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무신(武神)

무신(武神), 최우의 강화도 천도 무신정권을 위해서냐 고려를 위해서냐

Shain 2012. 5. 1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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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혼례에서 이용되는 신부의 복장, 즉 머리에 쓰는 족두리와 얼굴에 바르는 연지, 곤지는 본래 고려 시대에 유입된 '몽골풍'의 하나라고 합니다. 여몽전쟁 후 많은 고려인들이 몽고에 넘어가 생활양식이 전파되고 '고려풍'이 유행했듯 고려에도 원나라 공주가 왕비가 되고 태자가 몽고에서 생활하는 동안 몽고 풍습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불교 문화 때문에 육식 보다는 채식을 즐긴 편이라는 고려인들에게 '만두'같은 음식이 소개되기도 하고 일설에는 '소주'나 '설렁탕'도 이 때 유래된 것이라 합니다. 소주는 물론 신라시대 때부터 즐겼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몽골풍'의 또다른 흔적 중 하나가 바로 언어인데 '마마', '수라', '마누라'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또 '벼슬아치', '장사치' 같은 명사 끝에 붙는 '-아치' 또는 '-치'라는 접미사인데 이는 몽골어 '다루가치(행정관)', '화니치(거지)', '시파치(매사냥꾼)'같은 직업을 나타내는 단어의 '치'가 우리 말에 유입된 것이라 합니다. 고려사에서 빠질 수 없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다루가치입니다. 몽고 침략 이후 수차례 다루가치들이 국정에 개입한 기록이 발견되나 1차 여몽전쟁 시기엔 후대에 비해 그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최우는 김준과 강화도 천도를 의논하는 한편 대집성의 딸을 만난다.

그러나 원나라 역사를 기록한 '원사(元史)'의 '고려전'에 의하면 1차 여몽전쟁 이후 살리타이의 요청으로 72명의 다루가치가 서경을 비롯한 40여개 성에 배치되었고 그들 모두가 고려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고려사에 그 부분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실제 파견된 인원은 그 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또 모두가 죽었다는 말도 믿기 어렵습니다만 고려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천도할 때까지 다루가치는 파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극중에서 이공주(박상욱)에게 맞아죽은 것으로 묘사된 도탄(도단, 都旦)은 내정간섭과 횡포로 많은 이들의 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루가치(達魯花赤)의 뜻은 본래 '진압하는 사람', '속박하는 사람'으로 총독이나 지사같은 직급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횡포가 심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고 1232년 5월, 4명의 다루가치가 왔고 7월 내시 윤복창을 보내 궁시를 빼앗게 했다는 기록이나 같은해 8월 다루가치를 서경순무사 민희(극중 정규수)가 다루가치 모살 계획을 꾸미는 등 고려에서 그들을 살해한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왕 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는 무신정권의 최우(극중 정보석)가 그들에게 고분고분 권력을 내어주지 않았으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최우는 이런 혼란한 정국 속에서 왜 강화도 천도를 강행한 것일까요.



최우, 누구를 위해 강화도 천도를 강행하는가

고려에 몽골풍을 전파한 것이 원나라 공주들과 다루가치들이었다면 몽고에 고려풍을 전달한 주체는 '공녀'들이었습니다. 1275년부터 무려 50여 차례 이상 몽고로 여성들을 보냈고 고려에는 그를 피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결혼을 시키는 조혼이 유행하게 됩니다. 원나라 궁중의 궁인들은 모두 고려 여성이고 고관 대작들은 고려 여인을 아내로 맞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많았다 하니 그들의 풍습이 전래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이런 유행을 한류니 뭐니 하며 반가워할지 몰라도 공녀 자체가 서글픈 백성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현상이라 문물 전파로만 간주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여몽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것이었습니다. 몽고에서 요구하는 과다한 공물과 물품은 고려를 피폐하게 만들고 흉년이라도 드는 해에는 굶어죽는 백성들이 속출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흥왕사의 화재나 경주 황룡사의 화재는 단순한 문화재의 소실이 아니라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가 불타버렸다는데에 그 비극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배고픔과 가난으로 고생하는데 고려 불교의 상징물까지 없어졌다니 통곡하지 않을 백성은 없었을 것입니다. 김준(김주혁)의 말처럼 비참하게 짓밟히고 울부짖다 죽어갔을 것입니다.

도탄이 죽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나 다루가치들은 살해당했다. 홍복원은 이후까지 살아남는다.

