그닥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단종의 어머니라는 현덕왕후 권씨의 귀신이 수양의 가족들을 괴롭혀 본인도 꿈에 시달리고 아들 둘이 덜컥 일찍 죽고 맙니다. 수양이 아들이 죽자 화가 나서 현덕왕후의 무덤까지 파헤치라고 했다는군요. 화를 내긴 냈지만 속으로 무서웠을 법도 하지요.

이후에 한명회의 딸 둘이 모두 중전이 되었지만 그들 역시 현덕왕후 귀신 때문에 요절했다는 말이 떠돌게 됩니다. 일찍 죽으면 모두 귀신탓이라며 사람들이 흉을 봅니다. 후손들이야 멋도 모르고 죽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가장 괴로운 건 본인이었을 겁니다. 지독한 피부병 때문에 너무 힘들어 온천을 떠돌았단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처럼 지독하게 굴 때는 무서울 것이 없었는데 패륜까지 저지른 수양은 감히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업보를 만든 셈이죠.



수양의 죄책감을 자극한 세 명의 여인들

성종을 수렴청정한 정희왕후 윤씨(김서라)나 의경세자의 아내이자 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한씨도 수양대군에게는 보통 여걸이 아니지만 단종을 지키다 교수형을 당한 혜빈 양씨도 보통 여자는 아닙니다. 피한방울 안 섞인 손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한 마음은 이미 죽어버린 남편과의 의리 때문이었을까요. 그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귀신 현덕왕후와 혜빈 양씨는 독하게 수양대군과 맞선 여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벼슬을 버리고 수양을 멀리한 생육신들처럼 살아있으면서 그 존재 자체로 수양의 심기를 어지럽힌 여성들도 있습니다.

첫번째는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입니다. 본래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는 수양대군의 오랜 친구였습니다. 계유정난 이후 조정의 모든 일을 수양대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게 되어 단종의 비를 자신의 친구 딸로 정해 버립니다. 송현수는 그후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던 금성대군과 연루되어(음모라는 설이 유력하죠)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이후에 단종까지 죽자 정순왕후는 남편도 세조에게 잃고 아버지도 세조에게 잃은 '송씨부인'이 되버리고 맙니다. 백성들에게는 아직 솜털도 마른 것 같지 않은 어리디 어린 왕후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요.


수양 입장에서는 일단 폐서인시키고 밖으로 내쳤으니 왕권에 위협이 되는 단종처럼 쉽게 정순왕후를 해치울 수가 없습니다. 힘없는 아녀자가 다치기라도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수양을 욕할 것입니다. 부녀자들은 조정의 눈치를 보아가며 정순왕후에게 야채라도 건내주고자 주변에서 야채시장까지 열었다고 합니다. 민심을 거스르면 아무리 왕이라도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정순왕후 송씨는 이후에도 세조가 집을 내려주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모두 거부했다고 합니다. 원수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겠지만 고생고생하는 모습이 오히려 세조를 괴롭힐 것이란 걸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두번째는 극중 단종의 누이로 등장하는 경혜공주(홍수현)입니다. 경혜공주는 1473년 성종 시기까지 살아 있었는데 말년에는 모종의 목적이 있었던 듯 궁에도 출입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종(이민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정미수도 성종이나 예종과 가깝게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남편 정종이 귀양을 가는 동안 줄곧 그 뒤를 따른 경혜공주는 28살의 나이로 과부가 되고 맙니다. 왕의 유일한 적녀가 임신한 몸으로 관비가 되는가 하면 남편까지 잃고 모진 고생을 하게 되니 백성들의 눈길이 당연히 동정적이 될 수 밖에 없었죠.


경혜공주는 존재 자체가 수양대군의 약점인 그런 여자였습니다. 단종은 왕위 때문에 죽어야하는 운명이지만 경혜에게는 모질게 대할 이유가 없었던 수양, 그러나 남편과 동생을 모두 빼앗긴 경혜에게 수양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수양대군이 잘 대해주고 재물을 내려도 경혜공주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 만으로 사람들은 수양대군, 즉 그 시절의 왕인 세조의 죄를 기억해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약점 때문인지 수양대군과 그 가족들은 꾸준히 경혜공주에게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세번째는 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세령입니다. 금계필담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세희라는 이름이겠네요. 아버지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걸 비판하다 목숨까지 위험해진 수양대군의 장녀. 후에 김종서의 손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그녀는 안 그래도 죄책감과 불안함에 시달리는 아버지 수양에게 직격타를 날렸을 것입니다. 가족들이 다 감싸주어도 안심할까 말까인데 또 백성들에게는 정당한 쿠데타였다고 주장을 해야하는 판에 딸이 반기를 들고 나섰으니 수양 입장에서도 눈이 뒤집혔겠죠. 그래도 자식은 자식이라고 죽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그 딸 아니었을까요.



수양이 비난받을 만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

금계필담에 전하는 세희공주 이야기, 즉 이 드라마 '공주의남자'의 모티브가 된 야사는 일설에 의하면 백성들의 바람을 담은 창작이 아니겠냐고도 합니다. 백성들이 대놓고 말을 못해 그렇지 그만큼 수양대군이 나쁜 놈이라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더란 말입니다. 덕분에 정순왕후와 경혜공주의 비참한 처지는 점점 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게 되었겠지요. 귀신 때문에 자식이 죽고 피부병에 걸렸다는 소문까지 멀리 멀리 퍼진 걸 보면 이 살벌한 남자에게 대들지는 못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세조의 핏줄로 왕위를 이어가고 그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오랜 세월 김종서 가문의 사람들을 역적으로 부릅니다. 마치 현대 사회의 학살자들이 아직까지 존경받는 정치인이고 살아남아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그 시대에도 더러운 권력은 생명이 질겼나 봅니다. 그러고 보면 더 많은 사람을 학살한 누군가는 밤에 편히 잠을 자고 있는걸까요. 과거엔 수양대군의 이미지를 누군가 쿠데타와 연결시키는 드라마가 많았다 보니 그 부분도 궁금하네요.

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멜로 드라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반가운 건 명분이야 어찌 되었건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의 잔혹함, 그 야심을 향한 솔직한 심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정당한 대의 명분이나 꼭 그랬어야할 당위성 따위는 학살자의 입장일 뿐입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무고한 죽음이고 억울한 죽음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진작에 수양대군의 이런 모습을 그렸어야 하는 건 아닌지 지난 시대의 아쉬움을 극복하는 듯해 매우 반갑기도 합니다. 아무리 성공한 쿠데타라도 진실은 가려져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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