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사연 있어 보이는 왼쪽 눈 아래의 상처는 붉은기가 남아 있는 것이 아무래도 생긴 지 얼마 안 된 흔적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특별한 무언가에 긁혀서 붉은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요. 드라마 '대박부동산'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대박 게스트 김미경 배우는 이번에 청염 염사장 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심하고 털털하게 한마디씩 내뱉는 배역인 데다 대나무 숲 작업실에 자리 잡고 퇴마 관련 물품을 만드는 모습이 심상치 않군요. 퇴마 물품을 상자채 만들어 파는 걸 보니 이 사업도 대단한가 봅니다. 그녀는 오인범(정용화)의 목걸이를 만든 당사자였습니다.
이번 드라마는 배우 장나라가 유난히 어둡고 힘든 표정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웃는 얼굴로 등장한 걸 한번도 못 본 듯해요. 극 중에서 언급한 대로 처음 퇴마를 시작할 땐 남 걱정도 많이 하고 경찰에 범죄 고발도 자주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남의 일에도 무심하고 상대가 무슨 이야길 해도 무표정하게 넘기며 화나면 아예 대놓고 멱살잡이를 하기도 합니다. 거의 20년 넘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하며 홀로 이리저리 치이는 게 정말 안쓰러운 배역이죠. 그런 배역 '홍지아'에게 염사장이란 캐릭터는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 같아서 보기 좋네요.
이제야 말이지만 아무리 내가 액티브한 것보다 잔잔한 드라마 취향이라지만 '대박부동산' 13회의 분위기는 정말 참기 힘들었습니다. 주화정(강말금)이 도학성(안길강) 때문에 죽을 뻔하고 대박부동산에서 20년 전 일어난 일을 홍지아(장나라)가 알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원혼 중에 최악이라는 달갈귀도 무서웠지만 웃을 일없는 장나라 캐릭터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안쓰럽더군요. 더군다나 원귀에 대한 드라마다 보니 매번 죽은 사람이 여기저기 떠도는데 홍지아는 이대로 정말 살아야 하는 걸까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고 엄마가 죽은 사건을 기억마저 뒤바꿔 기억하는 홍지아에게 주화정의 말처럼 숨기고 감추는 게 옳은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퇴마를 위해 엄마를 찔러야 하는 일이 어린 여자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은 맞았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 시간이 20년이고 보니 엄마의 원귀가 자신을 떠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체 고민하는 홍지아. 그녀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원귀의 습관을 따라 하면서 정신적,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간다는 걸 주화정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혼자 버티기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죠.
이번 주 염사장은 지아에게 명언을 남기죠. 주화정에게 뒷통수 맞고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네'같은 생각에 빠진 홍지아. 청염에 와서도 혼자 산책을 하거나 방에 오롯이 등불켜고 앉아있는 일이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평소에도 그랬습니다. 원귀를 퇴치하기 위한 일상이란 위험하지만 단조롭기 짝이 없습니다. 낮에 느즈막히 일어나 엄청난 양의 식사를 하고(그것도 혼자 아니면 둘만 먹죠) 밤에는 원귀를 쫓으러 다니고 홍지아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풍경좋은 청염에 가서도 멀리 가지 않고 산책만 합니다.
이번주 염사장은 홍지아에게 명언을 남겼죠. '곁에 사람 하나 없이 혼자만 살면 그게 원귀랑 다를게 뭐야'라는 염사장의 말은 정확하게 홍지아를 파고듭니다. 지금까지 원귀처럼 우울하게 대박부동산 건물에만 틀어박혀 사는 게 엄마 때문이라는 핑계라도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자기가 딱 원귀입니다. 보통 영혼은 살아있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거나 무언가를 주고받기보다 죽기 전에 하던 행동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죠. 그렇게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같은 일만 반복하는 모습. 홍지아는 엄마를 보낼 수 없어 그렇게 잡고 있었다는 건 몰랐던 겁니다.
