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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의 아들 보종은 동성애자였을까?

Shain 2009. 6. 2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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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설원랑의 아들로 등장하는 화랑 보종. 드라마에서 미실의 남편인 세종전군과 애인인 설원랑은 서로 갈등하고 하종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 때문에 설원부자를 무시하기도 한다. 이는 약간 어긋난 설정으로 두 아들 모두 어미(미실)의 신분을 물려받은데다 왕의 마복자인 하종과 보종은 두 사람 모두 전군이고 사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다(서로 나이차이가 제법 나고 설원랑이 하종의 장인이다). 미실이 세종과 설원의 아이를 마복자로 만든 것이니 서로 원망할 상황은 못 되었다.

세종, 설원, 하종, 보종은 모두 공통적으로 화랑 풍월주에 오른 적이 있는 미실의 측근들이다. 이들은 아름다운 원화를 풍월주로 대신한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모두 '한 인물'하는 화랑들이다. 꽃이란 단어가 들어간 화랑(花郞)의 이름대로 아름다움이 유난히 강조되었고 금장신구 착용과 화장에도 능하였다. 선덕여왕 제작시 드라마 속 화랑을 모두 꽃미남으로 채우려 하였으나 비용이 모자라 무산되었다는 웃지 못할 기사까지 있다(오죽하면 엄태웅이 꽃미남이 아니라 화랑같지 않다는 말까지 나올까).

미실의 막내 아들인 보종은 설원랑의 아들로 풍월주 자리에 올랐으나 드라마에서처럼 무공을 세웠단 글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공이나 화랑으로서의 덕 보다는 미실궁주에게 사랑받는 아들, 진평왕의 마복자로, 남을 잘 따르고 모시는 화랑으로서의 모습이 강조된다. 위작으로 의심받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대표적인 '동성애자'로 지적당하는 화랑이 바로 보종이다. 아무리 고대사의 기록치고 꽤나 노골적인 화랑세기라지만 이런식의 묘사는 신기하기까지 하다.

MBC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보종랑(백도빈). 화랑 풍월주 자리에 오른 보종은 미실의 막내 아들로 귀여움을 한몸에 받았고 어머니인 미실을 몹시 사랑했다 한다.


고대 사료에서 동성애를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로 강력한 유교국가였던 조선 조차 그런 부분이 발견될 정도다. 자유분방한 성문화를 특징으로 삼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엔 그리 희귀하지 않은 일이었던 듯하다. 최근 방송중인 'KBS 천추태후' 등장하는 개령군(목종) 역시 어머니에게 권력을 넘기고 동성애에 빠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 역시 그런 기록이 있다 하나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 부분도 있다.


남자를 사랑한 보종의 친우들, 호림, 염장, 유신

남성집단인 화랑은 원래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겠느냐 짐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세히 전하는 글은 몇개 사서 뿐이니 추측만 할 수 있다. 천광공에 대한 기술에 그런 부분이 있고, 진지왕이 남색을 즐겼다 추측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사다함이 무관랑의 죽음을 슬퍼하다 7일 만에 따라 죽었다는 내용은 원래 유명하였지만 보종은 유독 여자를 싫어하고 남자만 곁에 두었다한다. 화랑세기는 보종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공의 성품은 청아하였다.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었으며, 온화함과 순량함은 마치 부녀자와 같았다. 사람들이 병들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마치 자기가 아픈 것 같았다. 새와 짐승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한 마리의 벌레나 한 포기의 풀도 해친 적이 없었다. 선과 악, 이와 해를 나누지 않았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늘 작은 청려靑驢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시가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진성공자眞仙公子'라고 하였다. 얼굴은 관옥과 같았고 손은 마치 하얀 새싹과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호림이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다.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출처 : 화랑세기(대역), 이종욱

보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고 가까이 지내지 않았고, 고기도 즐겨 먹지 않아 콩죽을 먹었다한다. 풍월주 호림공의 부제였던 보종은 풍월주가 되어 염장을 부제로 삼았고, 김유신 역시 보종을 부제로 삼았다. 보종은 특이하게도 자신의 아내 현강(윤궁의 딸)과 자신을 좋다 따라오는 하종의 딸 하희를 거부하여 자신의 풍월주 호림과 부제인 염장공에게 사통하게 했다(그러나 양명공주와는 딸을 둘 낳았다).

호림공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제인 염장과도 이리 어울렸는데 자신 보다 여섯살이 어린 염장을 형처럼 대하고 섬기며 염장의 말은 모두 들어주고 부부와 같은 정을 나눴다 적고 있다. 보종을 대신해 낭도들을 다스리고 키가 보종 보다 커 보종을 아이처럼 업어주었다는 염장은 보종의 일을 모두 대신하였다. 후에 보종의 재산을 자신의 재산처럼 쓰며 살았다 한다.

