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외국의 스타 부부인 미란다커와 올랜드 불룸의 다정한 모습을 인터넷 뉴스로 본 기억이 납니다.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고 미란다커는 다른 남자를 사귀는 중입니다만 둘의 아이인 플린을 위해 오붓하게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은 단둘이 있을 때는 꽤나 썰렁한 모습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정말 행복해보였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과 아이에 대한 책임을 별개로 생각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 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사랑은 끝나도 아이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 한때 유행했던 '쿨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겠죠.
두 사람의 '쿨함'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요약하면 한국은 왜 이혼이나 불륜에 쿨하지 못하냐는 내용인데 우리 나라에선 이혼한 부부가 친구처럼 지내는 건 상상하기 힘들고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아이들은 부모의 불화에 시달리며 불안한 청소년기를 보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물론 안 그런 가정도 많지만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따말)'만 봐도 배우자의 불륜에 이혼을 결정하기 보다 갈등하며 사는 부부가 훨씬 더 많죠.
사실 서양인은 이혼과 불륜에 대해 쿨하고 동양인은 미련이 많다는 생각은 결과만 놓고 보자면 맞는 말인지 모르지만 서양 역시 불과 백년전만 해도(아니 50년전만해도) 불륜과 이혼에 대해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면만 놓고 보면 가정에 대한 생각이 우리 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죠. 그네들이 경제적인 위기를 겪고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며 가족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꿔나간 것이지 처음부터 달랐던 것은 아닙니다. 불륜 혹은 이혼에 대한 태도에는 가족이 깊이 관련된 경우가 많습니다.
따말, 불륜과 이혼에 대한 섬세한 보고서
극중 나은진(한혜진)의 올케인 윤선아(윤주희)는 시어머니 김나라(고두심)를 어머니라 부릅니다.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는 윤선아는 간통죄와 가족제도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논문 때문에 나은진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윤선아는 어떤 면에서 이 드라마가 짚어내고자 하는 '불륜'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인물이죠. 부부가 불륜에 대처하는 방법과 이혼을 비롯한 사회 현상은 여러모로 그 사회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서양사회가 개인주의화되면서 쿨한 이혼 부부가 나타났듯 한국은 가족중심 구조라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경향 이 있습니다.
나은진은 남들 눈을 의식하는 타입이라 성수(이상우)의 바람을 친정 식구들에게 말하지 않았고 친정식구들은 성수를 들들 볶는 은진을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여동생 은영(한그루)이 성수의 바람을 폭로하고 대학 선배인 영경(김혜나)이 상간녀와의 다툼을 목격하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죠. 부부 사이의 문제에 친정 식구들과 딸아이 윤정(이채미)까지 고려하게 되자 찻잔 속의 폭풍은 항아리 속의 폭풍이 되고 맙니다.
반면 고아나 다름없는 송미경(김지수)은 의지할 친정이라곤 송민수(박서준) 밖에 없습니다. 민수는 친어머니의 욕심으로 미경의 가정이 파괴되는 걸 보았기에 불륜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미경의 가정을 파괴하는 은진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등 든든한 친정이 되려 남몰래 노력합니다. 미경은 어떻게든 남편 재학(지진희)의 바람을 모른척하려 애썼고 사설업체를 시켜 재학의 뒤를 추적하고 은진과 같은 쿠킹클래스를 다니면서도 혼자 아픈 마음을 달랬습니다.
성수, 은진 부부가 사랑의 이상과 결혼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산후우울증을 슬기롭게 버텨내지 못하는 과정에서 바람을 피우고 갈등했던 것처럼 재학과 미경 부부 사이에도 엄청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회사를 책임진 오너 집안의 장남답게 어릴 때부터 의젓하게, 책임감있게 살도록 키워진 재학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완벽한 아내 미경에게 답답함을 느끼지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 부부에게는 그 무엇 보다 큰 갈등의 원인이 있는데 바로 재학의 어머니이자 미경의 시어머니인 추여사(박정수)라는 존재죠.
두 부부가 남의 이목이나 시어머니 혹은 친정어머니와의 관계를 신경쓰지 않고 자신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부부 사이를 일순위로 했더라면 가족의 행복이나 남들의 눈같은 걸 의식하지 않고 두 부부의 만족을 우선했더라면 최소한 의사소통 부재로 인하나 불륜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재학, 미경 부부는 특히나 솔직한 이야기 한마디 나누기 힘든 상황이고 미경은 친정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결혼에 집착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족을 꾸리고 살림을 했는데 막상 살림만했던 주부는 이혼이 힘듭니다.
은진이 먼저 이혼하자고 말하는 것과 달리 미경은 이혼하자는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습니다. 20여년간 뒷바라지 해온 가정이 그녀의 모든 것이기 때문 이죠. 송민수가 누나를 위해 뺑소니 사고를 저지르고 술취한 누나에게 막말하는 사돈 앞에서 과잉된 감정표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가족 밖에 몰랐던 미경이 남편의 배신으로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낄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옛어른들은 친정이 든든해야 며느리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죠. 민수는 그런 친정이 되어주고 싶었던거죠.
은진에게 '외도했던 남자랑 사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미경의 질문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은진은 성수와 대화를 나누고 '불륜'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미경은 재학과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어머니 추여사 때문에 더욱 불리한 입장이 된 상황이죠. '얼마나 자신없고 초라하고 못났으면 딴 여자랑 시시덕대던 남자랑 사니. 치욕스럽지 않아 ?'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퍼붓는 자기비하같은 것입니다. 영경이 증오하는 남편을 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미경도 남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흔히 한국에서 배우자의 불륜을 목격했으면서 왜 이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식 때문에 혹은 가족, 남의 눈 때문이라 대답한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하고 그 다음으로 자식들을 고려하는 외국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도 그 부분 이죠. 덧붙여 아내는 가정살림 만 한다는 사회적 현실도 불륜이나 이혼에 절대로 쿨할 수 없는 조건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를 외면하고 내연녀, 내연남에게 가정 불화의 책임을 떠넘기는 경향도 가끔 있습니다.
이혼한 부부를 '쿨하다'는 말로 애써 표현해도 절대로 쿨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배우자의 불륜에 화가 나고 상처받지 말란 법은 없겠죠. 그러나 그들의 개인주의 문화가 관계의 단절하거나 관계를 회복할 때 도움을 주는 것만은 사실인 듯합니다.
이혼한 부부에게도 미란다커, 올랜드 블룸 커플처럼 자녀들을 위해 '쿨함'이 절실한 순간도있습니다. 함께 사는게 더 행복하지 않을 땐 갈라서야할 때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를 가족 간의 문제로 확대시키거나 부부 자신의 행복 보다는 남을 먼저 고려해야하는 상황에서는 갈등이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억지로 봉합한 상처 안에서 자란 자녀는 행복할리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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