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무신(武神)

무신(武神), 살리타이를 죽인 김윤후 여몽전쟁의 진짜 주인공은 초적?

Shain 2012. 5. 2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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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이 총 9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되고 사라졌습니다. 1231년 1차 침략 때 흥왕사가 불에 타버렸고 1232년 2차 침략 때 대구 부인사의 초조 대장경이 소실되었습니다. 3차 침략 때는 경주 황룡사 9층탑이 없어졌습니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1236년 몽고 침략 중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외세를 부처의 힘으로 막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문화재입니다. 고려의 국교가 불교인 만큼 무자비한 무력은 당해낼 수 없어도 정신적으로는 버텨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고려대장경이라 함은 고려에서 제작된 경전을 이르는 말로 총 세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습니다. 현종 때부터 만들기 시작한 초조대장경, 1096년 완성된 속대장경, 그리고 팔만대장경을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대구 부인사에 군대를 몰고 내려가는 몽고군 푸타우(조상구)가 '기껏 대구로 내려가서 팔만대장경인가 뭔가 하는 나무판대기나 태우라'는 대사를 하는데 '팔만대장경'은 그 이후 제작된 대장경 조판의 명칭이다 보니 의아하더군요. 수법스님(강신일)이 수기대사(오영수)에게 언급한 '고려장' 만큼이나 떨떠름한 대사였습니다.

수기대사에게 '고려장'을 언급하는 수법스님. 고려장은 정말 있었나?


드라마 '무신'은 기존 사극에 비하면 꽤 잘 만들어진 편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해야할지 시청자들이 지적할 수 밖에 없는 이런 오점들은 보는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늙은 부모를 구덩이나 산속에 버려 두었다가 굶어죽으면 장사지내는 풍습을 일컫는 '고려장(高麗葬)'이란 용어는 일제 강점기 때 조작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많은 서적에 진짜 '고려장'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되고 일제강점기 이후 신문기사를 뒤져봐도 '고려장'이 생매장이나 무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나 문헌이나 유적같은 확실한 근거는 없었다는 뜻입니다.

드라마는 무신정권의 최우(정보석)가 고려를 위해 결사항전을 결정한 것처럼 묘사됩니다. 또 새로운 아내 대씨(김유미)에게 홀딱 빠져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심약한 김약선(이주현)을 독촉하고 김준(김주혁)을 부인사에 보내 문화재 약탈에 대비하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주인공 김준은 귀주성 전투를 비롯한 각종 역사에 개입하여 마치 최우의 도덕점 약점을 보완해주는 듯 행동하고 있습니다. 민족적 자긍심이고 뭐고 이전에 '고려장'이라는 논란거리는 그대로 반영하고 무신정권을 옹호하는 듯한 이 태도는 김윤후(박해수)의 승병들에 대한 연출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살리타이의 명으로 부인사에 가는 푸타우. 팔만대장경이 벌써 있다고?


개경을 버리고 천도한 강화도는 전체 고려에 비하면 아주 작은 영토에 불과합니다. 그곳을 지키며 권력을 누린 최우의 무리들이 진짜 나라의 주인이었을까요. 아니면 고려를 걱정하는 마음에 술취한 김약선을 찾은 무력한 고종(이승효)이나 이장용(이석준)이 고려의 주인이었을까요. 그들이 아무리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한들 누가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진짜 고려를 지키고 몽고에 저항한 영웅들은 본토에 남아 몽고군에 맞선 백성들이란 점입니다. 살리타이를 죽인 김윤후야말로 고려정신의 뿌리인 것입니다.

몽고군들은 수없이 많은 고려의 문화재를 태웠고 많은 고려인들을 학살했습니다.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남아 저항아닌 저항을 하는 동안 많은 백성들이 그들에게 죽어갔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고려땅을 침략한 살리타이(이동신)의 죽음, 전율이 일어나는 김윤후의 보복은 보는 사람들을 속시원하게 해준 처절한 응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김윤후가 승병을 이끌고 백성을 이끌고 저항을 하는 동안 본토에 남은 최우의 군대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김준처럼 부인사를 지키러 달려갔을까요? 그런 기록 보다는 반란을 일으킨 백성을 토벌했다는 기록만 두드러져 보일 뿐입니다.



