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황신혜와 김내성의 소설 '악마파'

Shain 2011. 3. 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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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근대, 현대 문단의 초기 작품들은 어투가 생경하고 익숙치 않은 단어들로 채워져 있음에도 흥미로운 수작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인(雅人) 김내성은 지금 읽어봐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단편 소설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와세다 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추리소설 '타원형의 거울'을 발표한 이래 1957년 '실락원의 별'을 연재하던 중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김내성(혹은 김래성)은 추리 소설, 공포 소설을 다수 작업하는 동시에 시대적 아픔을 잘 묘사한 순문학도 발표했었고  '똘똘이의 추억',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의 인기 동화도 작업해 한참전에 고인이 된 그의 동화를 읽으며 자란 성인들도 다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헤어진 쌍둥이 자매가 하나는 친부모 밑에서 곱게 자라고 나머지 하나는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자라게 된다는 내용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은 80-90년대까지도 많이 읽히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변영훈이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 '청춘극장(KBS, 1992)'는 일제 시대 독립운동에 가담한 젊은이들의 아픔을 그린 내용으로 이 역시 김내성의 작품입니다. 외국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진주탑'으로 번안한 작가도 바로 이 작가이고 쾌걸 조로를 '검은별'로 번안해 아이들 사이에 인기를 끌게 만든 사람도 이 작가입니다.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매진한 당시 최고의 대중 소설 작가가 아닌가 합니다.

최근 '마인(魔人)'이란 그의 소설이 재출간되면서 '한국 최초의 첫 장편 추리소설 작가'라 홍보하는 걸 보았는데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약한 그의 능력은 시대를 초월해 인기를 끌고 있는 듯합니다. 김내성의 소설 중 많은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 재탄생되었고 그중 단편집 '비밀의 문'에 실린 '악마파'를 본 후 김내성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기억도 안날 만큼 매우 어릴 때 접한 작품인데 지금까지도 그 기괴한 분위기가 잊혀지지 않네요.



 TV로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와 내용

80년대 인기를 끌던 'MBC 베스트셀러 극장'엔 특이하고 시선을 끄는 소재들이 자주 드라마화되곤 했습니다. 그중에서는 과연 이 작품이 한국 소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신선한 내용도 많았죠. 그런데 나중에 통계를 찾아보니 이후 제작된 '베스트극장'이전에 제작된 '베스트셀러 극장'엔 외국 작품을 번안해 만든 편수가 3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외국 영화나 극본을 활용한 에피소드는 확실히 눈에 띄게 구분이 가더군요.

1985년 12월 21일에 방영된 '악마파'란 드라마를 보며 이 작품의 원작은 외국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대적으로 배고픈 사람이 많던 시절에 '예술'을 이야기하던 주인공들도 낯설었고 '악마파'라는 기괴한 사조를 추종하는 화가들이라니 80년대의 정서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다시 찾아보니 어디에 처음 게재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김내성의 단편집 '비밀의 문(1949)'에 실린 작품이었습니다.

김내성 원작의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 경우가 제법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 60년대나 70년대 작품이라 현대의 시청자들은 낯설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80년대에 시청했던 '악마파' 역시 1965년에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괴한 스타일의 이국적인 한국 영화들 중에는 이 분의 소설이 원작인 것이 많습니다. 특히 '청춘극장'은 영화로도 세 번 제작되고 드라마로도 한번 제작됩니다.

김내성 원작의 영화와 드라마들 (이미지는 '쌍무지개 뜨는 언덕'과 '청춘극장')


드라마로 탄생한 소설 '악마파'의 내용은 일본 유학생 사회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로 두 명의 특이한 화가, 노단과 백추 그리고 그들과 친분을 나누는 '김군'이라 불리는 주인공, 그의 여동생 루리의 이야기입니다. 김군은 유학와서 미술을 공부하고 루리는 음악을 전공하는 아름다운 학생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보다 오빠의 의견을 따르는 순종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노단과 백추가 루리를 사랑하게 되지만 루리의 마음은 조금쯤 백추에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상반된 성격을 가진 이 두 명의 화가 노단과 백추가 악마파를 추종하는 인물들이란 것입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체구가 큰 노단은 늘 남들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하고 다리를 절며  왜소하고 하얀 얼굴의 가난한 천재 화가 백추는 피학적인  취향을 갖고 있지만 둘은 동시에 아름다운 루리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성취하고 싶어합니다. 그 둘의 치열한 사랑 속에서 루리는 가엽게 죽어갑니다.

원본 소설이 옛날 말투로 제작되어 그 내용을 쉽게 알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고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표기된 외래어들(토왈렛 같은 단어)은 이국적인 이미지를 위해 작가가 고의적으로 사용한 것인지 습관인지 알 수 없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내용의 괴기함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되면서도 이 소설 어쩐지 매력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내성은 작품중에 '백(白)'씨 성을 자주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하얀 가을이란 뜻의 '백추'란 인물은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 봅니다.

85년 제작된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백추 역은 연극인 출신이었던 유인촌, 사디스트 성격의 노단은 조경환, 김군 역은 김용건, 루리 역을 맡았던 건 당시 데뷰한 지 얼마 안되던 신인 여배우 황신혜였습니다. 남주인공 세 사람의 연기도 적절했지만 그들 중 가장 연기 경력이 짧았던 황신혜가 아름다운 루리 역을 잘 소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잔잔한 이미지가 극중 두 괴짜 화가가 열렬히 사랑했던 젊은 여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했었지요.



 황신혜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생각하지만

데뷰 초기의 아름다운 여자배우들이 대부분 그렇듯 황신혜도 연기력, 발음 문제로 자주 지적을 받았습니다. 아름답다는 사실엔 모두들 동의하지만 연기력은 상대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죠. 최근 모델급 여배우들과 달리 황신혜는 계속 해서 이런 단막극에 꾸준히 출연했고 지금은 색깔있는 연기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초기 황신혜의 드라마 중 대표작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않고 이 '악마파'를 먼저 생각해 냅니다.

87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진주탑'


황신혜로 인해 관심을 가진 작가 김내성,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시대적 한계를 나타내는 듯 대부분 순종적이거나 적극적이지 않은 편입니다. 또 번안한 소설이 제법 많은 인물이라 창작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설정도 모리스 르블랑을 음차한 듯한 '유불란(劉不亂)' 이라던가 지식인들의 갈등을 묘사한 내용 등 시대상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느낌도 들 때가 있습니다. 김내성 작가가 타계한게 벌써 50년도 훨씬 전이니 그런점들은 감안해야할 부분이라 보입니다.

혹자는 김내성의 역량이 대중 소설을 등한시하는 우리 문단에서 폄하된 경향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김내성이 더 오래 살았다면 한국 추리 소설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87년 KBS에서 방영되던 '진주탑(임혁, 연규진, 금보라 등 주연)'을 보면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한국적으로 잘 옮겨놓았단 느낌이 듭니다. 진정한 스토리텔러의 자질을 가진 멋진 작가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미지 출처, 참고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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