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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 블록이 나온 영화 'Crash(2004)'는 각기 다른 인종들 간의 충돌을 그리고 그 상관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충돌(Crash)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지 인종 간의 문제란 편견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영화 내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손해본 민족은 '한국인'이라며 웃는다. 인신매매나 하는 돈벌레에 악을 써대는 한국인 부부는 전혀 착한 역할이 아니었다. 인종과 처지가 다른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영화는 없는 모양이다.
민족, 인종 간에 이유없이 차별하고 학살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들은 많다. 80년대엔 유태인을 학살하는 나치를 비난하는 영화가 유난히 많았다. 많은 영화는 당연스레 나치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유대인을 조명했다. 세계적 계몽 시대라 해도 좋을 만큼 90년대까지 우리들은 인종과 편견을 극복케하는 문제작들을 보아왔다. 'The Color Purple(1985)'같은 80년대 영화를 보며 흑인들의 슬픈 역사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 가치관을 지닌 존재인가. 실제 역사를 뒤져 보면 나치는 무조건 악랄했고 유대계는 무조건 선한 사람이란 등식은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 백인은 무조건 가해자고 흑인은 무조건 피해자란 등식도 불가능하다. 인간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면 이분법적 교훈은 의미가 없다. 히틀러를 죽이고 싶어한 독일군 장교도 영화의 소재가 된다. 그래서 시대는 이 영화처럼 화합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때 힘들어한다. 각자의 입장이 모두 다르기에.
'프리덤 라이터'의 영화 속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1992년 LA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른들을 따라 아이들은 총을 들고 갱처럼 갈라져 싸우며 18세가 되기전에 죽지 않고 졸업하는 자체가 쉽지 않다. 폭력적인 그들은 자신의 '편'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비난하고 죽이는 걸 서슴치 않는다. 자리 조차 갈라 앉으니 애초에 학교 수업은 불가능하고 교사도 정부도 그들을 포기한다. 학교는 법적 한계 안에서 그들을 다룬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의 내면은 수없이 많은 상처 뿐이다. 소중한 가족,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지독한 경제적 난관으로 힘든 삶을 살아야하며 사회 여기저기서 행해지는 폭력과 차별에 맞서야 한다. 그들 중에는 보호받지 못하고 스스로 그 위기를 이겨야하는 아이들이 많다. 풍족하게 보호받으며 마약살 곳이나 들락거리는 백인 아이와 그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대조적이다. 아들에겐 학교 교육 보다 생존하는 일이 훨씬 중요한 문제다.
동시에 아이들의 모습 중 가장 마음이 아픈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집단 이지메'의 풍경이다. 입술이 튀어나온 흑인 아이를 조롱하는 그림으로 아이들은 킥킥거리고 교사인 여주인공의 지적에도 큰 잘못이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롱받는 처지이지만 상대방의 입장을 알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편견과 무지를 지적하는 교사에게 백인인 그녀는 절대로 자신들의 처지와 입장을 알 수 없다고 울먹인다. 외모와 인종 때문에 차별받는 아이들이 같은 논리로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모습은 어쩐지 마음이 아프다.
이런 아이들이 자신들의 태도를 바꾼 건 이혼까지 불사하며 희생한 교사의 적극적인 노력덕이기도 하지만, 다투고 있는 자신들이 똑같은 슬픔을 겪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라는 아이들 자신의 깨달음과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또박또박 적어내려가는, 글쓰기 덕분이기도 하다. 교사라는 등불이 있음을 알게된 아이들은 순순히 그녀의 지도를 따르게 된다. 미프 기스의 표현대로 평범한 그 고등학교 아이들은 옳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노력한 진정한 영웅들이 된다.
변화가 가능함을 알게 된 아이들은 후반부엔 교사 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갈 방향을 찾아 낸다. 교사 에린의 아르바이트로 돈을 구해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다녀온 후 안네 프랑크를 숨겨준 사람을 초청하기 위해 아이들끼리 돈을 벌고, 자신들의 변화를 위해 가족과 화해하며 인종의 이익과 차이를 넘어 옳은 일을 하려 노력한다. 라틴계 여자아이인 에바는 목숨을 위협받으며 증언하고 멀리 떨어져 살게 된다.
미국, 그리고 세계의 어느 곳도 차이로 인한 갈등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차이는 차별을 불러오고 더 큰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차별과 차이를 해소하는 것 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를 위로하고 솔직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먼저 돌보려 한다면 그 과정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 차별받는 이를 위해 제도적이든 직접적이든 길을 터줘야한다, 1994년의 아이들은 기회를 얻었고 방법을 배웠다.
처음 영화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교훈과 감동을 강조하는 훈계조의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한 건 사실이다. 갈등을 극복한 많은 이야기들이 그 구조를 따르고 있고 이 영화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사실성을 강조하며 진행했지만 일면 그런 경향은 있다. 그렇지만 불행한 경험을 한 고등학생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본다면 무리없이 그 부분은 넘길 수 있다. 영화엔 홀로코스트 생존자 등은 실존인물이 그대로 출연했지만 안네 프랑크를 살려준 Miep Gies(2009년 현재100세) 역은 다른 배우가 맡았다.
