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슈발리에

슈발리에 속의 인물 VS 실제 인물(1) - 루이 15세

Shain 2007. 6. 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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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애니메이션 슈발리에에는 수많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반 정도 밖에 감상하지 못한 애니메이션이지만, 벌써부터 그 역사 속의 실제 인물과 얼마나 다르게 묘사되었는 지 설명하고 싶어 입이 간지러울 지경이다.

완벽한 인간은 유사 이래로 이 세상에 없는 법이고..
그가 가진 뜻이 완벽하게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 인물도 세상에 없는 법이거늘..
애니메이션 속의 그들은 정말 나라 만을 위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인물이 악인으로 설정되기도 한다는 점.. 그리고 서로 옳은 뜻을 가졌으므로 싸운다는 설정들이.. 어떤 면에선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역사는 좋게 해석할 까닭도 없고 나쁘게 해석할 까닭도 없이 .. 그대로 전해지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 해석을 달리 하는 것은 후대의 인간의 권리이므로.. 그것을 탓할 까닭은 없겠지.
다만.. 그랬다..라고 한번 더 쓸데없이 적는 거지..(슈발리에 데몽에 대해 적을 때가 가장 무서워..)

그 당시의 인물들은 대개가 잘 알려진 인물들이라 자료를 구하긴 어렵지 않다.
다만 수고를 덜기 위해 모아서 적을 뿐.. 더 자세한 자료가 알고 싶으시면 지금이라도 위키피디아를 눌러주세요

* Louis XV - 루이 15세
* 슈발리에 속에서의 루이 15세는 상당히 점잖은 사람이고 완벽한 권력자의 형태로 보인다. 권력에 관심이 많은 숙부 오를레앙공을 적절히 눌러줄 줄도 알고, NQM라는 국가의 기밀국을 운영해서 외교를 조절할 줄도 알며 부인인 마리에게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인다. 아직까진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과한 애정을 보인 장면이 없으나 현재도 정부로 둔 상태.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나온, 뒤바리 부인에게 빠진, 늙은 루이 15세의 주책맞은 모습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능력있는 젊은 왕의 모습이다.(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몰래 데몽 드 보몽에게 명령을 내려 의문사된 사람들의 비밀을 조사하게 하고 외교 활동을 진행하도록 뒷받침을 해준다. 프랑스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비밀리에 조사하는 목적. (초반에는 그리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아닌 셈이다. 후반에 데몽과의 갈등 상황에서야 자주 모습을 드러낼 듯.)
뒷부분의 내용을 보지 않았지만 초반 오프닝에서 등장하는 불타는 베르사이유와 힘없는 루이 15세의 운명은 앞으로의 프랑스의 미래가 심상치 않음을(프랑스 혁명의 복선) 알려주는 거라고 할 수 있으며 프랑스의 미래에 관련된 왕가의 시를 데몽을 통해 구하려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슈발리에에서의 상황이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실질적으로 이 왕의 시대의 사치와 풍요가 프랑스혁명까지 이어진 것으로 봐야할 탓인 거 같다. 극중에 등장하는 루이 오귀스트(후의 루이 16세)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힘없이 보이는 것은 그 까닭이겠지.
아마도 늙어서 호색왕(뒤바리 부인과의 관계같은)의 이미지로 변하고 프랑스 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왕으로 변한 것을 이 만화는 왕가의 시를 구하는 것에 실패한 까닭으로 처리할 모양이다.(과연 현실의 그에게 어울리는 변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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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의 루이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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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루이 15세

5살 때 왕위에 오른 왕이라서 꼭 이 사진을 넣고 싶었다. 형과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희한한 관계의 숙부 오를레앙공의 섭정을 받으면서 왕으로서 자랐다.
모든 왕의 어릴 때 모습이 그렇듯이 매우 귀여운 사진이라 꼭 넣어보고 싶었지.

