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정기준은 결국 세종의 적이 될 것인가

Shain 2011. 10. 1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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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명의 원작 소설 '뿌리깊은 나무'를 읽고 있습니다만 예상대로 원작 소설과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소설이 한글 창제 과정에서 일어난 살인과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내용이라면 드라마 쪽은 미스터리와 더불어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도록 마음먹게 된 시대적 배경과 갈등을 좀 더 상세히 묘사할 것 같습니다. 소설 쪽에도 시대적인 인물 묘사가 꼼꼼한 편이었지만 드라마로 구현되려면 좀 더 다른 갈등 요인이 필요했던 것인지 겸사복 강채윤(장혁)의 어린 시절 똘복(채상우)은 완전히 소설과 다른 설정이네요.

예전 드라마 '로열패밀리'도 그랬고 '선덕여왕'도 그랬듯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이 작품을 원작 그대로 제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그러고 보니 또 김영현 작가군요). 원작에 또다른 뼈대를 붙이고 살을 붙이리라 생각은 했는데 그러다 보니 창작된 것이 '밀본(宻本)[각주:1]'과 삼봉 정도전의 비밀이고 다혈질이자 열정적인 세종의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을 내뱉는 세종(한석규)의 모습은 고기를 워낙 좋아해 상중에도 고기를 먹었다던 기록 속 세종의 이미지에 부합되는 듯 하네요.

자신이 꿈꾸는 문치를 태종에게 설명하는 세종, 비밀리에 숨어버린 정도광 부자

어제 정도광 역으로 배우 전노민이 합류했는데(특별출연일까요) 두루마기 차림의 정갈한 선비 느낌으로 전노민 만한 배우가 없습니다. 김영현 작가의 드라마에는 늘 전노민이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인데 그에게 어울리는 캐릭터가 유달리 많아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정도전의 동생 정도광은 가상의 인물이란 것이죠. 정도광의 아들 정기준, 어린 세종(강산)에게 충격을 준 정기준 역시 가상의 인물입니다. 드라마는 조금 더 복잡한 미스터리를 위해 삼봉 정도전을 드라마에 아주 깊숙히 배치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글귀는 다들 아시다시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일부입니다. 정인지가 지은 이 문헌은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글이기도 하고 조선 태조의 업적을 찬양한 글이기도 합니다. 드라마는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립니다'라는 이 구절을 '밀본'과 연계시켜 정도전의 개국 이념, 그리고 태종이 바라던 나라에 대한 종합적인 해답을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도전도 극중에서 세종을 다그치는 태종(백윤식)도 국가에 대한 불완전한 가치관을 가진 인물들이거든요.



정기준을 마방진의 답으로 생각하는 세종

역사적 속 인물들에게 감정을 가지는게 조금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아직까지 고려 시대의 문화가 조금은 남아 있었던 조선 초기. 그 시대에 고려의 흔적을 미친듯이 지워나간 정도전이나 태종 이방원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고려국사' 등의 고려 사서를 편찬한 정도전은 조선 입장에 맞게 고려의 역사를 왜곡한 인물입니다. 태종 이방원이나 수양대군이 무고한 학살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 만큼이나 정도전에게도 약점은 많습니다.

허나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나라를 꿈꾼 인물로 남다른 철학과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극중에 나온 '밀본지서'에 적힌 말대로 군주가 꽃이고 그 뿌리가 재상이라 생각한, 그런 타입의 인물이 맞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조의 후계자로 강력하고 단단한 이방원 보다는 어린 이방석이 낫다고 판단했을 지도 모릅니다. 재상들이 나라를 다스리니 왕이 줏대가 없는 건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강력한 왕권을 위해 무고한 사람까지 죽인 이방원과 당연히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태종과 정반대의 뜻을 피력한 정도전의 밀본지서

태종은 고르고 고른 후계자 세종(송중기)에게 너의 조선은 어떻게 다르냐고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긴 했으나 태종 역시 언젠가는 죽음과 함께 하는 힘의 정치, 즉 패도(覇道)가 끝나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차기 왕에게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외척 숙청을 강행했지만 아직까지 나약한 세종이 어떤 국가관을 가지고 자신의 국가를 다스릴지 꾸준히 질책해야할 책임을 가진 상왕입니다.

정도광과 정기준을 뒤쫓아 비밀스런 굴에 들어간 태종, 조말생(이재용)과 함께 벽에 새겨진 삼봉 정도전의 '밀본지서'를 본 태종은 경악합니다. '군주가 꽃이라면 그 뿌리는 재상이다. 꽃이 부실하다 하여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지만 뿌리가 부실하면 나무가 죽는다. 부실한 꽃은 꺽으면 그만이다' 요즘 말로 왕을 한갓 '얼굴마담' 정도로 생각하는 듯한 정도전의 글, 왕의 존재를 폄하하는 듯한 그 글에 태종은 분노합니다. 사대부들의 비밀 결사를 촉구하는 내용에도 화가 났을 법합니다.

아버지 태종에게 '저 말고는 대안이 없다'며 은밀히 아뢰는 세종은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태종에게 자신의 답을 찾았다 이야기합니다. 그 해답을 실천하는 시작으로 끌고 나온 것이 바로 '현량한 젊은 학자들과 전각을 지어 글을 읽겠다'는 집현전입니다. 학문과 문치(文治)는 불가분의 관계이니 마땅한 시작이지만 태종은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모두를 아우르겠다는 방대한 세종의 뜻은 왕의 고난이기도 하고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정도광을 죽이려는 태종과 무휼에게 그를 살리라 명하는 세종

상왕 태종은 조말생을 시켜 반촌까지 들어가 정도광을 죽이려 하고 세종의 명을 받은 무휼(조진웅)은 정도광과 정기준을 살리러 반촌으로 가고 똘복은 아버지의 유서를 찾으러 정도광에게 가고 정도광은 잃어버린 삼봉의 밀본지서를 찾으러 똘복을 찾아갑니다. 그들의 갈등은 목숨을 건 대립일 뿐만 아니라 세종이 마방진의 칸을 채워가는 과정입니다. 일단 '나의 집현전'에 정기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세종은 방진을 채울 첫번째 숫자를 제대로 찾아낸 것 같기도 합니다.

정기준이 이끌고 있는 '밀본'이 세종이 찾아야할 진정한 '뿌리깊은 나무'일까요. 태종 이방원이 주장하는 '뿌리깊은 나무'는 분명히 왕 자신입니다. 자신이 살린 첫번째 백성 똘복을 죽어도 살리려 한 세종, 세종은 단 하나의 숫자로 방진을 채우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종과 정기준은 왕권과 신권이라는 단 하나의 숫자를 원할 뿐입니다. 일을 제외한 8개의 숫자를 찾아낸 세종, 자신이 만든 한글로 '용비어천가'를 제작하게 한 세종은 정기준의 비밀조직 밀본과는 당연히 대립하지 않을까, 결국 밀본이 세종의 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 원작에는 밀본(宻本)에 대한 부분이 없습니다. 宻은 비밀로 하다, 누설하지 않다는 뜻의 한자입니다. 극중 비밀스러운 뿌리를 뜻하는 비밀 결사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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