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나무, 이도와 가리온 누가 조선의 뿌리가 되려 하는가

Shain 2011. 11. 1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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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유서깊은 시골 마을에 가면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마을 마다 수종도 다르고 견뎌온 세월도 다르지만 사람들은 그 나무의 생명이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까지 결정한다 믿어 소중히 여기고 처음 그 나무를 본 사람들은 사람 보다 오래 살아온 그 나무의 위엄에 경건한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 나무도 처음 심어질 때는 바람에 흔들리고 뿌리까지 뽑혀 날아갈 뻔 했던 시기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단단한 뿌리로 땅을 꼭 쥐고 있어 어떤 재앙이 와도 끄덕하지 않을 듯합니다.

 SBS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 제목은 많은 문구를 연상하게 합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세'라는 용비어천가의 구절이기도 하고 극중 밀본들이 살인을 저지를 때 사용한 음양오행에서 상생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것도 나무와 뿌리입니다. 한 그루 나무가 오랫동안 뽑히지 않고 부러지지 않고 꽃을 피우려면 그 뿌리가 단단하고 튼튼해야한다는 그 말은 과연 지당합니다. 주인공 세종 이도(한석규)와 밀본 본원 정기준(윤제문)은 개국 50년도 되지 않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뿌리를 세우는 일을 두고 갈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종수(한상진), 이신적(안석환) 등과 밀본 집회에 참석한 가리온

24년간 숨어살던 정도전의 조카 정기준은 '사대부가 조선의 뿌리'라고 단호히 주장합니다. 아무리 군주제를 선택한 조선이라지만 조선은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나라기에 그들의 주장은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마치 사이비 종교의 집회라도 연듯 정도전의 뜻을 따르고 추모한다면서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채 술잔을 돌리는 밀본 조직원들의 모습은 광인들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군주제를 겪어보지 않은 현대인들은 신분제를 추구하는 나라에서 어느 한 계층이 이런식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장면을 고운 눈으로 보기 힘듭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돈과 지위라는 또다른 신분제가 지속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형식적으로라도 현대인들은 평등한 인간이고 '사대부'라는 존재 보다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특히 조선의 '유학'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부분도 있었지만 잔인하고 융통성없는 신분제나 실리 보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어리석음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경우도 많았기에 더욱 밀본들이 '나대는' 모습을 곱게 볼 수가 없습니다.

시신을 해부하여 발음 기관을 이해한 세종

한편 세종은 가리온을 시켜 시신을 해부하고 그동안 상형하지 못했던 후음의 상형을 학자들과 상의하려 합니다. 당시에 집현전에는 농학, 점성학, 음악, 과학, 해부학을 비롯한 각종 학문의 서적을 발간하고 또 그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도 많았지만 시신을 훼손하고 잘라낸다는 기이한 행동은 이해받기 힘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더우기 천인도 아닌 왕이 직접 그 과정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 모습은 성삼문(현우), 정인지(박혁권)같은 젊은 학자에게도 경악스럽기만 합니다. 유학을 위해 세종을 저지하려는 가리온, 한글을 위해 과학을 이용하려는 세종 그 둘은 너무도 대조적인 선택을 한 셈입니다.



백성에게 진정 유용한 것은 무엇인가, 세종이 선택한 격물

유학, 유교, 성리학, 주자학 등 부르는 이름은 조금식 다르지만 유학 역시 하나의 학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연구와 토론을 거듭한 분야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고 고리타분한 구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극중 밀본 사람들이 살인의 방법으로 선택한 오행(목극토, 화극금 등)이나 통신 수단으로 사용한 팔괘(八卦) 등은 단순하지 만은 않은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또 유학에도 여러 입장이 있어 조선시대의 가장 큰 폐단으로 여겨졌던 남녀 불평등 서얼 차별같은 것도 본래는 이론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세종은 정윤함에서 가리온에게 술을 내리며 남사철(이승형)의 자작극 때문에 고생하였음을 위로합니다. 세종은 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뜻을 삼봉 정도전은 이해할 것이라며 그의 글을 여러번 읽고 또 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숨어사는 동안 사대부들이 그리 천시하고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였던 백정으로 위장한 정기준, 적에게도 허리를 굽히며 남루한 행색으로 사는 그는 세종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지만 세종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세종 곁에서 세종의 본뜻을 알아내려 해부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정윤함에서 세종은 가리온에게 술을 내리고 그가 따른 술로 정도전을 추모한다