민족, 인종 간에 이유없이 차별하고 학살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들은 많다. 80년대엔 유태인을 학살하는 나치를 비난하는 영화가 유난히 많았다. 많은 영화는 당연스레 나치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유대인을 조명했다. 세계적 계몽 시대라 해도 좋을 만큼 90년대까지 우리들은 인종과 편견을 극복케하는 문제작들을 보아왔다. 'The Color Purple(1985)'같은 80년대 영화를 보며 흑인들의 슬픈 역사를 고민하기도 한다.
실제 '프리덤 라이터'의 모델이 된 교사와 학생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 가치관을 지닌 존재인가. 실제 역사를 뒤져 보면 나치는 무조건 악랄했고 유대계는 무조건 선한 사람이란 등식은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 백인은 무조건 가해자고 흑인은 무조건 피해자란 등식도 불가능하다. 인간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면 이분법적 교훈은 의미가 없다. 히틀러를 죽이고 싶어한 독일군 장교도 영화의 소재가 된다. 그래서 시대는 이 영화처럼 화합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때 힘들어한다. 각자의 입장이 모두 다르기에.
'프리덤 라이터'의 영화 속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1992년 LA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른들을 따라 아이들은 총을 들고 갱처럼 갈라져 싸우며 18세가 되기전에 죽지 않고 졸업하는 자체가 쉽지 않다. 폭력적인 그들은 자신의 '편'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비난하고 죽이는 걸 서슴치 않는다. 자리 조차 갈라 앉으니 애초에 학교 수업은 불가능하고 교사도 정부도 그들을 포기한다. 학교는 법적 한계 안에서 그들을 다룬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의 내면은 수없이 많은 상처 뿐이다. 소중한 가족,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지독한 경제적 난관으로 힘든 삶을 살아야하며 사회 여기저기서 행해지는 폭력과 차별에 맞서야 한다. 그들 중에는 보호받지 못하고 스스로 그 위기를 이겨야하는 아이들이 많다. 풍족하게 보호받으며 마약살 곳이나 들락거리는 백인 아이와 그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대조적이다. 아들에겐 학교 교육 보다 생존하는 일이 훨씬 중요한 문제다.
흑인 아이 자밀의 외모를 그려 인종적인 특징을 놀림감으로 삼고 웃던 아이들. 자신들 역시 차별의 피해자이면서 상처에 무심한 면모를 보이고 에린은 분노한다.
동시에 아이들의 모습 중 가장 마음이 아픈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집단 이지메'의 풍경이다. 입술이 튀어나온 흑인 아이를 조롱하는 그림으로 아이들은 킥킥거리고 교사인 여주인공의 지적에도 큰 잘못이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롱받는 처지이지만 상대방의 입장을 알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편견과 무지를 지적하는 교사에게 백인인 그녀는 절대로 자신들의 처지와 입장을 알 수 없다고 울먹인다. 외모와 인종 때문에 차별받는 아이들이 같은 논리로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모습은 어쩐지 마음이 아프다.
이런 아이들이 자신들의 태도를 바꾼 건 이혼까지 불사하며 희생한 교사의 적극적인 노력덕이기도 하지만, 다투고 있는 자신들이 똑같은 슬픔을 겪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라는 아이들 자신의 깨달음과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또박또박 적어내려가는, 글쓰기 덕분이기도 하다. 교사라는 등불이 있음을 알게된 아이들은 순순히 그녀의 지도를 따르게 된다. 미프 기스의 표현대로 평범한 그 고등학교 아이들은 옳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노력한 진정한 영웅들이 된다.
변화가 가능함을 알게 된 아이들은 후반부엔 교사 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갈 방향을 찾아 낸다. 교사 에린의 아르바이트로 돈을 구해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다녀온 후 안네 프랑크를 숨겨준 사람을 초청하기 위해 아이들끼리 돈을 벌고, 자신들의 변화를 위해 가족과 화해하며 인종의 이익과 차이를 넘어 옳은 일을 하려 노력한다. 라틴계 여자아이인 에바는 목숨을 위협받으며 증언하고 멀리 떨어져 살게 된다.
아이들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감싸주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학교와 정부가 법적인 한계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누군가는 그 길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미국, 그리고 세계의 어느 곳도 차이로 인한 갈등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차이는 차별을 불러오고 더 큰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차별과 차이를 해소하는 것 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를 위로하고 솔직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먼저 돌보려 한다면 그 과정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 차별받는 이를 위해 제도적이든 직접적이든 길을 터줘야한다, 1994년의 아이들은 기회를 얻었고 방법을 배웠다.
처음 영화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교훈과 감동을 강조하는 훈계조의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한 건 사실이다. 갈등을 극복한 많은 이야기들이 그 구조를 따르고 있고 이 영화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사실성을 강조하며 진행했지만 일면 그런 경향은 있다. 그렇지만 불행한 경험을 한 고등학생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본다면 무리없이 그 부분은 넘길 수 있다. 영화엔 홀로코스트 생존자 등은 실존인물이 그대로 출연했지만 안네 프랑크를 살려준 Miep Gies(2009년 현재100세) 역은 다른 배우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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