때로 몽고에게 유일하게 고개 숙이지 않은 나라가 고려임을 자랑스러워할 때도 있고, 최우의 강화도 천도가 고려의 자존심을 지킨 어쩔 수 없는 조치라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우가 정말 고려의 명예를 위해 그리 했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몽고와의 화친은 말이 화친이지 그냥 항복이 아니냐는 김준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몽고의 내정간섭 시기는 일종의 식민지 시대와 유사했으며 고려는 원나라 앞에 힘을 잃었습니다. 강화도 항쟁 중에 '고려'라는 이름을 남기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말 그리 죽음을 각오했어야 했는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드라마는 최우의 강화도 천도를 극적으로 연출합니다. 신하들에게 재추회의를 통해 천도 여부를 결정하라 했으나 최우는 이미 천도를 결심한 상태로 고종(이승효)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고 거의 강제로 왕을 옮겨가게 합니다. 사서에서도 고종이 한달쯤 뒤에야 강화도로 따라나선 것으로 되어 있으니 적극적으로 반대하진 못해도 거부하는 입장이었던 듯합니다. 도탄을 비롯한 다루가치들이 최우의 명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극적 연출을 위한 설정으로 알고 있지만 유승단(박종관)과 김세충이 적극 반대했고 김세충의 목이 잘린 것은 사실입니다.

강화도 천도를 반대하다 참수당한 김세충. 천도 반대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고종.

극중에서는 김세충의 목을 자를 때 마음급한 최우가 독단을 내리는 듯 처리되었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최우의 장인인 대집성(극중 노영국)이 세충을 처벌하라 합니다. 왕의 스승이자 이규보(천호진)의 친구였던 유승단도 강화도 천도를 극렬 반대했지만 그 해 죽고 맙니다. 죽은 이유는 적혀 있지 않으나 김세충이 처벌된 선례로 보아 천도를 반대하던 고종의 뜻을 최우에게 피력하던 유승단이 비명에 갔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습니다.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벌판으로 옮겨가라 명하니 차마 불만을 입밖으로 내지 못해도 민심이 반대할 것은 당연합니다.

고종이 강화도로 옮겨갈 때는 장마비가 열흘이나 내렸다고 합니다. 진흙이 발목까지 빠져 말이 쓰러지고 지체높은 집안의 부녀자들까지 맨발로 짐을 안고 이고 걸어 이동합니다.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 자식 없는 사람들, 불우한 사람들이 소리내어 슬피 울었다고 하니 피난길같은 큰 혼란이 있었음이 짐작 가능합니다. 무엇 보다 그들 집권 세력이 옮겨감으로서 섬을 제외한 나머지 고려땅에는 몽고군에게 수탈당한 불쌍한 백성들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집권층의 의무 중 하나는 그런 혼란이 있을 때 대신해서 고통을 막아주는 것도 포함되는데 그들은 백성을 외면하고 떠나가버렸습니다.

한때는 친구였으나 강화도 천도를 두고 의견을 달리한 이규보와 유승단.

그 와중에 민란이 발생하고 초적과 노적이 일어납니다. 최우는 이자성(극중 백인철) 등을 시켜 그들을 토벌했지만 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하나의 세력을 이룹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대집성과 대립하던 승려 김윤후(극중 박해수)가 그 초적 세력의 일부로 묘사된 걸 기억하실 겁니다. 김윤후는 같은해 살리타이(이동신)을 살해하는 공적을 세우지요. 결국 최우의 무신정권이 강화도 항전을 결정한 그 순간 그 넓은 고려땅은 백성들에 손에 맡겨진 셈입니다. 그런 나라를 과연 왕의 나라이며 도방이 지킨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화도 천도가 '고려'의 이름을 지켰다 해도 그는 말그대로 '결과'일 뿐입니다.

왕궁 안에 거처를 짓겠다 우긴 도탄과 많은 공물을 요구하며 내정간섭을 해온 다루가치들의 횡포는 많은 부분 최우와 무신정권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또한 왕을 중심으로 권력을 재건하고 싶어하는 신하들이 일부 존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극중 등장인물 중 몇몇은 실제로 왕권 강화를 실행에 옮깁니다. 최우가 욕먹기를 각오하고 빅장의 형국을 이루기 위해 강화도로 향했을까요. 절대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라 봅니다. 대집성과 대씨부인(김유미), 그리고 만전(백도빈)과 만종을 함께 거두는 최우의 사람됨됨이가 그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드라마틱한 최씨 정권의 이야기, 그래도 강화도 천도는 미화할 수 없다.

최우는 오히려 최씨 무신정권의 집권을 위해 무리한 천도를 강행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합니다. 그가 욕먹기를 각오하고 다루가치를 김준에게 살해하라 지시하며 고종을 설득하는 건 후세인들이 바라는 왜곡된 영웅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몽고라는 거대한 세력에게 침략을 당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듯 최씨 정권이 집권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씁쓸하지만 그의 강화도 천도가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해도 그 본래의 의도 만큼은 미화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뛰어나게 제작된 드라마이지만 그 점이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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