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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영화나 드라마를 아예 보지 않는다거나 아예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각 장르별 선호 순위를 매겼을 때 제일 아래에 있는 것이 전쟁물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흘러나오는 달달한 OST는 좋아해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깊게 몰입을 못하는 것처럼 전쟁 영화는 약간은 냉정한 눈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구하기(Saving Private Ryan, 1998)'를 보고 나서는 아예 전쟁물을 한동안 선택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겠다는 작전명령 때문에 해안에 상륙한 미군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첫장면, 주인공들의 충격 만큼이나 잘리워진 시신들을 봐야했던 관객들의 충격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 화면을 지켜봐야하는 괴로움. 저렇게까지 극단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로 감정의 극한을 봐야겠는가. 누군가는 실제로 저 고통의 소재가 되지는 않았을까. 지금 이 장면을 '즐기고' 있다는 게 인간에 대한 죄는 아닐까 하는 느낌.
따지고 보면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인간의 희노애락, 오욕칠정, 생사고락 중 그 어느 것이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남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감동을 느끼고 휴식을 즐기고 음식을 먹는다는 기분은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지금도 HBO 드라마 시리즈들의 생생한 묘사 장면들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곤 합니다.
남들은 모두 명작이라 부르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나 '퍼시픽(Pacific)'을 그닥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겠죠. 물론 그 두 드라마가 사람들의 찬사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명작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인간적인 전쟁의 현장에서 피어나는 '인류애'의 문제는 늘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제가 가진 선입견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하니까요.
인간은 어디까지 오락거리로 삼을 수 있나 하는 문제를 처음 생각해본 건 '은하철도 999'의 한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입니다. '영구전투실험실(永久戦斗実験室)'란 제목의 그 에피소드는 철이가 메텔과 들린 관광 행성 '라이플 그라나다'의 이야기로 그들의 관광 상품은 전사들의 전쟁입니다. 다른 혹성에서 납치해온 전사들을 이용해 전쟁을 연출하고 관광객들은 두꺼운 유리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최고급 식사를 대접받습니다.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이 진행되고 그에 맞서 싸우다 매일매일 동료들이 죽어나가지만 탈출할 방법도 도망갈 곳도 없는 그들의 처참한 생활, 그들 중 일부는 반란을 꾀하며 그 상황을 반전시켜려 해도 그런 노력 마저도 '쇼'의 일부일 뿐입니다. 철이와 만났던 그곳의 전사 제이드는 비인간적인 자신의 삶에 좌절하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상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권투와 레슬링은 일종의 규칙과 제약을 가진 '구경거리'이고 인명의 살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때로 몇몇 선수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로마 시대 로마인들이 즐겼다는 글래디에이터들의 살상게임은 사람이 죽고 죽음에도 그저 '노예의 죽음'이라 치부했던 역사의 기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게임을 보고 즐겼다는 '사실'은 가끔 사람들을 섬뜩하게 합니다.
글래디에이터들의 치열한 삶을 소재로 삼은 미드 '스파르타쿠스'는 고대의 사람들이 보고 즐기던 원시적인 게임을 그대로 드라마로 재현합니다. 피튀기고 잔인한 '하드고어(Hard-gore)'라는 평가에 덧붙여 적나라한 섹스를 묘사해 원색적인 드라마란 평을 듣고 있죠. 현대인들이 즐기는 '볼거리'로서는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오락거리의 소재가 되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현대인들이 즐기는 이 '테마'들은 과거나 현실에서 모티브를 얻어오긴 하지만 대부분 가상으로 만들어진 컨텐츠입니다. 때로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실'을 강조하는 가짜 리얼리티쇼를 즐기기도 합니다. 어차피 '영화'나 '드라마'나 '쇼'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상의 소재'가 아예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기에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인간은 원시적인 본능을 자제하고 오히려 그 본능의 영역을 오락거리로 만들 줄 아는 영리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점점 더 새로운 소재와 강도높은 컨텐츠를 갈망하는 호기심을 가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욕망은 한가지 소재에 만족하지 않고 점점 더 다양한 수준의 오락물을 제작하고 추구하는 원천이 됩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발명된 이후 인간의 볼거리는 더욱 더 잔인하고 원색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앞서 언급한 '은하철도 999(銀河鐵道999)'에 포함된 에피소드 중에는 다양한 인간의 약점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행성, 돈이나 편리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행성 등에서 철이(테츠로)는 인간의 상식으로 알아왔던 가치들이 깨져버린 나간 현장을 보게 됩니다. 애초에 영원한 생명을 얻은 기계인간들이 살아있는 인간들을 사냥한다는 초반의 설정 자체가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죠.
