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개과천선' 조기 종영, 스케줄 탓이 아니라 생방송 때문이겠지

Shain 2014. 6. 1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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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뉴스에 조금 관심이 있었던 분이라면 드라마 '개과천선'의 모델이 된 로펌이 어딘지 금방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위안부 배상 판결, 론스타의 은행인수와 세금, 재벌 2세의 성폭행, 동양증권 사태, 삼성 허베이스피리트 기름유출사고, 골드만삭스, 키코 사태 등 작게는 재벌가의 스캔들 뒤치닥거리부터 크게는 굵직굵직한 금융 범죄의 뒷마무리까지 - 대한민국의 유명 5대 로펌은 그런 사건에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특히 '개과천선'의 차영우 로펌처럼 건물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큰 규모의 로펌이자 법조계와 전관예우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곳, 그 로펌 출신은 반드시 정부 핵심 요직이 된다는 뜻에서 '장관 사관학교'로 불리는 로펌은 우리 나라에서 딱 한곳 김앤장 법률사무소 뿐입니다.

16부로 조기종영이 결정된 '개과천선'. 이게 김명민의 스케줄 때문이라고?

 

이런 면에서 MBC '개과천선'은 시청률과 상관없이 칭찬할 수 밖에 없는 좋은 드라마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면에는 '전관예우'와 해피아, 관피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때 박한철 헌법재판소장과 안대희 총리 후보의 '전관예우'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공직 퇴임 후 짧은 기간 동안 얻은 수익이 수억원대에 달하니 많은 사람들이 고액 수임료의 비밀을 궁금해했습니다. '개과천선'에서 차영우(김상중)가 유능한 판사와 관료를 차영우 로펌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그 인물이 법무부 장관이나 대법원장에 임명되게 하는 방법으로 법조계를 쥐락펴락하는 장면이 묘사되었죠.

전직 판사들은 대형 로펌에게 '재판에서 이기는 판'을 만들어주기 때문 에 몸값이 비싸고 대형 로펌은 인맥을 통해 자신의 로펌 출신 변호사를 정부 고위직으로 밀어줍니다. 고소 사건에서 한쪽이 대형 로펌의 전직 판검사를 내세우면 나머지 한쪽 역시 그만큼 '비싼' 로펌을 고용해야 밀리지 않습니다. 대기업의 비도덕적인 경제 범죄가 재판을 통해 처벌받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피해자는 보상을 제대로 못 받지만 천문학적인 수임료로 변호사들은 부자가 됩니다. '개과천선'은 기억을 잃은 한 대형로펌 변호사 김석주(김명민)를 통해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문제작입니다.

전관예우의 적나라한 현실이 드러난 드라마. 지금까지 이런 드라마가 있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좋은 드라마가 전체 18부작 중에서 무려 2회나 제작되지 않은채 16회로 조기종영한다구요? 김명민의 연기와 날카로운 법조계 묘사에 감탄하고 있던 저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파업 이후 드라마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듯한 MBC가 시청률 때문에 헛발질을 한 것은 아닌지 모델이 된 특정 기업과 인물이 정확히 연상되는 드라마 내용 때문에 어떤 외압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드러난 내용은 뜻밖에도 이주 간의 결방으로 인해 배우 김명민의 영화 촬영 스케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입니다.

제작사가 공식적으로 내놓은 해명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김명민이라는 배우가 연기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 촬영이 처음도 아니고 영화 촬영 시작 전 1, 2주의 시간을 비워놓지 못할 정도로 관리를 꼼꼼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거니와 2주 동안의 결방 때문에 스케줄이 밀렸다는 이야기도 이해가 안가는 일입니다. 세월호 침몰은 불의의 사고지만 월드컵과 지방선거는 이미 오래전 확정된 일정 입니다. 실질적으론 1주 간의 결방이어야 맞습니다. 아무리 촬영 현장이 빡빡해도 2주의 결방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융통성없게 스케줄을 짰다구요?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생방송 드라마의 고질병을 배우에게 책임전가?

