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서 SBS '추적자'는 삼관왕의 영광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연기자 부문에서 손현주가 개인상 을, 중단편 드라마 부문과 공로상을 각각 수상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연기자 손현주로서도 작가 박경수나 제작자 조남국 PD로서도 '추적자'는 정말 뜻깊은 드라마였고 지금 '황금의 제국'을 제작하는 그들의 저력도 '추적자'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배우 손현주는 드라마 '추적자'의 의미를 되새기는 듯 '이 시대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개미들, 힘내길 바란다'라는 수상소감을 한번 더 전해주었다고 하지요.
생각해보면 사람을 '개미'에 비유한 손현주의 말이 재밌습니다. 일개미는 하루종일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규칙에 따라 부지런히 먹을 것을 옮기고 굴을 파고 새끼들을 돌봅니다. 그러나 개미들은 아무 생각없이 움직인 인간의 발걸음 한번으로 밟히고 목숨을 잃습니다. 가끔은 재미삼아 괴롭히는 어린아이 장난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목숨바쳐 일해도 개미집단의 먹거리는 일개미의 몫이 아닙니다. 개미집단의 여왕개미는 일개미들에게 그렇게 말하겠지요. 이것은 '개미' 종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고 각자 역할이 다른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드라마 '추적자'는 특권층에게 짓밟힌 개미들의 슬픈 승리를 묘사한 드라마라면 '황금의 제국'은 개미들이 수고스럽게 모은 먹을 것을 독점하는 그 상위포식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작고 작은 개미에게는 세상을 뒤덮는 그들의 더러운 신발 밑창만 보일 뿐이지만 개미가 보지 못하는 그 위에도 또다른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이 있고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그곳에도 패배자와 승리자는 있습니다.'추적자'는 그 특권층을 법이라는 제도 앞으로 끌어내린 개미의 이야기인 반면 '황금의 제국'은 특권을 두고 겨루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장태주(고수)는 한마리의 개미에서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려는 도전자가 됩니다. 살인까지 저지른 가난한 그와 처음부터 귀했던 최서윤(이요원)의 경쟁은 선과 악의 대결도 아닙니다. 내 집을 갖고 싶다는 소시민의 작은 욕망에서 한 나라을 좌지우지할 만큼 엄청난 재산을 갖고 싶다는 재벌 상속자들의 욕망까지.그들의 욕망은 그 크기와 재능이 다를 뿐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법이라는 제도에 꼬리를 잡히지 않고 자신의 인맥과 돈으로 덮을 수 있을 만큼만 저지르면 됩니다.
친일파인 '마름'의 자식으로 태어나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는 서정주의 시 '자화상'처럼 그들은 점점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망가져도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맨땅에서 노다지를 캔 창업주 최동성의 후계자가 성진그룹을 갖는 것이 당연한가 아니면 부동산에서 부풀려진 돈으로 성진그룹에 도전한 개미의 아들이 성진그룹을 갖는게 당연한가.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원칙에 대한 것이라기 보단 씁쓸한 우리 시대의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벌이 가진 황금은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욕심도 있고 지위도 있지만 무능한 최원재(엄효섭)나 경영에 대해선 눈꼽만큼도 모르는 철부지 장녀 최정윤(손동미)이나 큰아버지를 물리치고 성진그룹을 차지하고 싶었던 사촌 최민재(손현주)나 전쟁고아에서 재벌이 된 최동성(박근형)이 지정한 유일한 후계자인 최서윤이나 욕망의 무게는 똑같습니다. 복잡한 상호출자 제한과 주식소유 제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차명계좌와 친인척, 가신을 활용해 그들의 지위를 고수합니다. 장태주의 말대로 지주회사 주식의 절반을 사버리면 되지만 미묘한 제약과 경쟁구조가 욕망을 부추 킵니다.
'황금의 제국' 주인공 장태주(고수)가 대학졸업반이던 시절 시작된 성진그룹과의 경쟁은 이제 막바지입니다. 성진시멘트의 자산을 가장 많이 손에 쥔 장태주가 성진가족이 아닌 장태주로, 윤설희(장신영)에게 돌아가겠다고 하자 그동안 다투던 최씨 집안 사람들은 한통속이 되어 장태주를 몰아가기 시작합니다. 장태주의 앞길을 막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혈연이었습니다. 포도밭에서 배불리 포도를 먹은 여우는 굶어서 배를 홀쭉하게 만들거나 포도밭 안에서 그냥 사는 수 밖에 없다는 최서윤의 비유처럼 장태주는 발목이 잡힌 상황이었습니다.
재벌이 가족에게만 그 지위를 물려주는 이유는 역시나 혈연 만큼 강력한 결계는 없기 때문 인가 봅니다. 장태주는 에덴을 통해 재개발 사업을 시작하고 성진시멘트 주식을 사들이려 돈을 벌지만 최씨 형제들의 견제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들 가족이 쌓은 명성과 그들이 다진 인맥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다 못해 감옥에 들어앉아 양갱이나 집어먹는 최동진(정한용) 조차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성진 다른 누구에게 넘어가는 걸 보느니 차라리 이익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합니다.
마치 왕처럼 군림하며 자신의 아버지가 성진그룹 식구들과 대한민국을 먹여살렸다는 최서윤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 맞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진그룹은 최동성 한사람이 만든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든 것이라는 장태주의 주장도 동시에 맞는 말입니다. 주가를 조작하고 차명계좌를 활용하고 정부와 재계에 돈을 퍼붓고 권력을 행사하는 재벌은 분명히 틀렸습니다. 무능한 후계자로 인해 자살위기로 내몰린 서민이 얼마며 황제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주가 조작에 들러리선 '개미'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흥미로운 건 장태주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반응입니다. 꽤많은 분들이 장태주가 성진에 아무 권리가 없으며 그룹은 당연히 최서윤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서윤의 말대로 '혁명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일까 조필두(류승수)의 말처럼 '종놈이 대감집 안방차지하겠다고 나서니까 같은 집 종놈이 앞을 막는' 것일까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어쨌든 장태주는 재벌 가족의 정체를 '벌레'라 합니다.개미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들을 더욱 오만하게 만든다 는 뜻일 것입니다. 어쩌면 장태주의 도전은 승부를 떠나 개미를 함부로 짓밟는 '벌레'들에 대한 경고라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연출이 아니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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