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수목드라마 경쟁은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발연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여배우, 이연희와 전지현의 대결이라는 면에서 주목받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드라마 제작진들의 경력도 남다릅니다. '미스코리아'의 권석장 PD는 '골든타임(2012)'으로 잘 알려진 연출자고 '별에서 온 그대'의 장태유 PD는 '뿌리깊은 나무(2011)' 등으로 유명합니다. '미스코리아'의 서숙향 작가는 '파스타(2010)'로 잘 알려져 있고 '별그대'의 박지은 작가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을 만든 스타작가입니다.
양쪽 드라마 제작진의 경력을 수치로 비교하면 물론 '별그대' 쪽이 앞서 있고(시청률 1위 드라마가 유난히 많은 연출자, 작가죠) 어제 방송된 1회 시청률도 '별그대' 쪽이 두 배 가까이 높았다고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여러 면에서 '미스코리아' 쪽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군요. 특히 '구가의 서(2013)' 이후 달라진 이연희는 이제서야 연기자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역할을 고른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어울렸 습니다.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드라마 주제와 신나게 연기하는 이연희가 상당히 보기 좋더군요.
미성년자에게도 신분증 확인없이 담배를 팔던 그 시절. 김형준(이선균)을 사로잡은 담게가게 아가씨 오지영(이연희)은 동네 남자 고등학교의 탑스타이자 여신 입니다. 오지영이 교정에 나타나자 남학생들은 휘파람을 불며 환호하고 방송반 남학생은 이문세의 '깊은 밤을 날아서'를 틀어놓습니다. 지영의 가게에서 솔 한갑을 사기 위해 오백원짜리 지폐 한장을 들고 선 남학생들은 오지영이 건내준 담배를 감사히 받아들고 돌아갑니다. 오백원 지폐는 본의아니게 연애편지가 되었구요.
담배를 필줄 모르는 김형준이 '날나리' 오지영에게 담배피는 법을 배우는 장면은 어제 방송분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순진한 모범생답게 담배한번 피워본 적 없는 형준에게 아름다운 오지영은 남자의 가슴을 달궈놓은 첫사랑인 동시에 신세계였습니다. 꼭두새벽에 혼자 여탕에 들어가면서도 그또래 흔한 여자애들처럼 수줍어하지 않고 입장권을 사는 오지영 - 담배 대신 소세지를 입에 물고 불붙이는 법을 알려주는 그녀에게 김형준은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김형준이 담배피는 법을 배우느냐 입에 댔던 소세지를 라이터불에 구워서 빨아먹는 오지영의 모습은 묘하게 선정적이면서도 귀엽고 동시에 청순했습니다. 10대의 김형준에게 오지영은 흔하디 흔한 남학생들의 로망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상징이었고 섹시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쫄딱 망해가는 화장품회사 사장 김형준이 생각하는 진짜 미스코리아죠. 이연희가 연기한 오지영은 그런 이미지에 딱 맞았고 같은 여성이 보기에도 예쁘고 귀여웠습니다.
1997년, 오지영은 드림백화점 엘리베이터걸입니다. 모범생 김형준이 고등학교 동창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채업자들에게 얻어맞는 것처럼 IMF 경제위기를 맞은 '예쁜' 오지영의 신세도 고달픕니다. 자신을 떠받드는 남자는 커녕 이용해먹으려는 남자들 뿐인 곳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기가 힘듭니다. 기업은 몸집을 줄인다며 엘리베이터걸을 없애려 난리쳤고 인생에 보탬안되는 박부장(장원영)같은 '새끼'들은 여직원들을 성희롱하고 당당합니다. 그런 오지영에게 마애리(이미숙)와 김형준이 미스코리아로 만들어주겠다는 제안
을 합니다.
생계를 위해 종종대다 퇴근하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을 추며 노는 오지영.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춤으로 풀고 비비크림과 클렌징 크림도 구분 못할 만큼 술에 취해 반질반질한 얼굴로 깨어나는 '왕년의 여신'은 과연 미스코리아가 될 수 있을까. 세상물정 모르게 생긴 김형준과 적당히 '싼티'나고 발랑 까진 오지영 커플은 이상하게 흥미 롭더군요. 예쁜 얼굴과는 달리 가벼운 오지영 캐릭터는 '너드' 느낌의 김형준과 찰떡궁합입니다. 두 사람의 나이차이가 열 세살이라는 기사를 얼핏 읽은 거 같은데 나이의 갭은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같아요.
이연희의 이번 캐릭터 선택은 탁월했습니다 - 무엇보다 이 드라마 '미스코리아'는 흥행과 상관없이 꽤 괜찮은 드라마가 될 것같습니다. 장선생 역의 이성민과 이선균, 마애리 역의 이미숙이나 고화정 역의 송선미 등 '미스코리아'에는 이연희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얼마든지 공백을 메꿔줄 연기자들이 잔뜩 있고 권석장 PD가 만든 드라마는 여러 면에서 섬세합니다. 1997년, 경제 위기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살기 위해 미스코리아에 매달린 사람들이 보여줄 모습 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원래 연기자는 자신이 가장 잘 연기할 수 있는 역할로 시작해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게 좋은데 그동안 이연희가 맡았던 역할은 부족한 발음을 드러나게 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거나 본인이 연기하기 불편한, 무거운 역이 많았죠. TV 드라마 연기자는 영화와 달리 감정 표현이 선명하고 발음이 분명해야 환영받습니다. 이연희는 이번에 외모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좋은 캐릭터를 골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페이스라면 앞으로 기대해볼만 합니다. 진작에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좋을 뻔했는데 말입니다.
어제 첫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연희였다면 그 다음은 푸른 수영복을 입은 '미스코리아'의 풍자적인 모습이 재미있었는데 마애리가 미스코리아 후보를 지하철에서 수영복 워킹을 시키던 장면은 묘하게 쓴 웃음이 나죠. 남들 앞에서 수영복입고 걷는다는 게 '벗는다'라는 의미로 느껴지던 그 시절 '이 길만 걸어가면 네 옆에 서 있을 남자의 레벨이 달라진다'는 마애리의 말을 듣고 활짝 웃으며 워킹하는 미스코리아. 그녀를 괴롭힌 건 지하철 승객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 유세단이었습니다.
'미의 여왕'을 뽑는다는 미스코리아의 의미와 아름다움은 파는 것이 되버린 그 시대의 풍경을 코믹하게 묘사한 그 장면은 결국 마스카라 범벅이 된 아가씨의 눈물로 끝나고 맙니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술집에서 직장 상사를 접대하는 오지영의 동료들처럼 싸게 팔아먹을 것이냐 비싸게 팔아먹을 것이냐 하는 문제. 극중 오지영, 즉 이연희가 미스코리아가 되기 위해 연기해야할 고통도 그에 못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죠. 뭐 이 정도로 '발랑 까진' 캐릭터라면 그런 역할도 잘 소화해 내리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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