김유신과도 특별한 관계가 있어 풍월주를 미실궁주가 보종을 유신에게 부탁하자 유신이 오히려 보종을 치켜세웠다. 호국 성격의 화랑도를 유신이 강조했다면 선을 강조한 것이 보종이었다 한다. 알천, 임종, 술종, 호림, 염장, 유신, 보종이 모여 칠성우가 되고 그 칠성우가 국사를 논했고 보종의 의견을 유신이 존중했다. 유신이 병이 나자 특별히 직접 치료했다고도 적혀 있다.


교태가 부인과 같았다는 24대 풍월주 천광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는 상호 이익을 최고로 도모하기 위한 관계였으니 그 섬김이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까지 그 둘의 각별함이 기록되어 있지만 사다함이나 보종, 천광의 경우처럼 선명하게 기재된 것이 아니다.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라고 기록된 천광은 보종 보다 성격은 강단있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자신의 뜻을 과감히 실현했다고 한다.

화랑이 되자 양도공이 천광을 좋아하여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양도공의 폐신(嬖臣 : 임금에게 아첨하여 신임을 받는 신하, 여기서는 사랑받는 신하를 뜻한다)이 되었다 한다. 뛰어난 미모를 지닌 누이 천운을 양도공에게 시집보내고 화랑의 부제로 풍월주로 승승장구한다(양도공의 총애를 받은 듯하다). 보종과 달리 아내와 첩을 두어 자손을 번창했다고 하니 '부인과 같았다'는 단지 아첨하는 성격을 묘사하는 말일 지도 모른다.

교태가 부인같다는 표현과 외모가 여성스러웠던 보종의 묘사를 읽으면 드라마 속 과격한 알천랑같은 화랑습은 도무지 연상되지 않는다(하긴 알천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타입이었다 한다). 전쟁의 최일선에 섰다는 화랑들도 많았을텐데 어떤 이유로 보종같은 인물이 기록된 것일까? 신라의 유물을 파헤쳐 보면 동성애를 연상할 수 있는 물품, 그러나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나타나곤 한다. 정확히 기술되지 않은 그들의 '사랑'은 어떤 성격의 것이었을까?

MBC 선덕여왕의 알천랑(이승효). 신라군의 선봉으로 전장에서 후퇴하지 않고 영리하고 용맹하게 지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진덕왕 때의 상대등으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김춘추에게 양보한다.


드라마에서 전쟁의 달인으로 아막성 전투 선봉에 서는 알천랑의 모습이 인기라 한다. 양도공과 부부와 같은 정을 나눴다는 천광에겐 이 알천랑같은 노련한 전쟁 수완이 있었는지 비담의 난이 일어나자 유신을 부하로 두고 낭도를 동원하여 돌격하였다 한다. 그 일로 천광은 호성장군으로 입성하고 재상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과연 화랑은 어떤 성격의 집단인가?

신라의 성문화의 기준은 오늘날과 확연히 달라 그들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문란'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화랑이 아름다움을 숭상한 것은 원화와 고대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쳐도 젊고 혈기 왕성한 남성집단에서 '동성애'와 가까운 표현이 자주 나오는 건 어떤 까닭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랑들 간의 언약을 적은 '임신서기석'을 비롯한 여러 사료를 보아 넘치는 신뢰를 강조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조금은 과하다 싶은 김춘추에 대한 김유신의 충성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다.

화랑 간의 사랑을 동성애로 추정할 수 있는 향가는 '모죽지랑가'와 '득오곡' 같은 것이 있다. 또한 조선의 성호 이익은 '화랑의 남색'을 개탄한 바 있다. 동성애의 존재 여부는 '확신'이 불가능한 지 몰라도 화랑이란 집단을 당시대의 시선에서 재조명하면 '가능할 것'이라 추측된다.

동성으로 이루어진 집단(궁녀, 군인, 남자 광대)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 중 하나가 동성애이고 보면 또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파벌을 이뤄 낭두를 따르고 오랜 시간 화랑의 도와 무술 수련을 연마하는 화랑의 속성을 따져봐야한다. 여러 파벌로 나누어 무리를 짓기에 충성과 의리를 강조하는 집단 특성에 따라 유독 그런 현상이 도드라졌던 것일 수도 있다.

화랑에 대한 해석은 시대별로 달라져 한때는 목숨 걸고 신라를 지킨 군사로(관창 등) 한때는 조정에 신하를 등용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수련 제도로, 또 어떤 시대에는 무인들이 모여 도를 논하고 무술을 연마하는 무리로 생각했다. 최악의 평가는 귀족들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사병으로 파벌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풍류를 즐긴며 노닥거리고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운영하던 사람들이란 것이다. 그런 화랑이 동성애를 공공연히 누렸느냐 아니냐는 화랑의 성격을 규명하고 난 후에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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