같은 삼봉 정도전을 읽었음에도 가리온은 세종과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정도전은 과연 밀본지서를 만들고 결사조직인 밀본을 꾸리면서 사대부들의 어떤 변화를 원했던 것일까요. '꽃은 꽃일 뿐, 뿌리가 될 수 없다'는 정도전의 마지막 말은 가리온이 밀본을 위해 갖은 모욕을 견디고 사는 이유가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 보다 날카롭고 정확하게 조선 왕조를 비난하고 이방원(백윤식)을 정도전의 이념을 훔친 도둑이라 몰아부치던 어린 정기준은 유학이 조선 후기에는 지나치게 명분을 중시하여 엇나간 모습을 보였듯 자신 역시 삐뚤어진 유학자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밀본지서 원본을 가져오라는 혜강(권성덕)의 말에 정기준은 세종이 집현전을 중심으로 왕의 논리를 옹호하는 친위부대를 만들었음을 지적하며 '사대부'들 중심의 개혁을 시사합니다. 그는 또한 왕이 재상들 몰래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음도 지적합니다. 밀본지서의 말대로라면 왕은 얼굴 마담 급인 '꽃'에 불과한 존재인데 스스로 너무 많은 업적을 이루며 '설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종이 성군이기에 망정이지 다른 악한 왕이었으면 그런 시스템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는 가리온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밀본지서의 단서를 알아본 가리온 어떻게 채윤을 만날 것인가

그러나 가리온은 경연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관습과 구태에 얽매여 유교적 이론과 논리를 갱신하지 못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하는 왕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재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세종의 '격물(格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자체로 비난했던 사대부들이 몹시 많습니다. 앞으로 수백년을 뻗어갈 나라의 뿌리가 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과학적인 문자를 개발하고자 노력하는 왕을 비난함은 본래 꿈꾸던 이상이 아닌 단순한 집착을 실현하고자 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학자임에도 살인을 불사하는 그의 집념은 무섭도록 오싹한 구석이 있습니다.

정기준의 호위무사 윤평(이수혁)은 채윤(장혁)의 동료 초탁(김기방)의 가슴에 칼을 쑤셔넣을 정도로 상당히 잔인합니다. 정도전의 호위였다는 이방지(우현)는 그런 윤평에게 출상술을 가르쳤지만 제자라 부르지도 않고 거부하는 듯합니다. 무휼(조진웅)의 동료이기도 했던 그는 현재의 밀본이 이루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를 설득하고 한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그들의 관계, 세종은 어린 시절 정기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윤평과 개파이는 똘복을 찾아온 이방지의 사람을 가차없이 죽인다

나의 집현전에는 정기준이 필요하다고 했던 그는 가리온의 얼굴을 보고 정기준의 그림자를 보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최근 세종이 가리온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설이 묘하게 설득력을 얻어가는 중인듯 합니다. 어제 세종은 가리온이 따라준 술로 정도전을 추모했습니다. 제사에서도 제주가 따른 술로 예를 올리는 게 기본이지요. 가리온은 시신을 해부하며 자신도 모르는 새 후음 'ㅎ'의 상형을 도와주었습니다. 천인으로 살아본 그가 사대부들의 주장에 스스로 불합리를 깨달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조선의 뿌리가 백성에게 문자를 주고 과학을 선사한 세종임을 알고 있지만 가리온과 그의 경합은 시사하는 바가 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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