속된 말로 귀신이라 불리는 존재들 - 극 중에서도 자주 나온 말이지만 귀신은 보통 맺힌 게 있어 구천을 떠돈다고 합니다. 드라마에 나왔던 대로 여기저기 부유하기도 하고 한 곳에 머물며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채 의미 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혹은 어떤 홍미진(백은혜)처럼 딸이나 양창화처럼 창화 엄마(백현주), 오성식(김대곤) 사람에게 붙어 원망을 쏟아 붙기도 하고 걱정스레 바라보기도 합니다. 지난 13회에서 홍미진이 지아 옆에 붙어 있는 이유를 알고 보니 여기서 옛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장례를 번잡하고 시끄럽고 사람 많게 치르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을 잡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곁에서 그런 생각 하지 말라 위로하며 슬픔을 달래주라는 것이죠. 극 중에서도 할머니를 잃은 오인범(정용화)나 아들 잃은 창화네 부부를 위해 사람들이 찾아가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죽은 사람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 상황이 맺혀서 오히려 원귀가 떠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렇게 슬퍼하는데 어떻게 나 없이 살려나 싶겠죠. 기억을 잃긴 했어도 엄마가 죽은 그 상황이 홍지아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고 얼마나 맺힌 고통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생각해보면 퇴마사라는 자신의 타고난 업 때문에 홍지아를 갑자기 떠난 엄마 홍미진도 그 때문에 갑작스레 고통받는 홍지아도 퇴마사라는 업이 왜 물려받았을까 싶을 것입니다. 타고난 영매라는 오인범은 그나마 잘 홀리긴 해도 자신이 겪은 일을 잊어버리면 됩니다. 물론 전혀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오인범에겐 허지철(강홍석)이란 친구가 있고 나름 귀신 사기 치면서 즐겁게 먹고살았죠(물론 홍미진이 준 목걸이도 한몫했습니다). 그러나 홍지아는 옆에 사무장이 있어도 먹고 마시며 검은 구두 컬렉션을 모으는 것으로도 인생을 즐겁게 살기 힘들어했습니다.
홍지아는 엄마를 이해하기도 전에 떠나보냈습니다. 내 나름대로는 왜 엄마가 떠나지 못하는지 이해한 지아가 염사장의 도움으로 엄마와 마지막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염사장 얼굴의 상처는 아무래도 귀침(홍지아가 머리에 꽂고 다니는 물건을 그렇게 부르더군요 - 귀신을 찌르는 침은 어쩐지 종류가 많은 듯합니다) 같은 날카로운 물건에 긁힌 상처인데 그녀 역시 퇴마 관련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주화정의 아이 문제도 미스터리입니다. 주화정과 홍지아의 접점은 누가 봐도 홍미진이고 주화정은 경찰 앞에서 제법 덤덤하게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고 회상한 기억이 있습니다. 경찰인 정팀장(조승연)은 그럼에도 주화정에게 도움을 줍니다. 딸 대신 홍지아에게 집착하게 한 사연도 꽤 궁금하죠.
자 이제 마지막 회가 얼마 남지 않은 '대박부동산'. 재미도 흥미도 대박인데 이 우울한 분위기만큼은 어쩔 수 없군요. 방송 내내 원귀들 때문에 늘 밤에 촬영되고 시커먼 장면이 많았습니다. 남은 숙제는 어서 빨리 홍지아가 엄마를 떠나보내고 주화정의 속사정을 듣고 오인범과 영매 퇴마사 짝꿍이 되는 것뿐입니다. 그런 관계의 정립을 바라는 이유는 누가 머래도 주화정은 홍지아에게 최고의 도우미고 오인범만큼 퇴마사 홍지아를 잘 이해해줄 인물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대박부동산 퇴마팀이 4명이 되고 도학성이 잡혀가는 그날이 이 드라마의 진정한 마지막 회겠죠. 그때는 홍지아가 웃는 장면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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