" 루이 14세의 증손. ‘친애왕(le Bien Aimé)’이라 불렸다. 부르고뉴공 루이와 M.A.사부아의 아들로 베르사유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왕위에 오르자 오를레앙공 필리프가 1723년까지 섭정하였다. 섭정 때에는 루이(14세) 때의 전제에 대한 반동으로 자유와 해방감에 싸였고 언론이 활발해졌으며 신학 대신 철학이 일어났는데, 몽테스키외, L.S.볼테르 등이 정부나 제도에 대한 공격에 선봉을 섰다. 섭정 필리프가 1723년에 죽자 부르봉공이 뒤를 이었으나 1726년부터 왕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예리한 감수성과 두뇌를 가졌으면서도 루이 14세와는 달리 소심하고 방탕하여 엄격한 의식이나 정치를 싫어한 왕은 정사를 A.H.플뢰리에게 맡겼다. 플뢰리는 재정질서의 회복, 통화 안정, 무역 확대에 힘을 기울여 한때 국력이 회복되었으나, 폴란드계승전쟁, 오스트리아계승전쟁 등에 말려들었다. 7년전쟁 때 왕은 애인 퐁파두르의 진언을 받아들여, 숙적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고 영국과 싸웠으나 대패하여 신대륙과 인도의 광대한 영토를 잃었다.
왕은 전후의 재정 궁핍을 타개하기 위하여 특권자에게도 과세하려다가 파리고등법원과 충돌하였다. 왕의 전 애인 퐁파두르와 새로운 애인 뒤바리의 책략으로 추방당한 재상 E.F.de 슈아죌의 뒤를 이은 르네 드 모푸는 고등법원을 폐지하고 새로운 재판소를 만들며 연금의 난발을 막고 부동산세와 염세(鹽稅) 등의 징수로 재정적자를 메우려 하였다. 그러나 모순은 그대로 다음 시대로 이어져 점차 프랑스를 혁명의 길로 몰고 갔다"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5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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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와 연인들
성년이 되어 국사를 맡게 된 루이 15세는 추기경 플뢰리에게 모든 정책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1725년 8월 15일에 왕위에서 물러난 폴란드의 스타니슬라스 레친스키의 딸 마리 레슈친스카 공주와 결혼했다.

플뢰리는 즉각 오를레앙 공을 제거하고 콜베르주의 정책을 채택해 프랑스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플뢰리는 영토 확장에도 주력해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여 로렌 지방을 확보하였다. 1733년 폴란드의 왕이 사망하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색슨 선제후를, 프랑스는 왕비의 아버지인 스타니슬라스 레친스키를 새 왕의 후보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분쟁은 1738년 빈 조약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조약에 의해 마리아 테레사와 로렌 공 프랑수아의 결혼이 성립되었고 로렌 지방이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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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던 플뢰리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중인 1743년에 사망하자 루이 15세가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745년부터 루이 15세가 서거할 1764년까지 실제로 궁정의 대소사를 좌우한 것은 그의 애첩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20여 년 동안 프랑스 정치를 좌우했다. 그녀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후원하였고 정부 고관의 임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쇼아죌이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것도 그녀의 덕분이었다. 쇼아죌은 외교적으로는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예수회를 억압하고 얀센주의자와 국교회주의자, 계몽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등법원이 일으키는 각종 정치적 혼란과 왕권에 대한 도전을 해결하지 못하고 1770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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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복을 입은 루이 15세

* 사법 개혁
루이 15세는 쇼아죌을 해임시킨 후 대법관 모푸를 중심으로 고등법원에 대한 대대적인 사법 개혁에 착수하였다. 모푸는 1771년 2월 칙령을 발표하여 파리 고등법원의 재판 관할 구역을 6개의 신설 법원으로 분할시켰으며, 고등법원의 법관들도 국왕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재정 문제가 점점 약화되면서 모푸의 인기가 하락하였고, 그 결과 그의 사법 개혁도 실패하였다. 그 와중에 퐁파두르 후작 부인 외에 루이 15세의 또다른 애첩인 뒤바리 백작 부인이 나타나 정치에 개입하면서 국민들의 원성이 날로 더해갔다. 궁정의 사치와 계속되는 전쟁 때문에 재정이 더욱 악화되었고 새로운 과세안이나 증세는 고등법원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 말년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는 천연두에 걸려 몸져누웠으며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64살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당시 그가 운명했을 때에 어느 누구도 왕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 자녀들

  • 루이 엘리자베스(1727~1759) + 필립 부르봉 , 스페인 왕자
  • 앙리에타(1727~1752)
  • 마리 루이즈(1728~1733) / 요절
  • 황태자  ,루이 도팽(1729~1765) -> 루이 16세 , 샤를 10세 , 루이 18세의 부친
  • 필립(1730~1733) / 요절
  • 아델레이드(1732~1800)
  • 빅트와르 루이제(1733~1799)
  • 소피아(1734~1782)
  • 테레사(1736~1744) / 요절
  • 루이제 마리(1737~1787)

마리 레슈친스카와 초반에 사이가 좋아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후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기만 5명의 정부를 두었다. 이 10명의 자녀 중 마리 앙트와네트의 시절까지 살아있었던 루이 15세의 세 딸들은 결혼하지 않고 아버지 곁에서 살았다.


* 이미지 출처 :
http://ko.wikipedia.org/
http://en.wikipedia.org/
http://worldroots.com/brigitte/royal/fra-f.htm
http://platea.pntic.mec.es/~cvera/aplicacion/telemaque/histoire/LouisXV.html


* 내용 출처 :
http://ko.wikipedia.org/
http://en.wikipedia.org/
http://100.naver.com/100.nhn?docid=5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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