아무리 봐도 이번 조기 종영은 석연치 않습니다. (원만하게 합의했다는) 김명민의 스케줄을 이주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해도 이 문제는 누가 봐도 제작사 쪽 실수가 큽니다. 이미 예정된 일주일의 결방을 고려하지 않고 제작 기간을 결정했다는 점도 문제였고 '너희들은 포위됐다'처럼 출연 배우의 부상이 아닌 이상 결방이 되면 대개 제작사들은 모자란 촬영 시간을 벌게 되는데 어째서 제작 시간이 빠듯하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빨리 끝내라는 방송사의 입김과 한국 드라마 고질병인 '생방송' 촬영이 빚어낸 촌극을 배우에게 책임전가한 것은 아닌가요?

'개과천선' 최희라 작가는 작품 완성도나 주제 면에서 완벽하나 성격이 꼼꼼한 만큼 대본이 늦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과거 '골든타임(2012)'이 늦은 대본으로 촬영시간이 부족해 방송사고가 났던 것처럼(그 때문에 '아랑사또전' 광고로 떼웠죠) 이번에도 소위 '쪽대본' 때문에 배우들만 혹사당하고 제작일정이 늦어진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김명민 측이 팬카페에 올렸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밤샘 촬영으로 이미 3회 때부터 몸이 아팠던 김명민은 각종 약을 달고 살며 촬영에 임했던 모양입니다

(팬카페의 비공식적인 글이라 전문 퍼오기는 곤란하군요)

.

'무명남'을 연기하던 3회부터 이미 지옥의 밤샘 생방송이 시작되었고 배우는 아팠다.

 

다행히 본문 중에 '쪽대본' 이야기도 또 대본이 늦었다는 이야기는 단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지만 워낙 촬영 자체를 늦게 시작해서 소위 '생방송'으로 촬영을 진행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인가 봅니다. '모두가 열광했던 "무명남"이 등장하던 3회부터 드라마는  거의 생방송 일정'이었고 '목요일 방송분을 목요일까지 찍어서 내보내야만 했던 현실,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말로 보아 이주 간의 결방으로는 도저히 18회 분량을 메꿀 수 없었기에 조기종영까지 결정한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기 종영이 '김명민의 스케줄 탓'이라는 제작사의 말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즉흥적인 막장드라마가 아니라 품격있는 사회고발성 드라마를 보는 것도 하나의 권리입니다. '개과천선'은 실제 현장에서 뛰고 있는 변호사를 연상시키는 김상중, 김명민의 연기나 똑똑하면서 재치있는 박상태(오정세), 열의는 있는데 현실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선희 검사(김서형) 등 자칫 무겁고 질리기 쉬운 현실적인 주제를 드라마라는 포맷에 아주 잘 녹여낸 드라마입니다. 시청률과 상관없이 대형 로펌의 현실을 짚었다는 것만으로도 2014년 최고 화제작이 될 수 있는 드라마 중 하나였죠.

법은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 과연 4회 만에 무명남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까?

어제 기사를 읽으니 '골든타임'과 '미스코리아(2013)'를 제작한 권석장 PD가 MBC를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한때 드라마 왕국이었던 MBC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건 시청률과 상관없이 드문드문 시청자들이 호평하는 명작을 배출해냈기 때문입니다. 이번 조기 종영 결정으로 전체 18부작인 '개과천선'의 이야기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기억상실로 가려진 김석주의 비밀과 진정한 법의 역할은 무엇인지 묻는 질문들이 간단한 줄거리로 축소되버리는 건 아닐까요?

'드라마'라는 콘텐츠를 만드는 소프트웨어가 작가와 배우들이라면 제작환경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하드웨어라 볼 수 있습니다.소프트웨어의 품질이 아무리 발전해도 하드웨어가 '쌍팔년도' 수준이면 드라마 발전은 불가능 합니다. 미국에서는 극적 재미를 위해 일부러 진짜 '생방송' 연출을 시도한다는 이 시대에 한국에서는 언제쯤 쪽대본과 생방송이라는 용어가 드라마 판에서 사라질까요? 생방송 촬영해도 아무 문제가 없으면 다행인데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드라마 품질 떨어지고 시청자 만족도가 낮아지니까 고질병인 것입니다. 이번 조기 종영은 배우탓을 하기 보다 무리하게 일정을 조율한 제작사에게 몇배의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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