'자극적인' 컨텐츠들은 분명 그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개개인의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사회에서 그 정도의 오락거리가 없이 위안을 받고 열기를 잠재울 수 있는 인류는 없습니다. 굳이 그런 류들을 '카타르시스'라 부르지 않아도 인간에게 필요한 영역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최근 등장하는 잔인한 영화들이나 드라마들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듯 부풀어오른 고무 풍선을 보는 느낌처럼 아슬아슬하다고 할지. 맨몸으로 총을 맞은 시민들이 죽어가는 리비아 사태를 보면서도 무덤덤하고 이라크전을 비롯한 전쟁 장면을 보면서 '화끈하다'고 표현하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더욱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아이들은 TV 속 죽음을 보면서 왜 울지 않을까요. 실제 일어나는 사건, 사고, 전쟁이 게임과 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 생각하는 건 아닌지 겁이 나기도 합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겠다는 작전명령 때문에 해안에 상륙한 미군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첫장면, 주인공들의 충격 만큼이나 잘리워진 시신들을 봐야했던 관객들의 충격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 화면을 지켜봐야하는 괴로움. 저렇게까지 극단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로 감정의 극한을 봐야겠는가. 누군가는 실제로 저 고통의 소재가 되지는 않았을까. 지금 이 장면을 '즐기고' 있다는 게 인간에 대한 죄는 아닐까 하는 느낌.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1998)의 한장면
따지고 보면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인간의 희노애락, 오욕칠정, 생사고락 중 그 어느 것이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남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감동을 느끼고 휴식을 즐기고 음식을 먹는다는 기분은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지금도 HBO 드라마 시리즈들의 생생한 묘사 장면들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곤 합니다.
남들은 모두 명작이라 부르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나 '퍼시픽(Pacific)'을 그닥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겠죠. 물론 그 두 드라마가 사람들의 찬사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명작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인간적인 전쟁의 현장에서 피어나는 '인류애'의 문제는 늘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제가 가진 선입견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하니까요.
전쟁을 구경하며 즐겁게 식사하는 관광객
인간은 어디까지 오락거리로 삼을 수 있나 하는 문제를 처음 생각해본 건 '은하철도 999'의 한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입니다. '영구전투실험실(永久戦斗実験室)'란 제목의 그 에피소드는 철이가 메텔과 들린 관광 행성 '라이플 그라나다'의 이야기로 그들의 관광 상품은 전사들의 전쟁입니다. 다른 혹성에서 납치해온 전사들을 이용해 전쟁을 연출하고 관광객들은 두꺼운 유리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최고급 식사를 대접받습니다.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이 진행되고 그에 맞서 싸우다 매일매일 동료들이 죽어나가지만 탈출할 방법도 도망갈 곳도 없는 그들의 처참한 생활, 그들 중 일부는 반란을 꾀하며 그 상황을 반전시켜려 해도 그런 노력 마저도 '쇼'의 일부일 뿐입니다. 철이와 만났던 그곳의 전사 제이드는 비인간적인 자신의 삶에 좌절하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상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권투와 레슬링은 일종의 규칙과 제약을 가진 '구경거리'이고 인명의 살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때로 몇몇 선수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로마 시대 로마인들이 즐겼다는 글래디에이터들의 살상게임은 사람이 죽고 죽음에도 그저 '노예의 죽음'이라 치부했던 역사의 기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게임을 보고 즐겼다는 '사실'은 가끔 사람들을 섬뜩하게 합니다.
은하철도 999 47, 28화 영구전투실험실(永久戦斗実験室)
글래디에이터들의 치열한 삶을 소재로 삼은 미드 '스파르타쿠스'는 고대의 사람들이 보고 즐기던 원시적인 게임을 그대로 드라마로 재현합니다. 피튀기고 잔인한 '하드고어(Hard-gore)'라는 평가에 덧붙여 적나라한 섹스를 묘사해 원색적인 드라마란 평을 듣고 있죠. 현대인들이 즐기는 '볼거리'로서는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오락거리의 소재가 되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현대인들이 즐기는 이 '테마'들은 과거나 현실에서 모티브를 얻어오긴 하지만 대부분 가상으로 만들어진 컨텐츠입니다. 때로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실'을 강조하는 가짜 리얼리티쇼를 즐기기도 합니다. 어차피 '영화'나 '드라마'나 '쇼'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상의 소재'가 아예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기에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과연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을까
인간은 원시적인 본능을 자제하고 오히려 그 본능의 영역을 오락거리로 만들 줄 아는 영리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점점 더 새로운 소재와 강도높은 컨텐츠를 갈망하는 호기심을 가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욕망은 한가지 소재에 만족하지 않고 점점 더 다양한 수준의 오락물을 제작하고 추구하는 원천이 됩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발명된 이후 인간의 볼거리는 더욱 더 잔인하고 원색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앞서 언급한 '은하철도 999(銀河鐵道999)'에 포함된 에피소드 중에는 다양한 인간의 약점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행성, 돈이나 편리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행성 등에서 철이(테츠로)는 인간의 상식으로 알아왔던 가치들이 깨져버린 나간 현장을 보게 됩니다. 애초에 영원한 생명을 얻은 기계인간들이 살아있는 인간들을 사냥한다는 초반의 설정 자체가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죠.
Starz의 미드 스파르타쿠스(Spartacus, 2010)의 한장면
'자극적인' 컨텐츠들은 분명 그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개개인의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사회에서 그 정도의 오락거리가 없이 위안을 받고 열기를 잠재울 수 있는 인류는 없습니다. 굳이 그런 류들을 '카타르시스'라 부르지 않아도 인간에게 필요한 영역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최근 등장하는 잔인한 영화들이나 드라마들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듯 부풀어오른 고무 풍선을 보는 느낌처럼 아슬아슬하다고 할지. 맨몸으로 총을 맞은 시민들이 죽어가는 리비아 사태를 보면서도 무덤덤하고 이라크전을 비롯한 전쟁 장면을 보면서 '화끈하다'고 표현하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더욱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아이들은 TV 속 죽음을 보면서 왜 울지 않을까요. 실제 일어나는 사건, 사고, 전쟁이 게임과 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 생각하는 건 아닌지 겁이 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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