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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고백으로 박완서님의 글을 읽지 않은 지 꽤 되었습니다. 2000년경 읽었던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단편집, 1997년경 발표된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집 같네요. 제가 읽던 소설량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제법 관심있게 읽었던 소설에서 느낀 정서가 내가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던 그녀의 다뜻함이 한편으론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박완서님의 '소설'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TV 드라마 '지알고 내알고 하늘이 알건만(1986)'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배우 정애란님이 성남댁으로 등장한 이 단막극은 성남댁이 3년간 수발 들어주던 한 노인의 장례 절차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홀로된 부모를 모시기 싫어 갈 곳 없는 할머니 성남댁에게 뒷처리를 맡긴 극중 진태 엄마(정혜선)는 시아버지가 죽자 마자 깔끔하게 장례를 치르고 성남댁을 모른 척합니다.
그 드라마 이외에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2004)' 등이 영화와 TV로 옮겨져 작가의 왕성한 활동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1931년생의 작가는 현 세대들은 잘 알 수 없는 40-50년대의 시대상과 성장기를 거쳐온 현대인들의 빈틈을 꼼꼼하고 잔잔한 문체로 표현해주곤 합니다.
박완서님이 작품에서 서문에서 종종 서술한대로 기억이란 건 자기 편리에 따라 추억되고 펼쳐지게 마련이긴 하지만 80세로 영면하신 작가가 펼쳐낸 꼼꼼한 어린 시절은 그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이던지 내가 겪어 보지 않은 30년대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습니다. 반면 고령의 할머니가 겪을 수 있는 쓸쓸한 노후에 대한 글은 재치있으면서도 입맛이 쓰기도 하지요.
창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산고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가장 마음에 와닿던 표현은 영혼을 깎고, 제 살을 깍아 글을 쓴다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생각을 토대로 평생 작품을 만들고 모티브를 뽑아내기에 다른 사람들 보다 다양한 인생을 보며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박완서님은 그 부분을 '울거먹기'라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는 공통적인 창작자들 만의 고난이 아닐까 싶습니다.
1992년 출간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서문에는 '소설이 점점 단명해지다 못해 일회적인 소모품처럼 대접받는 시대'를 한탄합니다. 그럼에도 손톱만치도 쉬워지지 않는 소설쓰기로 인해 뼛속의 진을 다 빼 주다시피 힘들게 썼다고 회고하고 있지요. 작가가 힘겨워하는 또다른 이유는 누구든 자기 미화의 욕구를 극복하고 자신을 정직하게 묘사하는 걸 어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쳐 있음'을 고백한 작가는 기껏 활자 공해나 가중시킬 일회용품을 위해 이렇게 진을 빼지는 않았다는 위안이 필요하다고 글을 끝맺습니다. 소탈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짧은 투정은 1970년 40세의 나이로 문단에 데뷰해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던 그녀의 노고를 짐작하게 합니다.
담낭암으로 작고한 박완서 작가를 두고 '대한민국 문단의 친정 어머니'라는 표현을 쓰는 언론의 칭송은 거짓이 아닌듯 합니다. 은희경, 김영현, 이외수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서 예의를 표하며 그녀의 인생을 기리고 있네요. 누구 보다도 작가들의 마음은 작가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요.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걷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이 와닿는 풍경입니다.
박완서씨의 책에서 읽을 수 있던 정서는 따뜻하고 다정하지만 제가 읽던 책의 작가층과는 연령의 차이가 컸습니다. 특히 단편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읽었던 가정의 이야기, 노인들의 잔잔한 이야기는 '그럴 법 하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경험의 차이가 크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화의 시선이 머무르지 않는 소외된 연령층의 이야기를 읽은 건 익숙한 일이 아니었죠.
우리 사회에서 문학의 소재가 되기 힘든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는 건 '주류'가 되는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의 문화와 문학은 특정 주제, 특정 계층, 특정 연령에 편중된 경향이 있기에 노년층의 이야길 글 속에 담는다는 건 꼭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젊은 시절을 불태우다 늙어버린 부부의 윤기잃은 삶처럼 '너무도 쓸쓸한 당신'의 길일 수도 있었죠.