방호별감 김윤후의 활약, 진짜 여몽전쟁의 주인공들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귀주성의 영웅 김경손(극중 김철기) 장군은 극중 만전(백도빈)이 집권하자 살해당하고 맙니다. 김경손을 물에 빠트려 죽인 사람은 주군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는 송길유(극중 정호빈)였습니다. 초반에 김준을 격구장에 내보내며 거칠게 격려하고 최양백(박상민)과 함께 전장에 나가려한 용맹한 장수처럼 그려졌지만 사실 송길유에 대한 고려사 속 묘사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무신' 초기에 숯불로 발바닥을 지지며 승려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장면을 기억하시는지요? 그 장면은 고려사에 묘사된 글 즉 송길유의 고문장면을 유사하게 옮긴 것입니다.

김준을 칭찬하여 최우가 가까이 등용하도록 천거한 인물이 그 송길유와 박송비(극중 김영필)입니다.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의 변화 속에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그들은 권력을 이어갔습니다. 고려의 본토는 몽고군에게 유린되고 각 고을에서는 몽고군을 맞아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곤 하는데 끈끈하다 못해 끈적끈적한 그들의 관계는 가끔씩 보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할 정도입니다. 백성들을 버리고 자신들이 살자고 섬으로 숨어버리고 그 와중에 권력 유지를 위해 사람들을 바다에 빠트려 죽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죠.

여몽전쟁의 진짜 주인공들은 무신정권이 아니다.


드라마 '무신'은 강화도 천도의 처참함 즉 하염없이 내리는 장마비 속에서 고종이 질퍽질퍽한 갯펄을 걸어가고 송이(김규리)와 대씨 부인(김유미)을 비롯한 부유한 부녀자들까지 맨발로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처절하게 묘사했습니다. 강력한 외세에 고생하는 그들의 모습이 딱하단 생각이 들지만 정말 전쟁의 비참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강화도 천도 후에 일어난 '이통의 난'을 묘사했어야 했습니다. 강화도 천도 후 정권에 배신감을 느낀 백성들은 분노합니다. 충주에서 관노들이 난을 일으키고 이통은 초적과 노비, 승려를 모아 삼군을 조직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킵니다.

최씨 무신정권이 몽고군으로 인해 권력의 위협을 느꼈다면 몽고군에게 짓밟혀야하는 백성이 느낀 공포는 생명의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민중의 처지를 외면하고 고려를 함부로 한 그들은 오히려 장군 이자성(극중 백인철)을 보내 민란을 진압합니다. 자신들의 과오로 그들의 처지가 딱해졌단 생각이 죄책감이 그들에게 있었을까요. 상장군 대집성(노영국)의 처지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타깝게 초조대장경을 쓰다듬는 승려 진표(김정학)의 심정처럼 백성들의 마음은 타들어가는데 여전히 술을 마시고 국사를 농단합니다.

살리타이를 향한 분노에 찬 칼날.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이를 죽인 김윤후가 초적 출신이라던가 승군을 조직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극적 연출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김준과 함께 살고 홍지(박동빈) 등과 함께 초적을 꾸려 몽고군과 대립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 이전의 행적이 적혀 있지 않은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후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각처에 파견된 지휘관)이 되어 성안의 농민, 천민들을 지휘하고 몽고군을 격퇴합니다. 그는 '전공을 세운 자에게 누구든 관작을 제수하겠다'며 관노의 호적을 태우고 가축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지킨 진정한 영웅이자 의인다운 면모입니다.

몇주전 대집성이 김윤후를 일러 '초적(草賊)'이라 했던 것처럼 초적은 초야의 적, 즉 난을 일으킨 백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극중에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1차 여몽전쟁 때 마산 초적 5000여명이 최우를 찾아가 함께 몽고군과 싸우겠다 제안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화도 천도 이후 최우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무신정권이 개경으로 다시 천도한 후에는 삼별초들과 함류하기도 하죠. 여몽전쟁을 묘사하려면 최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응 보다는 이들 초적들의 대몽항쟁을 재평가해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속시원한 백성의 응징, 분노에 사무친 김윤후의 복수를 보면 볼수록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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