재미있고 유쾌한, 즐거움을 주는 글들은 많지만 박완서님의 글처럼 작은 것에 시선을 주는 글들은 흔치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작은 것들을 소비하는 적은 수의 사람들을 위해 '활자 공해'가 아닌 진정한 글을 발표하시는 분들이 그립습니다. 생경한 느낌, 낯선 느낌 때문에 이물감이 들었던 그녀의 소설이 이제서야 참 그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완서님의 '소설'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TV 드라마 '지알고 내알고 하늘이 알건만(1986)'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배우 정애란님이 성남댁으로 등장한 이 단막극은 성남댁이 3년간 수발 들어주던 한 노인의 장례 절차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홀로된 부모를 모시기 싫어 갈 곳 없는 할머니 성남댁에게 뒷처리를 맡긴 극중 진태 엄마(정혜선)는 시아버지가 죽자 마자 깔끔하게 장례를 치르고 성남댁을 모른 척합니다.
그 드라마 이외에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2004)' 등이 영화와 TV로 옮겨져 작가의 왕성한 활동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1931년생의 작가는 현 세대들은 잘 알 수 없는 40-50년대의 시대상과 성장기를 거쳐온 현대인들의 빈틈을 꼼꼼하고 잔잔한 문체로 표현해주곤 합니다.
박완서님이 작품에서 서문에서 종종 서술한대로 기억이란 건 자기 편리에 따라 추억되고 펼쳐지게 마련이긴 하지만 80세로 영면하신 작가가 펼쳐낸 꼼꼼한 어린 시절은 그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이던지 내가 겪어 보지 않은 30년대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습니다. 반면 고령의 할머니가 겪을 수 있는 쓸쓸한 노후에 대한 글은 재치있으면서도 입맛이 쓰기도 하지요.
작가는 제 살을 깎아 글을 만든다
창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산고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가장 마음에 와닿던 표현은 영혼을 깎고, 제 살을 깍아 글을 쓴다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생각을 토대로 평생 작품을 만들고 모티브를 뽑아내기에 다른 사람들 보다 다양한 인생을 보며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박완서님은 그 부분을 '울거먹기'라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는 공통적인 창작자들 만의 고난이 아닐까 싶습니다.
1992년 출간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서문에는 '소설이 점점 단명해지다 못해 일회적인 소모품처럼 대접받는 시대'를 한탄합니다. 그럼에도 손톱만치도 쉬워지지 않는 소설쓰기로 인해 뼛속의 진을 다 빼 주다시피 힘들게 썼다고 회고하고 있지요. 작가가 힘겨워하는 또다른 이유는 누구든 자기 미화의 욕구를 극복하고 자신을 정직하게 묘사하는 걸 어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쳐 있음'을 고백한 작가는 기껏 활자 공해나 가중시킬 일회용품을 위해 이렇게 진을 빼지는 않았다는 위안이 필요하다고 글을 끝맺습니다. 소탈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짧은 투정은 1970년 40세의 나이로 문단에 데뷰해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던 그녀의 노고를 짐작하게 합니다.
담낭암으로 작고한 박완서 작가를 두고 '대한민국 문단의 친정 어머니'라는 표현을 쓰는 언론의 칭송은 거짓이 아닌듯 합니다. 은희경, 김영현, 이외수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서 예의를 표하며 그녀의 인생을 기리고 있네요. 누구 보다도 작가들의 마음은 작가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요.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걷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이 와닿는 풍경입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
박완서씨의 책에서 읽을 수 있던 정서는 따뜻하고 다정하지만 제가 읽던 책의 작가층과는 연령의 차이가 컸습니다. 특히 단편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읽었던 가정의 이야기, 노인들의 잔잔한 이야기는 '그럴 법 하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경험의 차이가 크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화의 시선이 머무르지 않는 소외된 연령층의 이야기를 읽은 건 익숙한 일이 아니었죠.
우리 사회에서 문학의 소재가 되기 힘든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는 건 '주류'가 되는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의 문화와 문학은 특정 주제, 특정 계층, 특정 연령에 편중된 경향이 있기에 노년층의 이야길 글 속에 담는다는 건 꼭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젊은 시절을 불태우다 늙어버린 부부의 윤기잃은 삶처럼 '너무도 쓸쓸한 당신'의 길일 수도 있었죠.
재미있고 유쾌한, 즐거움을 주는 글들은 많지만 박완서님의 글처럼 작은 것에 시선을 주는 글들은 흔치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작은 것들을 소비하는 적은 수의 사람들을 위해 '활자 공해'가 아닌 진정한 글을 발표하시는 분들이 그립습니다. 생경한 느낌, 낯선 느낌 때문에 이물감이 들었던 그녀의 소설이 이제서야 참 그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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